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수
파운 다음 순서는 은소소였다.
상대는 상위 서열, 나름 이름 날린 무인이었다.
"……내가 졌다."
하지만 은소소의 상대는 아니었다.
검이 부러져 연무장에 박힘과 동시에 승부는 끝났다.
전보다 예리하고 정돈된 그녀의 검세는 상대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수준으로는 상대가 안 돼."
다만, 앞선 경기가 나형과 파운이었다.
두 사람이 선보인 압도적인 힘을 목도했다.
가진 바 검기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신기자. 네 주인이나 찾아갈 것이지 여긴 또 왜 온 거냐?"
"주인께서는 모자란 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계시니 제가 가면 화만 내실 겁니다. 이럴 때는 혼자만의 시간을 드리는 것이 낫죠."
"흥. 그게 모자란 도라고? 배부른 소리를 하는군."
"완성된 화륜은 그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뭐?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냐?"
저절로 퉁명스러워지는 목소리에 신기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만약 은소소 아가씨께서도 그와 비슷한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비슷한 힘? 신기를 말하는 거냐?"
"하하. 죄송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신기는 말씀드렸다시피 각 부족의 후손만이 익힐 수 있으니까요. 괜히 억지로 익히다가는 나형 도련님처럼 될 뿐입니다."
"쯧. 그래서 뭐? 또 무슨 숨겨진 이야기라도 알고 있나?"
"어느 정도는 비슷합니다. 검성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검성!?"
은소소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검성.
흔히 시대를 관통하는 무인들에게 검신, 검제, 검성 따위를 붙이는 건 흔하다.
하지만 한 세대 전부터 검성의 이름은 공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중원을 관통한 검성의 위명이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
아직까지도 검에 관해서는 그와 견줄 이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네가 검성에 대해서 안다는 거냐? 어떻게?"
"굳이 말하자면 제 부족 덕분입니다."
"수응이라고 했나? 그 부족이 왜?"
"검성께서 수응 출신이거든요."
검성의 독특함은 그 강함만이 아니라 출신에도 있다.
무림출도 후 은거까지 아무도 그의 출신을 알아낸 적이 없기 때문.
혹자는 세외 변방에서 왔다고 하고, 누군가는 동쪽 바다 건너 무인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만큼 출신이 신비한 인물이었다.
"그 검성이 네 부족 출신이라고? 사실이냐?"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본래 신기의 소유자로 낙점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족 내부의 갈등이 싫다 하여 스스로 수응의 이름을 벗고 무림으로 나가셨지요."
"그럼 그의 검은……?"
"네. 모두 스스로 창안한 무공입니다."
"하. 미쳤군. 내가 봤던 그 엄청난 무공과 견줄만한 걸 스스로 창안했다?"
"절세기재라는 건 그분을 칭하는 단어죠."
은소소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부정하지 못했다.
그녀가 광검으로 불리는 건 단순히 현실도피적인 칭호가 아니다.
검을 사랑하고 검에 미친 것이 맞다.
일대 검호의 무공이라면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
"그 검성의 무공을 내게 알려주겠다는 건가?"
"알려준다고 표현하면 어폐가 있겠군요. 저 역시 그 무공을 익힌 건 아니니까요."
"그럼 뭘 어쩌자는 거냐?"
"검성의 무덤이 있는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어째 맨입으로 말해줄 것 같지는 않군."
"맞습니다. 이대로 승부가 진행되면 아가씨의 다음 상대는 파운 도련님. 포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제안이었다.
검성이라는 미끼는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삼키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파운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없어도 마찬가지.
자신의 검은 다름 아닌 명한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었다.
이건 명예와 의리에 관한 결정이었다.
"받아."
"받…… 응?"
순간,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소백?"
시합 전만 해도 정양을 하고 있던 명한이었다.
어느새 다가와 곁에 서 있었다.
"검성의 진전이라면 평생을 추구해도 모자란 거야. 나 때문에 포기하지 마."
"그…… 하지만, 나는 널 위해서 검을 쓰기로 맹세했어."
"잠깐 물러나서 추스르는 것도 날 위한 거야."
"내가 파운에게 질 것 같아서?"
"……"
명한은 굳이 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답임을 은소소는 알았다.
입술을 잘근 씹으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에게 미치지 못해서 화가 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소백 도련님께서는 너무 직설적이군요. 소녀의 마음은 예민한 거랍니다."
"검성의 무덤은 해신도에 있다. 열쇠는 네가 가지고 있는 거냐?"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죠?"
대화에 끼어든 신기자를 향해 명한이 날카롭게 대응했다.
"네가 아는 만큼 나 역시 안다. 일곱 가문. 아니, 여덟 가문이지. 일월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힘을 길러왔다는 것도 알지. 그러다 검성 같은 예상치 못한 천재도 태어나는 것이고."
"하…… 하하. 이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말이군요."
"함부로 흔들지 마. 네가 뭘 바라든 나와 엇갈리지 않는다면 관여하지 않을 뿐이다."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군요, 소백 도련님."
말없이 신기자를 응시했다.
그는 스스로를 수응의 후예라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것이 많다.
명한 역시 이 의문을 깊이 담고 있다.
다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을 해소하기에 역량이 부족할 뿐.
"답은?"
"네. 도련님의 말씀대로 하죠. 어차피 저 역시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고자 제안을 했을 뿐이니까요. 해신도로 갈 수 있는 방법과 열쇠는 제가 시기를 봐서 전달하겠습니다."
"충분하다."
"다른 건 묻지 않는 건가요?"
"나형의 뒤에 혈교가 있고, 혈교가 수를 부려서 화륜을 품었다는 것? 물어보면 네게 답이 있는 건가?"
