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지 못한 죄
파운의 도는 그야말로 절기였다.
도 하나를 날카롭게 벼리는 것은 평생을 무에 뜻을 둔 무인이라면 능히 도달할 수 있는 경지.
하지만 수십, 수백의 도를 무딘 것 하나 없이 벼리는 건 재능의 영역이었다.
파운의 도는 수많은 변(變)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하나에서 나와 여러 갈래로 나뉘어도 그 본질을 잃지 않았다.
모두가 도의 극치였고, 모두가 파운의 의지를 싣고 있었다.
"크―! 크아아아아!!!"
불길이 베이고 팔에 흠집이 났다.
불꽃이 갈라지고 가슴이 벌어졌다.
열기가 잘리고 몸속 깊이 도가 박혔다.
조금씩 조금씩.
파운의 도가 나형의 힘을 잘라내며 실체까지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상처가 벌어지고 뼈와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나형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발버둥 쳐라! 나약하기 짝이 없는 네놈 따위에게 어울리는 얼굴이구나!"
"크아아아아! 오지 마!! 날 괴롭히지 마!!"
파편으로 부서졌던 불꽃이 뭉쳐서 파운을 강타했다.
폭음과 함께 열기가 휘몰아쳤다.
"약하다!!"
하지만 파운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몸으로 받아냈다.
열기에 피부가 타고 머리카락이 꼬이고 있음에도 투기는 여전했다.
아니, 되레 더 강해졌다.
목숨을 도외시한 무지막지한 기세였다.
"이 신교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더냐!? 감히 너 따위가 어디서 얻었는지도 모를 힘 따위로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끄으으으!! 파운! 파운!! 너는 모른다. 너같이 재능이 넘치는 천재는 내 기분을 알지 못한다! 나같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들러리의 기분을 너는 알 수 없다!!"
나형이 자신의 혀를 깨물어 피를 태웠다.
불꽃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팍, 타오르더니 순식간에 파운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이 불꽃은 앞서 갈라지던 불꽃과는 달랐다.
지독한 집착과 원념이 실린.
굳이 말하자면 흑염(黑炎)이었다.
"크으으윽!!"
"타라! 전부 불타 버려라! 나는 네 재능을 원망한다! 하늘의 총애를 받는 네놈의 존재를 저주한다! 타버려 재가 된 후에 내 발아래에서 울부짖어라!"
"―닥쳐! 버러지 같은 놈!"
파운은 자신의 도로 어깨의 살점을 잘라버렸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하지만 그 덕에 흑염은 몸 안쪽으로 번지지 못한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네깟 놈의 저주 따위는 내게 닿지 못한다! 바라보지도 않는다! 나는 오로지 위만 바라보며 나가기도 바쁘다! 하찮은 자격지심 따위에 꼬여버린 네놈 따위는 내 길 위에 설 자격조차 없으니까!"
"파운―!!"
다시금 불과 도가 격돌했다.
생명과 영혼을 태우는 공방이었다.
나형의 지독한 원념과 집착도 대단했지만, 파운의 자아도 못지않았다.
그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나형을 벌레 취급했다.
절대 그는 자신에게 닿지 않을 거라는 높은 자신감.
상처 입고 고통을 받을지언정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야말로 도(刀).
"아―!! 아아아아!! 어째서냐!? 어째서 네놈은 그렇게 강한 거냐!!"
불꽃은 사그라지고 나형의 얼굴은 좌절로 뒤덮였다.
지독한 원념과 집착으로도 파운을 집어삼킬 수는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드는 순간, 화륜의 동력은 상실되는 것이었다.
조금씩 불꽃의 기세가 약해졌다.
"정상에 서는 자는 자신의 길을 확고하게 믿기 마련이다. 스스로를 평범하다 말하는 네놈은 결코 내가 선 곳까지 오를 수 없다."
"……"
"꺾인 건가. 흥. 초라한 최후로군."
무너진 듯 고개 숙인 나형을 보며 코웃음 쳤다.
패배자의 말로에 긴말로 조롱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도를 치켜들고 힘을 집중했다.
마지막 일격이었다.
"죽어라."
내리치는 도.
"나 혼자서는 싫다."
동시에 검붉은색으로 뒤덮이는 나형의 몸.
"피해라, 파운!!"
명한의 다급한 외침이 뒤따랐다.
#
향아의 발끝이 나뭇잎을 가볍게 두드렸다.
무게 없는 공기 방울이 튕기듯 몸이 허공으로 밀려 올라가 수 장을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열기가 아직 미치지 않은 등천루 주변의 언덕이었다.
"하아. 하아."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불을 멈추기 위해서는 안에 있는 사람만으로는 부족했다.
