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235)

비틀린 대결

속삭임에 적운이 잠에서 깨어났다.

헐벗은 여자들 사이로 복장을 차려입은 한 여인이 섞여 있었다.

무릎베개로 적운을 받치고 자장가 비슷한 것을 읊조렸다.

그 목소리는 부드럽고 고왔지만, 내용은 아니었다.

"……어미를 위해 피를 흘리렴. 천한 이들을 모조리 찢어 죽이고 그 살점을 식탁에 올리렴."

저주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눈을 감고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뱉는 저주는 기이하고 섬뜩할 정도였다.

헐벗은 채 누워있던 여인 중 일부가 잠에서 깨어 눈을 깜빡이다, 그 소리를 듣고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적운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움직여서는 안 됐다.

"……어머니."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적운이 완전히 잠에서 깨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름 끼치는 저주를 읊조리던 여인도 눈을 뜨고 그 모습을 마주했다.

동공이 하얗게 물든 장님이었다.

"잘 잤니, 우리 아들?"

"네. 어머니 덕분에 푹 잤어요."

"후후. 기쁜 소식이구나. 큰일을 앞둔 날이니 작은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

"걱정하지 마세요. 소백은 제 상대가 아니에요. 하찮은 미물에 불과하죠. 그를 찢어 죽여서 어머니 식탁 위에 올릴게요."

"아아. 이 어미는 기쁘구나."

손을 뻗어 적운의 얼굴을 더듬는 여인.

아들을 위로하는 어머니의 자상함치고는 무언가 뒤틀려 있었다.

무언가 맞지 않는 기괴함이었다.

"딸꾹……!"

그리고 그 모습을 힐끔힐끔 보던 한 여인이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황급히 혀를 깨물고 입을 닫았지만, 새어나간 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적운과 그 어머니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어머니. 침상이 흔들렸어요."

"새로 갈자꾸나. 큰일이 있는 날에는 길조를 뜻하는 붉은색이 좋겠구나."

"역시 어머니세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자, 잠깐! 살려 주……"

서걱.

무언가 한 줄기 선이 스쳐 갔다.

다급함에 외치던 여인의 목이 사선으로 미끄러지고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적운의 말대로 침상은 모조리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흐, 흐으으읍. 흐윽!"

"흐…… 흐으으."

그리고 그 참혹함에 남은 여인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필사적으로 입을 막고 떨림을 억누르지만, 본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색이 모자라요, 어머니.’ 어딘가 들뜬 말투의 적운의 손짓에 나머지도 모조리 목이 잘려서 죽었다.

흘러나온 붉은 피가 침상을 넘어 바닥까지 적셨다.

"그래, 그래. 아들아, 그렇게 하는 거란다. 이 세상에 어미를 제외한 계집은 모두 네 발아래의 장식에 불과해. 마음에 들면 취하고 아니면 죽여버리면 된단다."

"네, 어머니."

"가서 알려주려무나. 누가 이 땅의 진정한 후계자인지. 하찮은 것들의 소생 따위, 네 상대가 아님을 눈에 똑똑히 새겨 놓거라."

"반드시 각인시킬게요. 그리고 아버님의 인정을 받아올게요. 이런 절 만든 것이 바로 어머니라는 사실을."

"아…… 아아. 장하구나, 우리 아들."

품에 안아 적운을 다독이는 여인.

피부를 타고 흐르는 핏물은 두 사람의 기형적인 모습을 더욱 강조했다.

누가 그랬던가, 천마궁에는 괴물만 살고 있다고.

그 정점에 선 괴물 중 하나가 바로 적운이었다.

#

"어머니는 왜 아무 말도 안 하시는 거예요?"

뿌옇게 흐려진 기억 속 소백의 목소리.

분홍빛 예복 차림의 한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로 이를 마주하고 있다.

어머니.

명한은 이 여인이 소백의 어머니임을 알아차렸다.

"에끼, 이놈아. 송아지처럼 날뛰다가 도자기를 깨 먹은 건 네놈 아니더냐?"

"으윽. 그건 그 자식이 어머니 욕을 해서라고요!"

