소설리스트

115화 (115/235)

한 줄 더하기

"회수하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어둠 속에서 들려온 질문에 흰 가면의 남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혈교의 교주와 독대하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일월팔가(日月八家)의 신기는 주인을 가린다. 혹자는 그 핏줄이 기준이라 생각하나, 실상은 전혀 다르지. 나형 저 아이는 그저 자격이 부족했을 뿐이다."

"허면, 저 소백이라는 아이는……?"

"그걸 지켜볼 따름이다. 저 아이 손에 황제진경과 일월팔가의 신기. 그리고 그 핏줄이 섞여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겠지."

"설마 천마의 수라고 보시는 겁니까?"

이 질문에는 답을 아꼈다.

흰색 가면을 손끝으로 더듬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다 뒤늦게 말을 이었다.

"이곳, 신교에서 얻을 수 있는 물건은 모두 얻었다. 대계를 다음 방향으로 움직일 때겠지."

"드디어 움직이는 겁니까?"

"가서 종가(種家)의 이들에게 전해라. 배신자 강 씨(氏)의 물건은 회수했다고. 무덤을 열 준비를 마쳤으니, 제물을 대기하라 해라."

"황릉(皇陵)의 문이 드디어 열리는군요. 무당의 그 아이는 어떻게 할까요?"

"이번 기회에 회수해라. 막천강의 수가 실패했으니, 굳이 무당에 목멜 필요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성좌(星座)."

질문을 던지던 인물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기척조차 남기지 않는 상승의 경공이었다.

"시곗바늘은 돌아가기 시작했다. 천마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곧 모든 것은 몰락하고 옛것이 부활하여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네 목은 내 손으로 직접 베어주마."

다짐 비슷하게 혼잣말을 흘리는 남자.

비장한 말을 맺으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백색의 가면을 천천히 벗었다.

얼굴 절반이 외력에 일그러진 흉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뒤에서 수군거리기를 흉면악귀(凶面惡鬼).

신교팔반의 일원이며 그 수장인 인물이었다.

천마 아래 모든 무인의 정점.

일인지하 만인지상.

"기다려라, 천마."

무영살(無影殺), 탁발귀였다.

#

당연한 말이지만, 큰 사고 이후에는 수습 기간이 필요했다.

나형의 폭주가 불러온 화재는 신교의 거주지역 절반 이상을 태울 만큼 컸다.

전각을 정비하고 피해 입은 이들을 추슬러야 했다.

"일주일인가."

내각에서 정식으로 공문이 내려왔다.

천마대전을 일주일 뒤로 미룬다는 내용이었다.

명한은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강유나 파운 쪽은 어때?"

"내각 사람에게 물어보니까 별다른 반응은 없대. 다들 휴식을 받아들이고 있어."

"파운만이 아니라 강유도 말인가? 흐음."

"이런 상황에서 승부를 고집하기는 어려웠겠지."

"뭐, 그것도 그렇지만…… 사람 풀어서 강유의 궁 쪽 소식을 알아봐 줄 수 있어?"

흐름은 잔잔했지만, 명한은 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형의 폭주 당시 강유는 한 점의 미련도 없이 현장을 벗어났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그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아, 사실 그 건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찾았다! 여기 있었구나!"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냅다 뛰어서 명한의 품에 안겼다.

"묘아?"

신투, 묘아였다.

자매인 쉬엔과 있어야 할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명한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히히히. 오래간만이야, 소백. 잘 지냈어?"

"나야 뭐…… 그보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

"귀의? 그 사람을 만났어. 일월과 이월이 보낸 편지를 전달하러 갔다가 소백이 날 필요해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움직였지."

"귀의가?"

"응. 응. 여기 편지도 있어."

품에서 편지를 꺼내 건네주는 묘아.

두께가 두툼한 것이 내용이 적지 않았다.

"흐음."

명한의 눈이 편지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그간 귀의의 행적과 은거촌의 상황.

그리고 밖에서 들려온 몇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묘아를 보낸다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었다.

"무슨 내용이야, 소백?"

"일단 은거촌은 잘 정착한 모양이야. 전대 황제의 치료도 정상적으로 시작한 거 같고. 문제라면 몇몇 문파에서 나타나는 이상 징후인데……"

"이상 징후?"