화마가 주인을 뒤덮기 전에 어떻게든 전해야 했다.
"……살기?"
순간, 그녀의 오감을 자극하는 기운이 거리를 격해서 날아왔다.
언덕 부근 어디선가 날린 기운이었다.
방향을 정해두지 않은 두서없는 방출이었지만, 향아는 이를 보는 것과 동시에 눈치챘다.
‘마창 어르신이야.’
은소소가 제대로 도착했다면 반드시 이곳에 올 사람이었다.
발끝에 힘을 주어 살기가 날아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마창 어르신!"
작은 턱 하나를 넘어 좌정하고 있는 육마완을 발견했다.
혼란스러운 주변과는 동떨어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네가 은소소, 그 아이가 말한 눈인가?"
"눈이요?"
"언덕. 아니, 산이라 칭해도 충분하겠군. 다가오는 불에 쏟아내기 위해 정확한 점이 필요하다. 그걸 네가 볼 수 있다고 하던데."
"아."
무엇을 말하는지는 바로 이해했다.
하지만 그걸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은소소와는 다르게 확신하지 못했다.
지금 육마완이 말한 점은 상승의 기예에서 말하는 결(缺)을 의미한다.
어떤 물질이나 생명의 기준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
단순히 작은 돌멩이나 토끼 정도라면 능히 꿰뚫어 보고 공략이 가능하겠지만, 상대는 산이었다.
향아는 자신이 없었다.
"망설임이 있다. 할 수 없다면 물러나라."
"……제가 없이 어르신 혼자서 하신다면 몇 할을 보시나요?"
"삼 할(三割)이다."
"삼 할."
실패하면 칠 할의 확률로 주인인 명한이 위험해진다.
향아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말을 이었다.
"해볼게요. 도련님이 저 안에 있는데 저 혼자서 도망칠 수는 없어요."
"넌 소백의 몸종인가?"
"네. 소백 도련님을 모시고 있는 향아라고 해요."
"특이하군. 고작 몸종이 그런 수준이라니. 네 주인이 가르친 건가?"
"네. 미천한 몸이지만 도련님의 힘이 되게 위해서 수련했어요."
"……"
육마완이 눈으로 향아를 훑었다.
내공은 특출나지 않지만, 서 있는 자세나 기세가 상당했다.
나이를 생각하면 천산의 영재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
‘천마. 네 수작이더냐.’
누군가 떠올랐지만, 이내 지웠다.
"그럼 어디 네 주인에게서 배운 재주를 보여봐라. 기회는 한 번. 실패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네, 네!"
손짓으로 거리를 확보한 뒤 창을 쥐고 섰다.
땅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기운이 솟구쳐 육마완을 휘감았다.
그의 독문심법인 ‘오행선공(五行仙功)’이었다.
땅의 기운을 받아서 순식간에 주변 공간과 동화했다.
"한 점이다. 이 산의 생명을 주관하는 점을 찾아라."
"……한 점."
향아의 눈이 반짝였다.
주변 사물을 구축하는 모든 정보가 선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작은 움직임, 흐름, 방향……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보다 작은 단위로 쪼개졌다.
주르륵.
코와 눈에서 피가 흘렀다.
세상을 작게 나눠서 본다는 건 지독한 부담이었다.
향아의 수준에서는 아직 이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 현실.
지금의 이 관조는 역량을 넘어선 시도였다.
‘할 수 있어. 도련님께서 주신 힘이야.’
하지만 믿지 않고 멈추는 건 가르침을 준 주인에 대한 배신.
향아에게 있어서는 다른 무엇보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이었다.
"……나는 도련님을 도울 거야."
점보다 더 작은 단위로 주변 정보가 흩어졌다.
거대하던 산이 먼지처럼 뿌옇게 변했다.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뻗어야 할 손도 먼지같이 위태롭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봐야 하는 건 이 먼지 사이의 틈.
수십, 수백, 수천의 먼지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약한 틈.
"큭. 큭! 아아아악!!"
순간, 향아가 비명을 토하며 주저앉았다.
눈과 코에서 흘러나온 피가 앞섬을 다 적실 만큼 대단했다.
머리 역시 깨질 것처럼 아팠다.
"봤느냐?"
"……이곳으로."
하지만 봤다.
향아는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한 줌의 기운으로 날렸다.
너울너울 흔들리는 기운은 곧 하나의 점으로 뭉쳤다.
보통이라면 알아보기 힘든 신호일 수 있지만, 이를 보는 건 마창 육마완이었다.
꾸우우욱.
창을 쥐고 대지와 하나가 된 자신의 힘을 일으켰다.
"무너져라."
산을 가로지르는 창.
인간이 자연을 무너뜨렸다.
#
판단의 근거가 된 건 묵혼공을 통한 혼의 연결.
