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235)

불장난

명한과 강유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침착함이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힘을 풀며 서로를 바라봤다.

"결판은 상황이 끝나고 난 뒤로 하자."

"동감이다. 이건 단순한 불이 아니야."

"나는 등천루 주변으로 불이 번지지 않도록 조치하지. 넌 불의 원인을 파악해라."

"……뭐, 그편이 낫겠지."

원인이 무엇인지는 두 사람 모두 예상하고 있다.

강유는 이를 직접 대면하지 않으려 했고, 명한은 반대를 원했다.

어찌 됐든 상호 간에 협의는 이루어진 셈.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소백! 이쪽이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연무장 아래에는 이미 은소소와 향아가 대기하고 있었다.

두 모두 불길 너머의 흉험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저 불은 뭐고?"

"가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나형이 아닐까 싶다. 파운과 싸울 때 쓰던 화륜이라는 신기. 그 힘이 폭발한 것 같아."

"화륜? 갑자기 그게 왜?"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야."

대화를 주고받으며 명한은 불길이 치솟고 있는 등천루에 도착했다.

이미 주변은 아비규환이었다.

불길을 피해서 뛰어나온 사람, 부서지는 전각, 메케하게 퍼지는 연기까지.

시야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터라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젠장! 천마대전 기간에 불이라니! 내각은 뭘 하는 거냐!?"

"고작 이따위 화재에 허둥지둥이라니! 그러고도 네놈들이 신교의 무인인가!?"

"비켜라! 불길은 내가 잡아주마!"

그사이, 등천루에 머물던 고수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력한 내공을 바탕으로 바람을 밀어내, 불길을 잡으려 했다.

웅혼한 기운의 움직임과 함께 불길에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얼핏 성공한 듯 보이기도 했다.

"크, 크아아악!! 뭐야!? 불이…… 불이 넘친다!"

"젠장, 이게 대체 뭐야!? 이 불은 정상이 아니야!"

"도망쳐! 닿지 않게 물러나라! 보통 불이 아니다!"

하지만 꺼진 불은 순식간에 몇 배로 불어나 고수를 집어삼켰다.

피부가 녹고 뼈가 삽시간에 재로 변했다.

일반적인 열기로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삼매진화(三昧眞火). 저 불은 모두 삼매의 경지에 닿은 불이다."

"……등천루 전부를 덮은 저 불이? 그게 가능해?"

"화륜의 힘을 최대로 뽑아낸다면."

극한의 화기가 경지에 이르렀을 때 발휘하는 힘.

그것이 바로 삼매진화다.

순수한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정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수의 손과 그 기운이 미치는 범위 안.

이렇게 넓은 곳을 삼매진화로 태우는 건 그 어떤 극양고수라도 불가능하다.

"어떻게 할 거야, 소백? 삼매진화라면 너라도 위험해. 차라리 불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물러나 있자. 굳이 우리가 이 불과 씨름할 이유는 없어."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명한이 일렁이는 불길 너머를 눈으로 훑었다.

단순하게 화륜의 주인인 나형이 폭주했다, 라는 사실 하나로 국한된 사건 같지 않았다.

습작에 없던 일이 벌어질 때면 언제나 원인과 결과가 존재했다.

‘나형의 폭주가 혈교의 수작이라면 노림수가 있을 거야.’

폭주로 신교에 타격을 주고자 하는 거라면 아무래도 얄팍하다.

신교에는 다른 모든 걸 제치더라도 그 사람이 존재하니까.

"천마는 안 올 거다."

"……파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누각 사이를 밟으며 파운이 명한 앞으로 내려섰다.

그는 지나가는 눈길로 은소소를 한 번 보고는 말을 이었다.

"내각 총단부터 장서각까지를 잇는 유리결계가 만들어졌다."

"유리결계? 파금탑탑의 그 진법 말인가?"

"그래. 서역 제일의 진법사였던 파금탑탑이 만든 진법. 다른 모든 효용을 제거하고 단절 하나에만 집중한 진법이다. 안쪽에서는 당분간 사람이 나올 수 없어."

"……나오고자 한다면 나올 텐데?"

"뭐, 그 사람 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유리결계가 대단해도 가둔 사람이 천마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어떻게든 힘을 쓰면 나올 수 있는 것이 사실.

하지만 파운의 말대로 천마의 생각은 이해하기 어렵다.

등천루와 누각이 전부 타버려도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신기자는 이 상황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지?"

