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235)

화륜

승부를 낸다.

여기서 ‘낸다’의 의미는 당연하게도 승리를 뜻한다.

하지만 명한에게는 승리에 대한 뚜렷한 확신이 없었다.

설정상 이 대전에서 우승하는 건 강유.

심지어 그 파운마저도 꺾고 천마신교의 정식 후계자에 등극한다.

당시 그의 실력은 최소 현경.

적어도 명한과 동급이었다.

"안 오는 건가? 연장자로서 선공을 양보하고 싶은데."

강유는 한 손을 뒷짐 진 채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만방자한 성정 때문이 아닌, 가진 바 실력에 대한 자신감.

태생부터 성장까지 모든 것이 승리로 점철된 인간의 모습이었다.

‘후에 막군천을 만나기 전까지…… 소백의 최대 적수.’

시기를 앞당긴 만큼 쉽진 않았다.

"……후. 사양은 안 하지."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다.

대전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계획을 짰고, 그것을 위해 차근차근 움직였다.

난관이 있다고 주춤거리면 소백에게 미안할 뿐이다.

‘후―’ 짧은 숨을 뱉으며 발을 뗐다.

묵직한 압력과 함께 좌우로 갈라지는 바람의 벽.

"호오."

살짝 놀란 듯 뜨인 강유의 눈을 정면에서 보며……

그대로 타구봉으로 점과 점을 잇는 절(絶)의 기예를 사용했다.

바람의 흐름이 끊어지며 나선 형태로 모여들었다.

그림의 가운데를 송곳으로 뚫는 것 같은 일격이었다.

"이렇게인가?"

"……!"

강유는 일격에 맞서 물러나거나 자신의 절기를 뽐내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 하나로 절(絶)의 점을 찔렀을 뿐이다.

점에 모여든 기운은 같은 나선의 형태로 바람을 몰아왔고, 바람과 바람은 서로를 상쇄하며 흩어졌다.

점을 중심으로 둔 완벽한 거울상.

"괜찮은 수야. 할아버님의 극천일무기인가?"

"알고 있었던 건가?"

"밖을 관찰하는 건 군주의 덕목이지. 소림사의 사건에 대해서라면 다 각도로 조사를 했거든. 설마하니 삼신승이 지키고 있는 감옥에서 할아버님을 탈출시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 굉장히 과감한 수야."

"짜증 나는 말투네."

"사람들은 하늘을 보고 그렇게 말하곤 하지."

"쯧."

명한이 혀를 차며 타구봉을 비틀었다.

힘의 축이 아래로 무너지며 주변 기운이 같이 따라왔다.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두 사람의 주변 대지가 반 치 가깝게 주저앉았다.

"훌륭한 내공."

"언제까지 여유 부릴 수 있는지 보자고."

묵직하게 누른 기운을 기대로 강유에게 쏟아부었다.

중력에 이끌려 떨어지는 폭포처럼 기운이 한없이 그를 짓눌렀다.

밖의 기운을 당겨와서 상대를 압살하는 방식이었다.

대응이라면 자리를 벗어나거나, 같은 방식으로 기운에 맞서는 것.

하지만 강유는 다르게 반응했다.

"이걸로 충분한가?"

"……대체 내공이 얼마인 거냐?"

"군주로 태어난 자의 축복이지."

쏟아지는 기운의 폭포를 그냥 몸으로 받았다.

가진바 내공이 너무나 강해서 폭포로 흔들 수 없는 형세였다.

명한을 일(一)이라 한다면 그는 못해도 오나 육.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내공을 초월하고 있었다.

‘역시 천무지체(天武之體)인가.’

하늘이 무를 위해서 내린 신체.

선택받았다는 강유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아우님 재주가 이것뿐이라면 조금 실망이로군."

"뭐, 단순 힘겨루기로 너를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렇게 경지를 끌어올렸음에도 아직 격차는 있다.

하지만 수가 없다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꾸역꾸역 기연을 찾아 집어먹으며 명한이 세운 대책.

그건 바로 독(毒)이었다.

"……음?"

칠채향을 통해서 바닥으로 독을 뿌렸다.

설정상 현재의 강유는 파운이나 적운에 비해서도 독에 대한 저항이 약하다.

실제로 이에 휘둘리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기에 무위에서 부족한 명한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은 독.

"얄팍한 수단을 쓰는군. 이런 독 따위는 내게 통하지 않는다."

"평범한 독이라면 그렇겠지."