명한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눈으로 나형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파운과의 대결에서 좌절한 그가 매우 빠르게 흑화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비유가 아닌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흑화(黑化).
말 그대로 영혼이 검게 물들었다.
콰드드득―!
파운의 도가 나형의 머리를 절반 정도 파고든 뒤 멈췄다.
경지에 이른 그의 도가 사람 몸을 자르지 못한 것이다.
"이건……?"
"피하라고!"
멈칫거리는 파운을 명한이 걷어찼다.
이내, 검붉은 불길이 서 있던 곳을 휩쓸었다.
아차 했으면 다리 정도는 내어줄 뻔했다.
"이건 또 뭐냐?"
"나형의 의지가 꺾이자 그를 움직이던 기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혈교에서 그에게 심어 둔 것이겠지."
"혈교에서?"
"내가 아는 건 이름뿐이다. 불사종법. 불사를 탐하던 어리석은 자들의 술법이지."
명한의 눈에는 검게 물든 혼의 형상이 보였다.
그 바탕에 ‘불사종법’이 있다는 것도 너무 뻔했다.
이 이질적인 기운과 형상은 이미 혈염마녀를 통해서 본 적이 있다.
‘나형의 집착과 원념이 꺾이자 불사종법이 날뛰기 시작했어.’
가장 근본적인 욕구.
생존에 대한 집착이 나형을 움직이고 있었다.
"쯧. 버러지는 끝까지 버러지답군. 죽을 때조차 자신의 모습으로 죽지 못하다니."
"신랄하네. 뭐, 네 말이 맞긴 해. 지금의 저건 더 이상 나형이라고 할 수 없어."
"그래 봐야 이물에 불과하다. 내 도로 베어버리면 그만."
파운이 손끝을 움직이자 나형의 머리에서 도가 뽑혀 나왔다.
상대가 아무리 기괴해도 그의 기세는 변함이 없었다.
"생각은 알겠지만, 여기서는 내 계획을 따라와."
"뭐?"
"향아가 개안(開眼)했다. 아마도 은소소와의 합작이겠지. 두 사람이 이렇게 움직여 준다면 이쪽도 호응하는 것이 옳다."
"……은소소의?"
"설레는 눈깔은 치우고 답이나 해."
"흥. 좋다. 이번만큼은 특별히 따라주지."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지만, 충분하다.
명한이 살짝 거리를 벌린 뒤, 흐느적거리는 나형을 봤다.
‘생존’이라는 단 하나에 초점이 맞춰진 나형은 아직 덜 여문 병아리.
깨어나서 날뛰기 전에 후딱 처리하는 편이 낫다.
‘역시 이만한 미끼가 없지.’
극천일무기를 타구봉에 담아서 그대로 날렸다.
파괴에 초점에 맞춰진 극천일무기는 불사종법과는 상극이었다.
"길을 열어라, 나형. 위치까지 이동한다."
"뭐?"
"열어."
"쯧!"
퍽 소리에 나형이 휘청거리고, 그사이에 파운이 불길을 도로 베어냈다.
탁 트인 시야 속에서 명한은 익숙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건 계획과 확신이었다.
"따라와라."
훌쩍 뛰어내리며 달리는 명한.
그 뒤를 파운이 황급히 쫓고 극천일무기를 감지한 나형이 그 뒤를 따라왔다.
땅을 뒤덮고 있던 불기도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그 방향으로 집중됐다.
정확하게 바라던 한 점을 향해서였다.
쿵――!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온 낯선 충격음.
하나의 선이 산을 가로지르고 지나갔다.
쩍, 쩍 갈라지는 바위 위로 흙더미가 덮이고 이내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삽시간에 수천, 수만 톤의 토사가 불길을 가로지르며 쏟아졌다.
제아무리 산천초목을 다 태울 기세였던 불길이어도 산 앞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토사가 쓸어간 위치에서는 한 점의 불길조차 살아남지 못했다.
"아…… 아. 아아……"
불사종법의 씨앗, 자체인 불조차 남지 않은 나형.
헐벗은 채 몸뚱어리 하나로 비적비적 무너졌다.
모든 걸 다 손에 넣고 싶어했지만, 무엇도 얻지 못한 자의 최후였다.
"비참한 말로군. 내 도를 쓸 가치도 없다."
파운은 그 초라함에 아예 도를 집어넣고 등을 돌렸다.
벨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도 책임은 져야지. 날 원망하지 마라, 나형."
그리고 마무리는 명한이 맡았다.
타구봉에 실린 극천일무기의 기운이 격렬하게 타올랐다.
― 내가 바란 건 이게 아니었는데
"알아."
영혼의 넋두리를 흘리며.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