"성동격서."

"역시 혈교인가."

"흥. 네놈도 점술을 공부하는 거냐?"

"그냥 단순한 추론일 뿐이다. 직접 상대한 본 너라면 더 잘 알겠지. 나형은 애초에 신기의 주인이 아니야. 힘을 뽑아 쓴다면 오래지 않아 말라 죽겠지."

"그러니 나형은 그저 쓰고 버리는 패라 이거로군. 쯧."

파운이 혀를 찼다.

"이제 와서 형제애라도 생긴 거냐?"

"시끄러워, 소백. 배신을 하건 뼈를 갈고 살을 찢든 그건 신교 내부에서 진행될 일이다. 상잔을 해도 형제간에 해야 해. 하찮은 혈교 따위가 우리를 손 위에 놓고 장난질하는 건 심히 불쾌한 일이다."

"삐뚤어진 새끼. 하지만 네 말에는 일정 부분 찬성한다. 혈교는 아니지."

"흥."

파운은 도를 꺼내 불길을 향해서 휘둘렀다.

삼매진화가 반으로 쩍 갈라져서 안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다.

"따라올 용기가 있다면 따라와라."

"너야말로 불이 뜨겁다고 징징거리지 마."

"시건방진 새끼."

그 안으로 동시에 뛰어드는 파운과 명한.

마치 이조차도 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은소소와 향아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두 사람만 따로 보내는 건……

"나형은 내가 맡는다. 넌 물러나 있어."

"시끄러워, 소백."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았다.

걸음을 서둘렀다.

#

어마어마한 열기였다.

밖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안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피부가 익고 털이 타들어 갔다.

불길에 조금만 가까이 가도 물집이 잡힐 정도였다.

"무지막지하군. 열기가 기막을 갉아먹고 있어."

"흥. 겁이라도 먹은 건가?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쳐도 좋아."

"헛소리는 그 정도만 해 둬라. 네놈이 죽어 나자빠지면 천마대전이 맥빠질까 봐 챙겨주고 있는 거니까."

"뭐?"

"둘 다 그만. 티격태격할 때야?"

자존심 세우는 두 사람은 은소소가 중재했다.

파운도 그럭저럭 그녀 말은 따르는 편이었다.

"도련님, 누군가 접근하고 있어요."

"나형인가?"

"아니. 여럿이다."

명한의 말을 파운이 정정했다.

불길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기척은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생존자인가? 일단은 우리가 보호를……"

"숙여!"

정상적인 반응은 은소소의 것.

하지만 그 정상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깨졌다.

파운이 은소소의 어깨를 잡아채며 도를 비스듬히 휘둘렀다.

검붉은 금속 파편이 도면에 미끄러지며 벽에 박혔다.

"누구냐!? 감히 어떤 놈이 이 몸의 씨를 밸 계집에게 기습을 하는 거냐!?"

"……고마움이 싹 사라지네."

싸늘해지는 은소소의 시선 끝에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길에 짓무른 피부와 전부 타버린 털.

간신히 인간의 형태를 유지한 채 비적비적 걸어왔다.

생존자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저건 대체 뭐야?"

"쯧. 불쾌한 장난인가?"

낮게 혀를 차며 파운이 도를 휘둘렀다.

상대가 누구고 무슨 사연인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막아서면 베는 것이 그의 지론.

도기가 불꽃을 베고 무리를 관통했다.

다섯 중 넷이 토막 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안 죽어?"

하지만 허리가 잘린 상황에서도 괴인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자신의 허리춤을 타고 올라가 절단면을 맞췄다.

조각난 파편이 맞아 들어가듯, 몸이 다시 본래의 것으로 회복되었다.

"불사종법."

"이게 뭔지 아는 거냐?"

"혈교의 술법 중 하나다. 몇 번 부딪쳐 봤지. 어떨 때는 식물로 또 어떨 때는 벌레로. 지금은…… 화기(火氣)인가?"

"화기로 술법을 유지한다고?"

"배경에 혈교가 있다면 아마도. 나형에게 화륜을 준 것도 아마 같은 이유에서였을 거다. 이 화기가 그들의 술법에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주는지 알고 싶었던 거겠지."

삼매의 불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혈염마녀에게 무한에 가까운 생명력을 주던 홍련과 근본적으로 같다.

즉, 주변의 불꽃이 저들을 살게 하는 것이다.

