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단계
적운은 죽었다.
마지막 일격에서 승패를 가른 건 결국 자의식이었다.
더 많은 걸 바라고 더 강하게 열망하는 사람이 이겼다.
적운의 바람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어머니에게 부응하기 위한 삐뚤어진 마음이었을 뿐이다.
타인의 욕망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소백은 어때?"
"치명적인 상처는 없다고 하네요. 몸을 보호하던 신공이 충격을 줄여줬다나. 하여튼 정양을 마치면 무사히 깨어날 거에요."
"하아. 다행이네."
명한은 시합을 마치고 휴식에 들어갔다.
그의 상처도 적은 건 아니었다.
가이신공의 보호가 없었다면 어딘가 하나 정도는 망가졌을 것이다.
"그보다 이제 곧 아가씨의 차례 아닌가요?"
"응. 파운의 싸움이 끝나면 내 차례야."
"파운 도련님의 상대는…… 나형 도련님인가요?"
"보나 마나지 이건. 우리한테도 혼쭐난 놈이 파운의 상대가 될 수는 없어."
나형의 힘은 이미 경험해 본 바가 있다.
아무리 용을 써도 파운의 적수는 아니었다.
― 와!!
그때, 밖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연무장 쪽이었다.
"여긴 제가 보고 있을게요."
"응. 잠깐 다녀올게."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니, 은소소가 명한을 남겨두고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북적거리는 인파 가운데에 두 사람이 맞서 있었다.
한쪽, 팔짱을 낀 채 바라보는 것은 나형.
그리고 반대쪽,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은 파운.
"뭐?"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파운과 나형의 싸움은 나형의 우세로 기울고 있었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큭큭큭. 고귀하신 파운 도련님께서 당황하셨나? 언제나 승자에 위치할 거라 생각하셨던 분이니 이런 꼴이 당황스럽긴 하겠지."
"닥쳐라. 네놈의 실력은 이 수준이 절대 아니었어. 대체 어디서 이런 걸 배웠지?"
"하하하. 신기는 너희 월익 부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너."
파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교는 전신인 일월교에서 그 이름을 바꾸는 과정에서 몇 개의 부족을 근간으로 했다.
말하자면 신교를 세운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부족들.
이 중 하나가 파운이 있는 ‘월익’이라는 부족.
그의 도법의 근간이 되는 것도 이 월익의 무공이다.
"힘이라는 건. 갈망하는 자의 소유물이다. 너희가 쥐고 놓지 않는 힘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것을 갈망하여 얻었다. 자. 말해봐라, 파운. 이제 누가 더 강하지?"
"……어디서 한 자락 힘을 주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같은 놈에게는 지지 않는다."
"큭큭큭. 여전히 오만하군, 파운. 그렇다면 내 손으로 직접 너와 나의 격차를 알려주겠다."
순식간에 나형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생명처럼 형태를 갖추더니 파운을 몰아쳤다.
단순한 기운의 집합이라기에는 움직이는 기운 자체가 독특한 형질을 구축하고 있었다.
"벽력수. 응조공. 나한일퇴. 온갖 무예의 집합이로군요."
"……당신은?"
"이런 식으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군요. 신기자입니다, 은소소 아가씨."
어느샌가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는 신기자.
은소소가 묘한 눈빛으로 그를 봤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파운의 오른팔.
주인이 당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보일 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너무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도련님께서 역정 내실 겁니다."
"……그쪽 도련님은 지금 위험한 것 아닌가? 나형이 몰아치고 있는데."
"뭐, 그건 도련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죠. 전 조력자지 유모가 아닙니다."
"특이하네. 그럼 파운이 이대로 죽어도?"
"그럼 다른 주인을 찾아보는 수밖에요. 하지만 파운 도련님은 그렇게 쉬이 죽을 분이 아닙니다. 상대인 나형 도련님께서 파편을 얻었다고 해도."
"파편?"
낯선 단에서 은소소가 의문을 드러내자 신기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신교를 세운 부족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일부는. 파운도 월익의 후손이라면서."
"네. 월익, 화륜, 수응, 목섬, 금호, 토서, 일천. 모두 일곱 부족이 있었지요. 아, 정확하게는 여덟 부족이었나? 뭐, 하나 정도는 중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 거죠."
"꽤 자세히도 알고 있네. 신교에도 정확한 기록은 없을 텐데?"
"그야 신교에서 과거를 싹 다 지웠으니까요. 제가 아는 건 출신이 수응이기 때문입니다."
"……너도 그 부족 중 하나라고?"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 부족 출신이라고 해도 신교의 출범과 함께 대부분 과거를 버렸으니까요. 저같이 목매는 놈은 출세하지 못하고 어렵사리 빌붙어 살 뿐입니다."
파운과 같이 부족의 명맥을 잇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월익의 몇 안 남은 직계를 천마가 첩으로 들이면서 이름이 인정된 경우.
보통은 드러내고 쓸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그래서 그게 파편이라는 것과 무슨 관계라는 거지?"
"파편은 위대한 무공의 한 조각을 일컫는 말입니다."
"위대한 무공?"
"신교의 전신. 일월교의 창시자인 천기자 노사의 무공이죠. 아, 무공이라고 표현해도 되려나. 천지의 이치를 담은 법서? 표현하기 어려운 물건이지요."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하하, 당연하지요. 일월교에서 신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전부 묻혔으니까요."
"……"
묻힌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럼없이 토로한다.
두 사실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은소소도 깨달았다.
"의심은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저 도련님의 싸움을 보며 넋두리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넋두리라면 들어주지. 계속 얘기해 봐."