독이 강유의 주변에서 빠르게 타들어 갔다.

막대한 내공이 독 자체를 원천에서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명한의 독은 평범한 종류가 아니다.

칠채향은 재료만 충분하면 모든 대상에 반응하여 약점을 파고들 수 있는 완벽한 독이다.

순식간에 강유의 내공 성질을 분석하고 독을 배합했다.

화악―!

보라색으로 짙어지는 운무.

성벽처럼 단단하게 강유를 지탱하던 기막이 부식되기 시작했다.

단순 약재의 배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내공을 사용한 독이었다.

처음으로 강유의 표정이 변했다.

"묘한 재주를 들고 왔군."

"군주라 칭하는 인간을 잡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흥. 우습군."

이에 강유는 내공을 더욱 끌어 올렸다.

벽이 벽을 쌓고, 그 벽이 다시 벽을 구축했다.

부식보다 내공의 벽이 쌓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터무니없는 내공.

‘독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군.’

소모전에서 질 리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둘 것 같나?"

그렇다면 가볍게 어울려 주는 것이 낫다.

명한이 타구봉으로 강유의 벽을 두드렸다.

부식되는 공간을 봉이 파고들어 그 안으로 충격을 전달했다.

"추한 발악이다. 부족한 이들의 반응은 언제나 이런 식이지. 네게 실망했다, 소백."

"끝까지 여유네?"

"하늘에게 선택받은 자에게 한계란 없다. 형님 된 도리로서 네 모든 것을 받아주고 있을 뿐이다."

"그럼 어디 끝까지 해 봐."

명한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마치 힘이 떨어지기 전에 모든 걸 쏟아내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였다.

끝없이 수복되는 강유의 기막과 그 위에 덧없이 독을 붓는 명한의 싸움.

"……"

하지만 그 싸움이 묘할 정도로 길어지자 강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시간을 이미 훨씬 지났기 때문.

독의 기세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되레 내공이 슬슬 떨어지는 기미가 보였다.

"무슨 수를 쓴 거지?"

"슬슬 감이 오나? 네가 무한에 가까운 내공으로 견디는 것처럼, 나 역시 무한에 가깝게 독을 쓸 수 있어. 내 독은 나 자신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거든."

"……백약문에서 뭔가를 얻었군."

"눈과 귀를 심었어도 핵심은 놓쳤나 보네."

"그래서 장기전을 유도했군. 내가 계속 버티기를 원하면서."

"네 오만함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일 거로 생각했으니까."

"내 판단을 정정하지. 확실히 네 행보는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적운도 파운도 하지 못한 것을 너는 해냈어. 하지만."

우드득.

강유가 양손을 들어서 허공을 움켜쥐었다.

공간의 일그러짐이 두 눈으로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잔재주로는 이길 수 없는 격차가 세상에는 있다."

콰드드득―!

그리고는 공간에 집약된 기운을 통째로 뜯어냈다.

기막 안쪽에서 시작된 폭발이 순식간에 주변을 휩쓸고 명한마저 밀어냈다.

칠채향의 기운마저 기운 자체를 뜯어버리는 힘에는 속절없이 흩어졌을 뿐이다.

‘무식한 수. 하지만 독은 다시 모으면 된다.’

명한은 황급히 자세를 수습했다.

"이젠 그렇게 두지 않는다."

"―!"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있는 강유.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리는가 싶더니 빛살처럼 뽑았다.

극의에 이른 발검이었다.

명한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검의 궤적에서는 벗어났지만, 독을 수습할 기회는 잃었다.

그리고 이것이 강유의 선택이었다.

쉬익! 쉭!

쉼 없이 연격이 쏟아졌다.

아예 독을 쓸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속셈.

"연장자의 여유는 어디에 팔아먹었지!?"

"이 강유에게 인정받은 거다, 소백."

펑. 펑. 펑.

연격이 타구봉에 충돌하며 끊임없이 터졌다.

일격일격이 무겁고 빛처럼 빨라서 다른 걸 할 여유가 없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목이 날아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공방이었다.

그나마 강유가 칠채향을 염두에 둬서 힘을 분배하고 있는 것이 다행.

전력으로 공방이 이어진 거였으면 이미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잘려나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질질 끌릴 수는 없어.’

소모값을 생각해도 내공은 강유 쪽이 압도적인 우위.

이대로 공방만 이어가도 먼저 지치는 건 명한이었다.

