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235)

지독함의 끝

순식간에 수십 합이 지나갔다.

적수공권의 적운과 타구봉의 명한은 거리를 불식하고 싸울 수 있었다.

땅에서, 허공에서.

엄청난 기운을 쏟아내며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군. 천마신공이 경지에 올랐어."

"상대하는 소백은 또 어떤가. 그가 변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네. 혼재와 맞설 정도라니."

"과연 범의 씨는 범이라 이건가."

"수준 높은 공방이로고."

연무장을 보호하는 신교의 중임들이 연신 감탄을 흘렸다.

그들로서도 적운과 명한의 경지는 예상외였다.

나이를 고려하지 않아도 이미 최상급이었다.

하지만 이런 감탄과 싸움의 형세는 전혀 딴판이었다.

"큭큭큭! 피가 끓는군! 네놈의 피로 어머니를 웃게 하겠다!"

"이런 미친 효자를 봤나. 내 피로 왜 네놈 어머니를 웃게 하냐?"

"모르는 척하지 마라, 소백! 천마궁의 모든 여인들은 천마의 씨를 받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강함이 그들의 목적이라 이거다!"

"네놈 가정사를 나한테 확대하지 마. 어머니가 바란 건 혈통의 우수함이 아니야. 그저…… 아들의 행복이었을 뿐이지."

명한의 타구봉이 흐름을 끊고 적운의 기운을 밀어냈다.

거대한 강기의 파도가 반으로 갈라져서 폭발했다.

연무장이 쑥대밭으로 뭉개졌지만, 두 사람은 그 폭풍 속에서도 미동하지 않았다.

서로를 쏘아보는 눈빛에는 증오와 호승심.

어쩌면 연민에 가까운 것도 섞여 있었다.

"큭큭큭. 어머니께서 너와 네 어미를 싫어한 이유를 알 것 같아."

"……"

"불쾌해. 어차피 이 짐승 굴에 들어와 아등바등 살아가는 짐승에 불과한데, 혼자만 사람인 척하잖아. 너도 떨어지라고. 이 밑바닥으로 내려와서 같이 짐승처럼 울어보자 이거야!!"

아득할 정도의 기운이 적운의 손아귀로 모였다.

세상이 떨고 주변 공간이 그 힘에 비틀렸다.

‘천마사멸장. 침을 쓰지 않고도 가능했던 건가?’

명한은 이 절초가 얼마나 강한지를 천년호와의 싸움에서 봤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그 밑바닥을 밟고 올라왔다. 다시 내려가면 여럿이 슬퍼할 거다. 네 응석을 받아 줄 생각은 없어."

"소백―!!"

천천히 발을 내딛는 명한.

너울거리는 기운이 그의 걸음을 따라서 나선의 형태로 따라붙었다.

가이신공으로 누적한 힘을 몸에 두르는 요령.

굳이 표현하자면 힘의 띠였다.

모든 물리적, 기공적 파괴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웅―!

곧이어 적운의 천마사멸장이 명멸했다.

순간적이나마 낮과 밤의 경계가 흐려지며 주변의 명암이 갈렸다.

모든 것을 빨아들여서 한 점으로 사멸하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위력의 초식.

이 아득함을 견디지 못하면 대상이 무엇이든 먼지로 돌아갈 뿐이다.

‘본다.’

명한은 이 명멸의 순간을 무량(無量)의 수준으로 나누어 관찰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알려진 불가의 지혜, 반야에서 나온 눈이었다.

가시적인 수준 이상의 존재의 명멸이 찰나에 지나갔다.

세월의 흐름에 피고 지는 꽃처럼.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정보였다.

――!

하지만 그 안에서 명한은 봤다.

수천, 수만. 아니, 그 이상의 명멸 속 완전하지 않은 사념(思念)이었다.

천마사멸장은 경지 이상의 아득함을 초식으로 구현한 그야말로 초월적인 무공.

다루는 이의 역량이 이를 받쳐주지 않으면 완벽은 이룰 수 없다.

적운은 분명 천재이나 여물지 않았다.

아니, 여물 수 없었다.

