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235)

각자도생

피부를 태울 것 같은 열기.

주변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괴인들.

폐쇄된 공간의 압박.

한 층 한 층 올라가기조차 쉽지 않았다.

"슬슬 숨이 모자라다. 먼저 움직이겠다."

"흥.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에서도 명한과 파운은 파죽지세로 움직였다.

불꽃 한 점 없는 평원에서 일점 돌파를 하는 기세였다.

뒤를 따라오기 버거운 향아나 은소소와는 움직임부터 달랐다.

"허억. 허억. 저 두 분은 왜 이렇게 빠르죠?"

"경지가 높아서지. 화기를 안으로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호흡하고 있어."

"으아. 부러운 능력이네요."

"부럽다는 말로 끝날 능력은 아니지만…… 소백!"

살짝 넋두리 비슷하게.

은소소가 말을 늘이려는 찰나.

그녀의 눈에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주변이 새빨간 홍염으로 뒤덮여 있음에도 눈에 확 들어오는 빛이었다.

"나형이다!"

"나형!"

명한과 파운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등천루의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 측.

빛을 향해 쏟아지는 양 갈래의 유성이 되어 순식간에 충돌했다.

콰콰콰쾅.

그리고 이어지는 굉음.

"소소, 아가씨!"

"위로 올라간다."

계단과 층을 유지하던 기둥이 통째로 날아갔다.

파편이 우박처럼 내리고 천장이 날아가서 하늘이 시야에 잡혔다.

은소소는 곧바로 벽을 발판삼아 위로 몸을 날렸다.

폐로 신선한 공기가 스며들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비켜라, 소백! 이놈은 내 먹이다!"

"진정해, 멍청아. 화륜이 폭주했다면 너 혼자서는 버겁다."

거대한 불덩이를 중심에 둔 명한과 파운이었다.

몸을 강기로 두른 채 불덩이를 연신 후려쳤다.

그때마다 불꽃이 튀어 사방으로 비처럼 떨어졌다.

앞선 파괴로 잠시 물러났던 불꽃이 힘을 받아서 다시금 기세를 올렸다.

"지독하네. 저런 꼴로 살아있는 건가."

"화기가 저분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불이 살아있는 이상 생명은 무한에 가까워요."

"그럼 어떻게 하든 불부터 꺼야 한다는 건가."

은소소는 그나마 멀쩡한 난간에 올라가 주변을 훑었다.

등천루 주변은 이미 새빨간 불꽃으로 뒤덮여 있는 터라 단순히 물 조금 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 불꽃은 점차 그 세력을 넓혀갔다.

이미 주변 누각들도 화염에 휩싸인 지 오래.

이대로 두면 신교 전역이 화마에 뒤덮일 지경이었다.

"향아. 이 불꽃의 방향을 읽을 수 있겠어?"

"방향이요?"

"이 불은 나형을 중심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거잖아. 그렇다면 그 의지에 따라서 방향성을 가지고 있을 거야. 네 눈으로 그 방향을 읽어 줘."

"아. 잠시만요!"

향아의 눈이 반짝이며 나형의 힘을 읽었다.

뒤엉킨 실타래와 같은 흐름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이것마저 꿰뚫었다.

"저쪽. 저쪽으로 향하고 있어요."

불이 향하는 방향을 읽었다.

"신궁(神宮) 방향인가. 천마를 원하기라도 하는 거냐?"

"저 방향으로 움직이면 피해가 너무 커요. 신교의 절반은 타버리고 말 거에요."

"그 전에 어떻게든 막아야지."

문제는 방법.

단순히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 정도의 화마를 제압하려면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늘이 돕는다면 비.

아니라면……

"천산."

은소소가 불의 방향과 겹치는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신교의 부지는 천산의 중턱을 깎아서 만든, 일종의 협곡.

부지 곳곳에 천산의 단면이 자연 그대로 남아 있다.

불길이 향하는 신궁 방면에는 연무장 우측면을 빙 두르고 있는 큰 언덕이 있다.

불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의 규모였다.

"향아, 마창 어르신의 기운. 기억하지?"

"네.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위로 던지면 주변에서 그분의 기운을 찾아."

답도 들을 여유도 주지 않고 은소소가 향아를 냅다 허공으로 던졌다.