"아이고, 그러셨어요? 우리 잘난 아드님이 이 어머니를 끔찍하게도 생각하셨네."

"진짜인데!"

"쿡쿡."

부드러운 미소와는 맞지 않는 활발하고 장난기 섞인 말투.

그래, 이게 소백의 어머니였다.

고려에서 납치를 당해 강제로 혼인을 맺었지만,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은 여인.

강하고 현명하여 천마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

"이 어미는 저 사람들이 하나도 원망스럽지 않아."

"왜요? 아무 죄도 없는 어머니한테 애먼 욕만 하는 사람들인데."

"어미는 이곳에 갇혀 있지만, 마음은 묶여 있지 않거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지만, 마음이 묶인 사람보다는 훨씬 행복하단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후후. 먼 훗날 되새겨 보면 알 수 있을 거란다. 신교라는 장소도 천마라는 이름도. 그 안의 수많은 이름도. 모두가 저마다의 굴레로 자신을 묶고 있을 뿐이지. 우리 아들은 그 굴레에서 꼭 벗어나렴."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기에 화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자신을 망쳤다.

어머니가 바라지 않던, 스스로를 속박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우으으. 모르겠어요. 난 저 사람들 전부 싫은데."

"아하하. 우리 아드님의 작은 머리에는 너무 어려웠나?"

"난 바보 아니에요!"

"쿡쿡. 바보가 꼭 자기는 바보가 아니라고 하던데."

"어머니! 못됐어!"

물 먹은 먹처럼 흐려지는 소백과 어머니의 모습.

무심코 손을 뻗었으나, 잡히지는 않았다.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당연한 건가."

기억은 온전히 소백의 것.

그저 육신만을 빌린 명한이 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아련함도 그리움도 마찬가지였다.

"……"

왠지 모르게 눈꺼풀이 무거웠다.

이 먹먹함에 그대로 매몰되고 싶은 느낌이었다.

만사가 다 귀찮고 힘을 내기 싫었다.

"그러면 안 되지."

"!"

있어서는 안 될 목소리.

무너지는 눈을 뜨고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를 봤다.

잔 머리카락마저 하나하나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

"너도 내 아들인걸."

"……그건 불가능해요. 전 육신만 빌리고 있을 뿐인걸요."

"그러니?"

"네?"

"정말로 넌 다른 이의 삶을 빌리고 있을 뿐이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삶은 삶이란다. 소백, 그 아이도. 너도."

"제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요?"

"기억나지 않니? 그 아이가 네게 무어라 속삭였는지? 자격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단다."

"……"

오래전, 소백의 마지막에서 들었던 속삭임.

잊고 있던 말이 떠올랐다.

"너와 난 같아."

"그래. 너도 소백도 내 아이란다."

손을 뻗어 품에 안는 어머니.

그 온기가 너무 좋아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먹먹함에 매몰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이 해금됩니다]

[불가해(不可解) 진행. 확인……]

[진척률……개입……]

아스라이 스러지는 수많은 속삭임을 자장가 삼아.

천천히 잠이 들었다.

#

날이 밝고 북소리가 천산을 울렸다.

천마대전, 다음 단계의 시작이었다.

이름 붙이기를 팔룡쟁투(八龍爭鬪).

살아남은 여덟 중 하나가 신교의 정식 후계자로 지명되는 싸움이었다.

"단상 위로 올라와라."

싸움의 장소는 신교의 중앙 연무장으로 정해졌다.

보다 많은 사람이 지켜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팔반만이 아닌, 신교의 장로나 무력대 대주.

주요 인력들이 전부 참관할 수 있는 장소였다.

"적운 도련님이다."

"저 사람이 바로 혼재, 적운?"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운 인상인데?"

마창의 부름에 연무장 좌우에서 적운과 명한이 나란히 걸어 올라갔다.

평소 소궁주와 접점이 없던 평무인들이 둘의 모습에 흥분했다.

특히, 혼재 적운은 ‘천마’와 가장 닮았다고 평가받는 인물.

그 걸음 하나하나에 요란하게 반응했다.

"반대쪽의 저 사람이 소백?"