[극천일무기 ― 절(絶)]

"고작 그것으로 내 천마사멸장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냐!?"

"끊고 끊어 그 이어짐이 완성된다면."

"뭐?"

[극천일무기 ― 멸(滅)]

점과 점이 이어져서 만드는 절의 선.

이 선과 선을 이어서 만드는 공간의 사멸이었다.

명멸의 공간 사이에서 들어있는 사념을 극천일무기의 기운이 통째로 도려냈다.

낯과 밤의 경계처럼 흐려지던 공간의 일부가 한 번에 뚜렷해졌다.

"컥―!"

깨어진 공간의 여파는 순식간에 적운에게서 쏟아졌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튕겨 나가 바닥에 처박혔다.

나선 형태로 짓눌리는 지면은 그 위력의 대단함을 방증했다.

"천마신공의 경지가 부족했군."

"저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실력이라니. 저 무공보다 저 틈을 찌르는 눈이 더 대단하다."

"신기의 향연이로군. 근데, 저 소백의 무공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

"저 정도의 신공을 우리가 모르는 것도 이상한데."

"흐음. 무고에 존재하는 무공인가?"

신공의 격돌에 주변의 수군거림도 더 짙어졌다.

아무리 명한이 극천일무기를 화무천과 다른 방식으로 쓴다 해도 이 미묘함을 읽을 정도로 주변에 고수가 많았다.

어느 정도는 모험이었다.

"후우. 후우."

그 말은 모험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적운이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명한이 가이신공을 풀며 숨을 몰아쉬었다.

반야를 극한으로 운용하면서 극천일무기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구현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아. 아아아. 어머니 아파요. 너무 아파요."

그때, 처박힌 적운의 입에서 흐느낌이 들려왔다.

"아파요. 아파요. 이대로 싸우면 죽어버릴 거 같아요, 어머니."

아이의 흐느낌이었다.

고통에 허덕이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두려움에 전의를 잃어버린 모습 같기도 했다.

"일어나!!"

하지만 그 흐느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연무장 밖에서 지켜보던 누군가의 날카로운 외침 때문.

적운이 놀란 아이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어, 어머니."

그곳에는 적운의 모친이 서 있었다.

하얗게 물든 눈으로 적운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소리쳤다.

"당장 일어나! 일어나서 다른 계집의 씨앗을 전부 죽여!"

"어, 어머니…… 너무 아파요. 아파서 싸울 수가 없어요."

"당장 일어나란 소리 못 들었어!? 일어나서 싸우지 않으면 네놈에게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냐!? 싸워! 싸워서 죽여!"

"아…… 아아."

적운은 흐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명한에게 받은 타격은 지독했다.

팔과 다리는 힘줄이 끊어졌고 내상은 깊어서 내식이 불완전했다.

숨마다 섞인 피는 단기간의 요양으로 회복될 상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완전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버리지 마세요, 어머니. 싸울게요. 싸워서 어머니를 기쁘게 할게요."

"그래, 그래. 그래야 내 아들이지. 저 오만불손한 종자에게 우리 아들의 힘을 보여주렴. 누가 진정한 천마의 씨앗인지. 이 땅의 후계자인지 보여주렴."

"네, 어머니. 죽어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게요."

어디선가 침을 뽑아서 백회에 쑤셔 넣는 적운.

몸이 기괴할 정도로 크게 들썩이더니 눈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적운의 어머니가 가진 백안(白眼)과 정확하게 같았다.

"……회안족(回眼族)의 사혈대침법인가."

"으음. 적운의 모친이 회안족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말이 있더니. 그게 정말이었군."

"흥. 잔인한 이야기지. 멸족시킨 부족에서 자질이 좋은 계집만을 추려서 씨를 뿌린 거니까."

"오로지 강함만을 숭상하여 씨앗을 뿌려 발화한 종이라 이건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강함은 저 뒤틀림이 원인이라 이거로군."

이 기괴함을 알아보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과거, 신교와 천마에 의해서 자행되었던 어떤 일의 단면이었다.

적운도 적운의 모친도.