불로 가려져 있던 시야가 탁 트이며 등천루 주변이 훤히 드러났다.

불길을 잡기 위해 동원된 신교의 무사들과 이를 지휘하는 대장급들.

그리고 그 너머에 서 있는 마창 육마완이었다.

"찾았어요! 서북 방면 30장 거리에요!"

"소백, 우리는 불길을 잡으러 간다!"

이번에도 답은 듣지 않고 움직였다.

허공으로 몸을 날려 자유낙하 하는 향아와 허공에서 접촉.

서로의 발을 맞댄 채 기운을 충돌시켜서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등천루를 덮고 있는 불꽃을 뛰어넘는 거리였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두 사람은 각자 등천루 반대편에 착지했다.

"뭐, 뭐야!? 하늘에서 누가 떨어진다!"

"조심해! 피해!"

은소소가 떨어진 곳은 한창 불길을 잡고 있는 무력대의 한복판.

다급함에 허둥대는 이들의 어깨를 밟으며 그대로 앞으로 달렸다.

밟힌 충격에 한 놈씩 그대로 고꾸라졌지만, 은소소는 멈추지 않았다.

"누구냐!? 누군데 우리를 습격하는 것이냐!?"

"막아! 기습이다!"

당연하게도 기습을 당한 무력대는 반격의 태세를 취했다.

주변은 홍염에 상황은 난잡하여 정체를 파악할 틈도 없었다.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은소소를 공격했다.

"으악! 가, 강하다!"

"조심해! 고수다!"

"대장을 불러와!"

하지만 일반 무력대가 은소소를 당할 수는 없다.

순식간에 무력대를 관통해서 마창이 있는 곳 근처까지 당도했다.

"멈춰라―!"

그런 그녀 앞으로 쏟아지는 엄청난 숫자의 검기.

하나하나가 치명적이고 수준 높은 기예를 담고 있었다.

은소소 수준에서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그런 공격이었다.

‘멈추면 늦는다.’

판단은 순간이었고, 실행은 동시였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뽑힌 검이 혼원일기를 두르고 주변 검기를 통째로 잘라냈다.

급하게 끌어올린 내공에 내식이 불완전해졌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격 삼격으로 검기를 완전히 끊어내고 그대로 돌파했다.

"막아라!! 어르신께 접근하지 못하게 해!"

"살계를 열어라!"

아직 남은 검수의 검이 족쇄처럼 달라붙었다.

달려드는 은소소와 붙잡으려는 무인들의 한 끗 차이의 승부였다.

"마창―!!!"

그 찰나의 순간에 은소소는 마창, 육마완을 눈으로 확인.

내공을 담아서 그를 불렀다.

"멈춰라!"

막 검기가 은소소에게 닿으려는 순간.

육마완이 이 목소리에 반응하여 사자후를 터뜨렸다.

은소소로 향하던 모든 검기가 일순간에 깨어지며 주변 고수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상식을 초월한 위력.

내상에 비틀거리는 은소소로 한달음에 달려가 부축했다.

"은소소."

"후우. 불길의 방향은 신궁. 중간 언덕을 터뜨려서 화기를 제압해야 한다."

"……언덕을?"

"가능한 건 당장 그쪽밖에 없어, 마창."

설명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육마완에게도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 역시 밖에서 불길을 잡으며 이 화마의 방향과 제압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은소소가 방향과 방법을 알려주는 순간, 이미 상황은 정립되었다.

"정확하게 방향과 시기를 읽어야 한다."

"그걸 알려줄 아이가 그쪽으로 가고 있어."

"……흠. 알았다. 이건 내가 맡을 테니, 넌 이곳에서 쉬고 있어라."

향아의 경공술이면 이미 등천루를 돌아서 언덕에 당도했을 터.

설명이 없어도 다음 행동을 파악했을 거라는 믿음이 은소소에게는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젠장."

남은 건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

나형은 불 그 자체였다.

화기가 몸을 집어삼키며 살과 뼈를 태우고 있음에도 그의 힘은 줄지 않았다.

아니, 되레 조금씩 더 강해지며 격렬하게 타올랐다.

모든 걸 불태우고 산화하기라도 하려는 듯.