츠츠츠츠……

칠채향을 강유가 아닌 바닥으로 돌렸다.

돌바닥을 부수는 것에 큰 해석이나 노력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부식독이 돌을 녹이며 유독한 연기를 뿜어냈다.

주변을 가득 채울 만큼의 양.

"우습군. 이 내게 시야의 제한이 있을 것 같은가?"

강유는 코웃음 치며 검기로 공간을 도륙했다.

연기가 뒤덮인 공간이 명한과 통째로 잘려나갔다.

"……!"

하지만 그건 명한이 원하던 수.

연기가 타구봉 주변에서 점멸하더니 일순간에 폭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폭발은 연기를 타고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주변 공간 전체가 화염으로 뒤덮였다.

"후우―"

벌어준 것은 시간.

명한이 허공섭물로 타구봉을 당겨오며 기식을 정비했다.

이런 폭발 따위로 강유가 상처 입을 가능성은 전무.

기회가 있을 때 추가타를 강하게 넣어야 했다.

스스슥.

전신의 내공이 한 점으로 응집하며 극천일무기의 형태를 취했다.

심과 기와 체가 모두 하나가 되어 순수한 하나의 의식으로 집중하는 과정.

적과 나를 가리지 않는 ‘파괴’에 대한 집중이었다.

"소백. 이런 잔재주로 시간만 끌 셈인가?"

"아니. 이번에는 좀 크게 놀아보자고."

"흥. 그래 봐야 네……"

"……!?"

그리고 그 집중이 강유의 힘과 충돌하려는 순간.

두 사람의 의식이 동시에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종류였다.

"어째서냐."

"왜 지금?"

다른 단어로 품는 같은 질문.

연무장 바깥, 하늘에 닿을 듯 뻗은 첨탑에서 새빨간 불길이 치솟았다.

일반 무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고위급의 처소였다.

게다가 이 불은 단순한 화재가 아니었다.

"화륜이라니."

"화륜."

나형이 품었던 힘, 화륜의 현현이었다.

#

"크…… 하하하하! 힘이 넘친다!! 힘이 넘치고 있다!!"

붉게 타오르는 홍염의 한복판.

광기에 잠식당한 한 남자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전신은 금속과 식물이 뒤섞인 듯한 기묘한 것으로 도배된 지 오래.

불꽃을 닮은 듯한 눈동자로 발아래를 바라보고 웃었다.

"나형! 지금 무슨 짓이더냐!?"

그의 이름은 나형.

천마의 혈통이자, 적운에게 패해서 대전의 패배자가 된 인물이다.

극심한 부상에 요양을 하고 있어야 할 그가 지금 이곳에, 그것도 기묘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하하하! 아버님, 보십시오! 이게 바로 힘입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힘입니다!!"

"나형! 멈춰라! 화륜은 네가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니야!"

"또 나를 막아설 셈입니까, 아버님!?"

"나형!"

"언제나 그런 식이지요! 죽고 없는 형을 대신해서 저를 소궁에 넣을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결국, 당신께서 바라는 건 형의 그림자였다는 걸!!"

고성과 함께 불이 더욱 거칠게 타올랐다.

맞은편에 선 한 남자가 이를 헤집고 들어가려 노력했지만, 화륜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북해빙궁의 천년빙까지 빌려서 삭히려 했던 것인데…… 결과는 이랬다.

"혈교의 버러지들이 네 녀석에서 사특한 소리를 했구나!"

"그만!! 그만!! 더 이상 얘기하지 마세요, 아버님.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들이 절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 왜 네가 감당도 못 할 힘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악불군을 이용하려는 계획도 실패하고 되레 당하기만 했습니다. 대전에서 승자가 되지 못하면 제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안 그런가요? 아버님이 원하는 건 형님의 뒤를 이를 최고의 아들인데! 난 그렇지 못하니까!"

불꽃이 더욱 거칠어졌다.

기둥을 태우고 흙과 돌을 녹였다.

응왕, 종리운조차 쉽사리 다가설 수 없는 열기였다.

"하하하하. 지켜보십시오. 이 아들이 어떻게 하는지. 이 빌어먹을 신교에서 어떤 발자취를 남기는지. 그곳에서 똑똑히 지켜보십시오."

"나형! 나형!!! 아들아!"

뒤늦게 아들이라 소리쳤지만, 이미 나형은 불꽃과 함께 자취를 감춘 후였다.

곧이어 비명과 괴성.

파괴의 울림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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