"너무 왜소하지 않나?"

"응. 적운도 부드러운 인상인데 저쪽은 더하네. 얼핏 여자 같은 얼굴이야."

소리를 죽여도 명한이나 적운 같은 고수 귀에는 전부 들렸다.

평소라면 감히 하지 못할 말들도 지금은 스스럼없이 흘렸다.

대전의 분위기가 평무인들도 흥분시킨 탓이다.

"오늘 네놈의 피 맛을 볼 사람이 많아서 좋군."

"아가리 닫아라, 적운."

하지만 두 사람이 연무장 중앙에 나란히 서는 순간.

서로를 향해 쏟아낸 투기가 형체를 가지고 사방으로 쏟아졌다.

저마다의 감상으로 떠들던 평무인들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일제히 얼어붙었다.

자신들의 떠들어대던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제야 인지한 것이다.

괴물 두 마리.

잡아먹힐 거라는 두려움에 말이 쏙 들어갔다.

"제한은 없다. 가진바 모든 것을 쏟아내서 이겨라. 죽거나 항복하거나."

천마대전이라는 큰 행사에 대한 식전 안내나, 공연 따위는 없었다.

입에 바른 덕담이나 조언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생사투의 알림이 전부.

이것이 본래의 신교.

날것으로의 회귀였다.

"하. 하하하하! 마음에 든다! 이것이 마도의 정점! 신교의 모습이다!"

"미친놈처럼 웃지 마. 우린 마도지 광도가 아니야."

"크큭. 그날 못다 한 싸움은 이곳에서 마무리 짓자!"

시작을 알리는 종도 없었다.

적운은 대뜸 손바닥으로 허공을 움켜쥐며 일권을 날렸다.

펑, 소리와 함께 연무장의 한편이 무너졌지만 이를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명한조차.

"침은 안 쓰는 건가?"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거리를 확보.

타구봉으로 땅을 찍어 추격하는 적운의 발을 묶었다.

"네놈 주제에 볼 수 있을까?"

"그러다 맞고 울어도 나는 책임지지 않는다."

"캇!! 하찮은 씨 주제에!"

타구봉의 끝을 밟고 뛰는 적운.

허공에서 몸을 돌려 어마어마한 양의 장력을 쏟아냈다.

소나기가 떨어지는 것처럼 일대 영역이 통째로 뭉개졌다.

어마어마한 힘.

하지만 예상하고 있다면 그저 힘자랑에 불과하다.

명한은 봉을 놓고 포격 범위를 이탈.

적운이 뛰는 순간에 맞춰 타구봉을 허공섭물로 당기며 점과 점을 이어서 공간을 잘랐다.

"위험하다. 평무인들은 뒤로 물러나라."

"굉장한 기교로군. 단절의 일격이라."

일격은 연무장을 다 덮고도 남아, 주변까지 영향을 미쳤다.

무력대의 장들이 평무인들을 뒤로 물리고 남은 기운을 해소했다.

"잔재주로군!!"

적운은 절(絶)의 요령을 힘으로 박살 내고 뛰었다.

양손을 교차해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천마하복장이었다.

땅이 통째로 파도처럼 일어나 명한을 덮었다.

그 위력과 범위는 인간을 아득하게 초월했다.

"천마신공!!"

"맙소사, 천마신공이야!"

이를 알아본 누군가의 외침은 명한의 위기감을 고조했다.

아무리 강한 무공이 있어 봐야 신교의 최강은 누가 뭐래도 천마신공.

우위는 정해져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여튼 화려한 것만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공에 국한된 이야기.

아니, 명한의 기준에서는 무공조차 아니었다.

"가이신공. 만천복배(滿天伏拜)."

웅. 웅. 웅. 웅―!

삽시간에 누적되는 기운.

층과 층이 쌓이기를 무려 십층(十層).

중첩된 내공이 주변 공간을 장악하여 땅으로 잡아당겼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던 천마하복의 기운이 순식간에 땅으로 처박혔다.

"―현경!?"

누군가의 외침처럼.

"침. 꺼내야겠지?"

명한은 이미 기준점을 아득하게 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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