"아가씨의 분부대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신기자가 말을 이었다.
"천기자 노사의 무공은 당시 있던 부족들에 의해서 여러 파편으로 잘려져 나갔습니다. 이를 각 부족은 ‘신기’라 칭하며 보물로 모셔왔죠."
"모셔? 찢긴 무공에 힘이라도 있는 건가?"
"하하. 놀랍게도 그렇습니다. 천기자 노사의 신력은 그야말로 하늘에 닿을 정도로 대단했죠. 찢긴 무공마저도 하나하나가 경천동지할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만."
"다만?"
"자격이 필요했죠."
신기자가 손을 들어 파운을 가리켰다.
"현시대에 월익의 파편을 얻은 것은 다름 아닌 파운 도련님. 신기를 익히고 이를 가다듬기 위해 수많은 도법을 섭렵하셨습니다. 저분의 도는 이미 천하에 적수가 없을 정도지요."
"그래? 그런 것치고는 나형에 밀리는데?"
"하하. 그야 나형 도련님께서도 파편을 얻었으니까요."
"나형도? 나형이 부족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내가 알기로 그의 가계는 옛 마도 무가다. 관련이 없어."
"그 점은…… 설명하기 좀 곤란하군요. 워낙 여러 가지가 섞인 일이라. 대충 말하자면 억지로 자격을 얻었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억지로?"
"나형 도련님의 신기도 같은 이치입니다.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신기의 힘을 빌려서 쓰고 있는 겁니다."
퍼엉―!!
신기자의 말이 끝나는 순간.
굉음과 함께 연무장 한편이 격렬하게 폭발했다.
붉은색 안개가 한곳으로 집결하면서 연쇄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선?"
"후후. 그걸 보시다니. 역시 눈이 좋군요."
뿌연 연기 속에서 선 하나가 공간을 가로질렀다.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늘고 예리한 선이었다.
득의양양하게 웃던 나형의 가슴팍을 가르고 연무장 벽면과 한참이나 떨어진 건물의 외벽마저 잘라버렸다.
거리를 불식하는 베기였다.
"도련님이 계속해서 밀린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선이 자르고 지난 틈이 삽시간에 벌어져 거대한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로 파운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입가에는 피가 가득이고 옷과 머리카락은 헝클어졌지만, 기세는 그대로였다.
아니, 전보다 월등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기의 힘을 부끄러워하시거든요."
"……저게 완성되지 않은 힘이라고?"
수백, 수천, 수만.
아니, 셀 수 없이 많은 선들이 파운의 머리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하나하나가 전부 ‘도(刀)’였다.
무량무해의 도.
"빌려온 것으로는 스스로 얻은 것을 이길 수 없는 법이죠."
웃음기 가득 섞인 신기자의 말.
그리고 그 말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무량무해의 도가 쏟아졌다.
세상을 다 자르고도 남을 정도의 아득함이었다.
"……"
은소소는 이를 악다물었다.
아니라면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아서.
‘이길 수 있겠어, 소백?’
불안함이 가슴 한편에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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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있을 수 없다."
연무장 밖, 무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첨탑의 한곳.
신교 팔반 중 한 명이 끓는 소리를 냈다.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진행이었다.
"말해라. 어떻게 저 아이가 화륜의 파편을 가지고 있는 거지?"
단순히 대전에서 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대계에 있어서 대전은 극히 작은 부분.
설사 패하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전에서 드러난 ‘화륜’의 면모는 아니었다.
"대좌, 저희가 당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혈교의 놈들이 도련님께 손을 뻗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히! 그 무지한 쓰레기들 따위가 저 아이에게 손을 뻗어!?"
"죄, 죄송합니다. 일전의 실패로 숨을 죽였다고 판단했는데, 이런 수를 썼을 줄이야."
무릎 꿇는 수하의 모습에도 남자의 분은 식지 않았다.
아무리 모질게 굴고 냉정하게 처신해도 나형은 그가 아끼는 아이였다.
그를 신교의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고작 혈교 따위에게 방해받기 위한 계획이 아니었다.
"이 버러지들이 저 아이에게 손을 뻗은 이유가 뭐냐?"
"소신이 생각하기로는 불사종법과 신기의 결합이 아닐까 싶습니다."
"옛 황제 따위를 추종하는 버러지들 따위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하늘을 탐해?"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지금이라도 사람을 풀어서 혈교의 뿌리를 뽑겠습니다."
"……"
으드득.
남자의 손에서 청동 잔이 우그러졌다.
화는 머리를 태울 것처럼 뜨거웠지만, 그의 냉철한 사고는 이를 억눌렀다.
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움직이는 건 안 된다. 우리가 발을 떼면 승냥이들이 떼로 달려들 터.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너는 그림자 중 몇만을 움직여서 혈교의 뒤를 쫓아라. 놈들의 다음 수를 미리 읽고 대응하는 편이 낫다."
"네, 대좌. 허면 도련님은……?"
"대전은 포기한다. 화륜을 억지로 심었다면 경맥이 다 타들어 갔을 터. 이대로는 대계를 견디지 못해. 북해빙궁에 연락해서 천년빙(千年氷)을 빌린다고 전해라."
"북해빙궁이 호락호락 내어주지 않을 텐데요?"
"……전해. 천년빙을 내어놓지 않는다면 북해의 얼음을 모조리 녹여서라도 씨를 말리겠다고."
"네, 대좌."
간신히 억누른 분노가 말끝에서 너울거렸다.
손과 발이 묶였어도 세외의 문파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다.
그게 바로 신교의 팔반.
응왕(鷹王), 종리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