"흥! 하찮은 술법 따위로 신교를 어지럽히다니. 전부 토막토막 잘라서 개 먹이로 주마."

파운이 화를 내며 도를 휘둘렀다.

도기가 공간을 뒤덮고 궤적에 걸리는 모든 것을 잘라냈다.

공간을 잠식하던 열기마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괴인들은 수십, 수백 조각으로 잘려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절대로 살아날 수 없는 정도의 도륙이었다.

"하! 이렇게 토막 치면 부활이 안 되는가 보군!"

"……그렇게 속단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절단된 육편이 불꽃에 휩싸이더니 뒤엉키기 시작했다.

불씨가 불꽃이 되고 불꽃이 화마로 번졌다.

그리고 이 화마 속에서 토막 난 사체들이 하나로 뭉쳐서 몸을 일으켰다.

열기를 견디지 못해 모든 피부가 다 녹았음에도 어떻게든 생명은 이어갔다.

‘이건 지나치게 강제적이야. 육체는 열기를 견디지 못하는데 생명력만 붙들고 있어.’

비틀비틀 흔들리는 괴인들의 눈 속에서 고통이 엿보였다.

말은 하지 못하고 표현할 수단조차 잃었음에도 그 영혼은 불에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걸 이렇게 두는 것도 못 할 짓이군."

명한이 타구봉을 뽑아서 극천일무기를 담았다.

파괴의 단말을 빨아먹는 극천일무기라면 아무리 집요한 생명력이라도 부술 수 있다.

이미 몇 번이나 체험하기도 했고.

퍼엉―!!

일격에 괴인의 육체가 터졌다.

영혼이 지독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붙잡고 있던 어떤 결박을 강제로 뜯어낸 결과였다.

"뭐냐? 왜 네 일격에는 저놈들이 되살아나지 않지?"

"내가 좀 더 강해서 그런 거 아닐까?"

"……죽고 싶은 거냐?"

"둘 다 적당히 하시지!"

다시 불붙는 두 사람을 은소소가 중재했다.

눈앞의 괴인 몇을 처리했다고 끝난 건 아니었다.

타오르는 불꽃 너머로 수십의 그림자가 스물스물 접근하고 있었다.

"나서지 마라, 소백. 이번에는 내가 죽여보지."

"할 수 있다면."

파운과 명한이 동시에 움직였다.

#

"후후후. 예상보다 훨씬 효과가 좋지 않은가."

불타는 누각의 상층부 어딘가.

검은 장포 차림의 한 남자가 웃음을 흘리고 있다.

암중모략으로 나형을 움직인 혈교의 교주였다.

"꽤 즐거워 보이십니다."

"음? 아아, 그대인가."

그런 그의 옆으로 백색 가면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열기가 주변을 잠식하고 있음에도 한 점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악불군만큼은 아니겠지만, 괜찮은 결과를 얻었네. 화륜을 사용해서 불사종법의 맥을 자극하라는 조언. 매우 훌륭했네."

"후후. 교주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뭐,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 아닌가. 원하는 건 얻었나?"

"유리결계 덕분에 손쉽게 챙길 수 있었습니다."

가면의 남자가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잘됐군. 일전의 실패로 그를 제거하지 못해서 꽤 난감했었는데, 운이 좋았어."

"천하의 강유라 해도 손이 여럿은 아니니까요. 대전에 맞춰 화륜이 폭주하고 지원은 유리결계로 막는다. 천기자가 살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교주의 혜안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하. 과찬이네."

서로가 얻을 것은 얻은 사이.

관계의 모호함은 대화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남은 건 저 불씨로 귀찮은 쥐새끼들을 처리하는 일인가."

"파운과 소백 말입니까?"

"저 둘은 너무 성가셔. 나형이나 종리운처럼 이용할까도 싶었지만, 이대로 두면 계속해서 대업에 방해가 될 뿐이네. 이 즈음해서 잘라내는 편이 낫겠지."

"흐음. 교주님 생각이 그러시다면 저도 한 손 거드는 것이 낫겠군요."

"오. 자네가 힘을 보태주는 건가?"

"저도 만마당주 건으로 받을 빚이 있었거든요."

"하하, 잘됐군. 그럼 뒤는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겠네."

교주는 웃음을 남기며 사라졌다.

더 이상은 이곳에 볼일이 없었다.

"어디 그럼…… 이 불장난의 끝을 지켜보도록 할까."

남은 건 가면의 남자.

붉게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딘가 서늘한, 그런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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