모든 건 타버린 잿더미에서 건진 보물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재를 씻어낼 수 없는 그런 종류였다.

"……끝을 보자, 적운."

그리고 이 배경을 모두 아는 것이 명한이었다.

피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받아들이며 정면에서 맞섰다.

"죽여주마, 소백!!"

싸움은 끝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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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혈대침법은 말 그대로 사혈에 침을 꼽아서 각성하는 대법이다.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도달하면 평소보다 강한 힘을 내는 이치.

강제로 죽음을 체감하게 해서 힘을 뽑아낸다.

잘 다루고 적당히 운용하면 비장의 수가 될 수 있지만, 과용하면 체득으로 끝나지 않는다.

목숨을 담보로 힘을 끌어오는 미친 수법이다.

"죽어! 죽어!! 네가 죽어야 어머니께서 행복해하신다!!"

광기에 휘둘린 장력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하늘부터 땅까지의 모든 공간이 기에 짓눌려서 뭉개지고 있었다.

이치도 무리도 없는 단순한 힘의 나열이었다.

"칭얼대지 마."

맞받아치는 건 버겁다.

아직 정립되지 않은 무리를 억지로 끌어다 쓴 터라 명한도 소모가 많았다.

타구봉을 길게 쥐고 원으로 막을 쳤다.

쏟아지는 장력의 폭포수가 원에 막혀 흘러나갔다.

우드득. 우드득.

그때마다 무언가 하나씩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양쪽 모두 물러나지 않았다.

"크…… 크흐흐흐흐! 끝까지 올 수 있겠냐, 소백!?"

쩍, 소리와 함께 어깨부터 손목까지 갈라지는 적운의 팔.

내공을 제어해야 할 경맥이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내버려 둔다면 다시는 팔을 쓰지 못할 부상이었다.

"내 끝을 네놈이 정하지 마."

"캬하하하하! 우습지 않나!? 결국, 우리는 이렇게 싸우다가 버려질 말에 불과했다!"

"쯧! 칭얼거리지 말라고 했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명한의 몸이 흔들렸다.

장력을 받아내는 타구봉은 파괴 불가였지만, 그의 손은 아니었다.

뼈와 근육이 심각할 정도로 망가졌다.

내공과 가이신공이 보호해주고 있다지만, 피해가 적지 않았다.

이대로 싸움을 이어가는 건 결국 공멸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래. 어차피 각오하던 일이었어.’

짧게 숨을 고르며 타구봉을 강하게 땅에 박아 넣었다.

내공이 땅을 타고 구형으로 퍼지며 주변 땅을 완전히 밀어냈다.

"너와 내 차이는 하나뿐이다, 적운."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칭했다.

소백으로 살지만, 소백일 수는 없다고 여겼다.

머리와 가슴은 그 간격을 메우지 못했다.

아마 타인의 인정이 없었다면 영원토록 그리했을 것이다.

‘소백도 소백의 어머니도.’

과거를 원망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속박하지 않았다.

아무리 지독한 곳에 있어도 마음만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차이는 그것뿐.

이건 무공의 고하가 아닌 이 땅에 선 한 사람의 이야기.

"그 눈 치워!!! 날 동정하지 마라, 소백!"

"네가 말했지. 우린 짐승이라고. 맞아. 좋은 품종을 배양하기 위한 짐승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 짐승을 진짜로 짐승으로 만드는 건 스스로가 건 족쇄 때문이다"

"닥쳐!! 나는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서 싸울 뿐이다!"

"변명. 정말로 네가 바란 꿈이 그것이냐? 목숨조차 내어놓으며 바라지도 않는 꿈에 모든 걸 걸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다. 나는 더 많은 걸 바란다."

어머니의 행복.

천마의 바람대로 좋은 품종을 배양하는 것.

이 굴레는 안과 밖을 나누었다.

적운은 안으로.

명한은 밖으로.

"나는 올라간다. 올라가서 천마를 눈앞에 두고 당당하게 말할 거다."

"소백―!!"

"나는 네 것이 아니라고."

한 아이와 한 남자가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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