"짧게 말하자면 첩자야."

툭툭. 편지의 한 곳을 손으로 두드렸다.

무당, 아미, 청성, 소림…… 중원 대부분의 문파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문파에 세작을 심는 거야 평범한 일이니 대수로울 건 없어. 다만, 거의 같은 시기에 모든 문파에서 동시다발적인 행동 징후가 보이는 건 정상이 아니지."

"뭔가 실행되고 있다. 이런 건가?"

"아마도. 귀의는 신교에서도 같은 움직임이 있을 거라 판단해서 묘아를 보낸 거야."

"근데 왜 묘아야?"

"묘아만큼 잠입과 암행에 능한 사람이 없거든."

"핫핫핫. 역시 날 알아주는 건 소백밖에 없네."

묘아가 금세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신투로 다져진 잠행과 능파미보는 경지를 초월해서 단연 독보적이었다.

신교 안에서 사람을 찾거나 정보를 모으기에는 묘아가 최선이다.

"그럼 말 나온 김에 부탁할게, 묘아."

"응? 응?"

"이게 천마궁의 지도야. 이곳, 강유의 처소 주변을 좀 정탐해 줘. 뭔가 수상쩍다 싶으면 전부 기억해서 전달하면 돼."

"나 방금 왔는데?"

"부탁할게. 한시가 급한 일이야."

"으으으. 갔다 오면 보상해 줘야 해!"

"알았어. 원하는 거 하나."

"약속한 거다!"

"무리한 부탁은 말고……"

"에에에에에. 안 들려! 안 들려!"

뒷말은 무시하며 묘아가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바람조차 따라오지 못하는 상승의 경공이었다.

‘못 보던 사이에 실력이 더 늘었네.’

잡힐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시끄러운 꼬맹이 같으니."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됐거든? 그보다 저 꼬맹이가 정보를 물어오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숨죽이고 있어?"

"일단은. 정리할 물건도 좀 있고."

"정리할 물건?"

은소소의 물음에 명한은 가슴팍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떤 물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형이 죽고 묵혼공에 딸려 들어온 신기.

"화륜."

주인을 태운 불꽃이었다.

#

습작의 설정상 각 가문의 신기는 피를 잇는 자만이 익힐 수 있다.

하지만 배경으로 짜둔 몇 가지 설정을 더해서 이를 분석하면 다른 결과가 나온다.

"혈계주법?"

"피를 통해서 힘을 승계하는 독특한 술법이야. 세대가 이어질수록 그 힘과 결속이 점차 강해지지. 각 부족에 전해지는 이 신기들은 그 술법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어."

"그럼, 결국 혈통으로 전해지는 것과 같잖아."

"다르지. 순수하게 혈통으로 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피로 이어지는 거니까."

약간 애매한 답을 보충하기 위해 명한이 천을 하나 꺼냈다.

나형이 입고 있던 옷의 일부였다.

그의 피가 한가득 묻어 있었다.

"이건 왜 챙겨온 거야?"

"확인할 게 있어서."

명한은 뒤이어 금환을 챙겨와 옷자락 위에 올렸다.

잔떨림과 함께 옷자락 위로 무언가 스물스물 기어 나왔다.

눈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였다.

"우으윽! 이게 뭐야!?"

"혈사충(血事蟲). 나형의 상태가 불사종법과 관계가 있다고 판단한 순간부터 예상했어. 화륜 부족의 피를 혈사충으로 머금어서 신기를 속인 거지."

"하. 그게 가능해?"

"말했잖아. 혈계주법이 판단하는 건 피밖에 없어. 혈사충으로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는 거지. 다만……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얘기는 아니야."

"부족했으니, 폭주했다는 거네."

"응. 파운과는 경우가 다른 거지. 피도 옅고 제어도 모자라니 신기가 날뛸 수밖에."

명한이 손짓으로 혈사충을 한곳으로 모았다.

‘혈사충은 혈교에서 고를 개량해서 만든 알파 타입. 이게 등장하려면 시기상으로 3, 4년은 일러. 역시 모든 사건이 가속화됐어.’