"……제가 못 당하겠군요, 도련님."
"그래. 물러나라."
신기자는 웃음 비슷한 것을 만들며 물러났다.
나타났을 때와 비슷하게 기척 없는 걸음이었다.
눈 한 번을 깜빡하기 전에 그의 모습이 지워졌다.
"……귀신 같은 인간이네."
"무공도 마찬가지겠지.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된 설명이 없는 인간이야."
"저런 걸 오른팔로 두고 있는 게 파운이라 이거지?"
"뭐, 어찌 됐든 월익의 후손이니까. 여러 가지 면으로 중심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지."
"여덟 부족이라. 평생을 신교에서 살았는데도 전혀 모르는 이야기야."
"때가 되면 이야기해 줄게. 아직은 나도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신기자에서 던진 말들은 조각조각난 퍼즐에 불과하다.
명한조차 다 짜 맞추지 못했다.
다만, 가끔은 상대를 떠보기 위한 허풍도 필요할 뿐이다.
앞으로 싸움에 확신 같은 건 없으니까.
"검성의 진전이며 앞으로는 괜찮은 거냐?"
"모르지. 네가 그걸 품을 수 있는 그릇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으니."
"도발하기는. 흥. 됐어. 나중에라도 알려달라고 징징거리지 마."
이 정도 각오면 충분하다.
뜨거워지는 은소소를 보며 웃었다.
다음 시합 이전.
은소소는 정식으로 기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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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대로 모든 시합이 끝나고 다음 대진이 완성됐다.
다음 단계로 진출한 4인은 강유, 파운, 은소소, 명한.
이 중 은소소가 기권하며 파운은 자동으로 진출이 확정되었다.
고로 남은 시합은 강유와 명한이 됐다.
"이거 일이 우습게 됐군. 기권이라니. 네가 조언한 건가?"
"소소에게? 내 말이라고 덜컥 들을 사람은 아니야."
"후후. 어차피 실력으로는 파운의 상대는 아니었다. 싸워서 죽거나 불구가 되느니 포기하는 편이 현명하긴 하지."
"파운의 전력을 깎지 못해서 아쉬운 건 아니고?"
"하하. 우스운 얘기야, 소백 아우. 파운의 상태는 내 승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어차피 내게는 상대가 되지 못하니까."
식전에 만난 강유는 자신감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면에서 승리를 자신했다.
"파운의 힘을 봤으면서도 그렇게 말을 하는 건가?"
"힘? 아, 월익 부족의 신기 말인가? 제법 그럴싸하기는 했어. 옛 무공 중에는 그렇게 강렬한 것들이 존재하곤 했지. 잘 가다듬으면 신교를 위해 요긴하게 쓰일 것 같더군."
"부족의 신기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군."
"알다마다. 알지 못하면 지배자가 될 수 없어. 이 신교라는 곳을 이어받는 건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럼 그 이상의 힘도 있다는 말이겠지?"
"궁금한가?"
슥, 손을 내미는 강유.
그 도발적인 행동이 명한이 잠시 멈칫거리다 손을 뻗어 마주 잡았다.
뭐라도 한 줄 알아낼 수 있다면 유리한 건 그였다.
[해석 불가]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껏 누구를 보든 무엇을 파악하든 동작하던 시스템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명한으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습작에서는 이런 일 따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당황이 눈 속에 엿보이는군. 역시 악수를 하는 것으로 무언가를 알 수 있는 건가?"
"……"
"그렇게 주눅 들 필요는 없어. 누구나 보물 꾸러미 정도는 지니는 거니까. 파운의 신기자처럼 내게도 작은 조언 정도 건네는 사람은 있어."
"그 사람이 나와 악수하라고 조언하던가?"
"네 얼굴 표정도 함께."
신비한 무공이나 술법이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강유가 짚은 부분은 습작 전체에 작동하는 시스템에 관한 것이다.
주인공인 소백이 아니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부분.
‘이것도 설정을 채우면서 일어난 일인가?’
명한의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후후. 그 표정은 앞으로도 계속 바라보고 싶군. 개인적으로 너 같은 인물은 수족으로 부리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반골기질이 심해서 수족으로 부리다가는 불구가 되기에 십상일걸?"
"그 고집스러운 성미도 제대로 부러뜨리고 싶다니까."
"……그게 일군 강유 선생님의 군림의 도인가?"
"어차피 세상을 이끄는 건 선두의 몇 명이 전부야. 그들만 부러뜨리면 세상의 방향을 주무르는 건 일도 아니지."
"이래저래 이 천마궁에 정상은 없네."
마도천하에서 배양된 천마의 자식들이다.
정상을 바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서로의 살을 찢고 뼈를 가르기 전에 한 가지 제안하지."
"말해."
"항복해라. 무릎을 꿇고 내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다면 너와 네 수족들은 내 대업에 중용해 주지. 이래 봐도 신분이나 투항 시기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지는 않거든."
"인재를 사랑하는 군주라 이거냐?"
"너도 눈이 있다면 알 텐데? 천마의 시기는 저물어 가고 있다. 다음을 탐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리석은 자일 뿐이야."
"그 팔팔한 양반이 하루 이틀 만에 죽을 것 같진 않지만…… 죽는다 해도 네놈 밑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유는 안 된다.
수많은 이야기가 뒤틀리고 온갖 내용이 추가된 습작이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절대로 바뀔 리 없다.
신교를 파멸로 이끌고 주인공 ‘소백’을 두 번째로 죽이는 인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향아의 왼팔을 자르는 범인.
궁곡에 이어 상정된 두 번째 적수가 바로 강유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