"젠장! 저 열기 때문에 공격이 제대로 닿지 않아!"

파운이 역정을 냈다.

아무리 도를 날려도 나형의 불이 전부 집어삼켰다.

뜨거운 열기는 그 자체로 나형의 내공.

그 어떤 기공으로도 이걸 찍어누르는 건 어려웠다.

"네 신기를 꺼내는 건 어떠냐?"

"……내 신기는 완벽하지 않아. 그날 저놈을 제압하기 위해서 사용한 이상 당분간은 꺼낼 수 없다."

"제약도 많은 힘이군."

"흥. 어차피 그런 신외지물 따위에 기대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강하다. 저 빌어먹을 놈의 열기만 어떻게 제어하면 내 도로 도륙할 수 있어."

그게 쉬웠다면 명한과 파운 정도의 고수가 지지부진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다.

나형의 열기는 일종의 공방일체의 요격 시스템이었다.

공격으로 들어가면 열이 겹겹이 쌓여서 모든 기의 흐름과 파괴력을 상쇄.

반대로 방어에 돌입하면 열이 기를 갉아먹어서 조금씩 힘을 앗아갔다.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힘들고 반대로 장기전은 체력을 뺏기는 지독한 상대였다.

"너. 뭔가 숨겨둔 수라도 없는 거냐?"

"갑자기 의지하는 건가?"

"시끄러워. 저놈을 여기에 잡아두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서 날뛸 거다. 주력이 오기 전까지는 여기에 잡아둬야 해."

"의외로 다정한 말도 하는군."

"닥쳐. 신교는 내가 지배할 땅이다. 혈교 따위에 휘둘리는 머저리에게 파괴되게 둘 수는 없어."

거칠고 오만하지만, 정직하다.

파운이라는 인간의 본모습이었다.

"후…… 좋아. 어찌 됐든 신교가 결딴나길 바라지 않는 건 너나 나나 같은 거니까. 이번만큼은 힘을 합치자고."

"합치는 게 아니라, 네가 날 보조하는 거다."

"꼭 말을 덧붙여서 사람 열받게 하네."

명한이 툴툴거리며 힘을 풀었다.

막이 풀리자 주변 열기가 집중적으로 그에게 쏟아졌다.

당장이라도 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열기였다.

"뭐 하는 거야!?"

"집중해라. 일격에 죽이지는 못해도 무력화는 할 수 있어."

이미 혈염마녀를 통해서 상대해 본 경험이 있다.

명한은 쏟아지는 열기 속에서 나형으로 이어지는 힘의 흐름을 잡았다.

‘미친. 이게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힘인가?’

그 힘은 마치 태양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뜨거움.

형체를 모두 잃고 타오르는 나형의 영혼도 보였다.

"네 선택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른다, 나형."

열기를 가이신공으로 쌓아서 묵혼공으로 잡았다.

힘의 나선이 몸을 칭칭 동여매 연결되는 것이 느껴졌다.

열화지옥 속에 빠진 두 사람.

― 나는 형이 될 수 없어!!

―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해!

― 모조리 타버려! 다 없어지면 나도 발버둥 칠 필요가 없어!!

― 살려줘. 죽기 싫어.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야.

그 비명도 모조리 전해졌다.

분노, 고통, 좌절, 두려움, 슬픔.

극단으로 뻗은 감정이 화기에 집어삼켜져 타오르고 있었다.

화륜을 태우는 건 다름 아닌, 나형이라는 인간의 영혼 그 자체였다.

‘업화(業火). 이게 화륜의 본질인가.’

신기의 본질이 어느 정도 이해됐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불장난은 어릴 때로 족했어야지."

순간적으로 극천일무기를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파괴의 순간에서 발생하는 찰나를 먹고 사는 괴물.

거대하게 부풀어 버린 나형의 감정과 생명은 먹음직스러운 먹이였다.

시커먼 기운이 몸을 다 뒤엎고 주변 화마를 집어삼켰다.

"오지…… 마! 내게 다가오지 마!!"

불꽃이 벗겨진 나형이 발버둥 쳤다.

화륜이 다시 타오르기 전,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파운!"

"알아!"

그리고 그 정도면 파운에게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수십, 수백의 도가 찰나를 쪼개며 나형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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