말하자면 이젠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징그러운 거로 뭘 할 건데?"

"먹어야지."

"……뭐?"

"혈사충은 고의 일종이야. 칠채향으로 분석이 가능해. 그리고 혈사충에 담아둔 피의 성분도 필요하고. 화륜의 힘을 이해하려면 필수적이니까."

똥 씹은 표정의 은소소를 무시하고 명한이 혈사충을 집어 들었다.

‘젠장.’

그라고 왜 벌레를 먹는 게 좋겠는가.

하지만 힘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역겨운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런 식인가."

이내, 칠채향을 통한 혈사충의 분석이 끝났다.

고의 역할을 상쇄하는 성분과 그것을 증폭하는 성분 역시 한 번에 이해됐다.

필요한 재료는 모두 신교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혈사충의 안쪽.

혈륜을 움직인 피의 흔적도 직감적으로 분석이 됐다.

"이건 좀 묘하네."

명한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진경을 꺼내왔다.

혈계주법을 파악하면서 느낀 어떤 기질이 매우 익숙했다.

그건 황제진경을 담고 있는 양피지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과 닮아 있었다.

"맞네. 같은 방식이야."

"같아? 뭐가?"

"이 글을 새긴 방식과 혈계주법의 특징이 정확하게 같아. 둘 다 피를 이용했어."

"피라고? 이 검붉은색이 먹이 아닌 피라는 거야?"

명한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글자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이미 이 양피지는 과거에 한 차례 찢어졌다가 붙은 이력이 있다.

단순히 오래된 물건이 아닌, 생명을 지닌 기물이었다.

손끝을 통해서 희미한 고동이 느껴졌다.

― 지켜보마. 너희 중 누가 살아남을지.

― 고작 이것인가. 나약하구나, 나약해.

― 겨우 일곱에 불과하군. 아니, 여덟인가?

순간, 어떤 형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흐릿하게 보이는 한 남자와 그의 목소리였다.

무언가를 안타까워하는 듯, 한심해하는 듯 감정의 널뛰기가 심했다.

명한이 입술을 깨물며 양피지에 더욱 집중했다.

―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 나뉜 것이 다시금 하나로 돌아왔을 때. 모든 건 완벽해질 것이다.

― 이곳은 네게 맡기겠다, 천기자.

"큭!"

몇 차례 더 지나가는 형상.

그리고 이어진 지독한 두통.

명한이 양피지에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단순한 고통이 아닌, 영혼을 찢어버리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소백, 괜찮아!?"

"응. 괜찮아. 너무 깊이 들여다봤던 것 같아."

짧게 숨을 내쉬며 통증을 추슬렀다.

워낙 오래된 양피지다 보니 남은 기운은 희미했다.

다시금 손을 대고 기운에 집중해 봐도 남은 건 희미한 잡음뿐이었다.

"그만해. 그러다가 또 다치겠어."

"이젠 더 볼 것도 없어. 마지막 남은 기운도 전부 해소된 모양이야."

"이 낡은 양피지에 뭐가 남아 있긴 했어?"

"조금은. 얼핏 들으면 그냥 헛소리에 불과하지만, 잘 생각하면 내 가정을 뒷받침하는 답일지도 몰라."

"네 가정? 무슨 소리야?"

명한이 스치듯 지나간 목소리를 되짚었다.

양피지에 남긴 혈흔의 주인이라면 저서인 황제밖에 없다.

그렇다면……

"일월교의 창시자인 천기자는 황제의 명령으로 교를 세운 것 같아. 목적은 어떤 실험. 일월교의 여덟 가문은 그걸 위한 도구였어."

"일월교의 여덟 가문이 도구라고?"

"응. 자신의 피에 대응하여 각기 다른 적응을 보여준 여덟 생존자 가문. 즉, 모든 가문에 내려오는 신기의 주박. 이 혈계주법은 황제의 피로 이어져 있어."

혈교가 황제진경을 가지고 실험을 할 때부터 세운 어떤 가정.

몇 번의 사건과 이번 잔상으로 그 가정에 확신을 심었다.

"황제는 죽지 않았어."

습작에 한 줄 설정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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