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235)

깨달음의 길

백리향의 기권.

그리고 실종.

다섯 번째 관문이 시작되는 날은 충격적인 소식 두 가지로 문을 열었다.

오관문까지 올라온 사람이 중도에 포기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일정도 수습을 위해 잠시 중단되었다.

"무사히 빠져나갔다고 해요."

"그런가. 다행이네."

대전 덕에 방비가 소홀했다.

백리향과 묵호주를 무사히 신교 밖으로 옮길 수 있었다.

사실상 소궁주와 만마당주가 함께 사라진 큰일이었지만, 후자는 대외적으로 공표할 수 없었다.

각 관문의 설계자가 사라졌다는 건 대전의 진행에 치명적인 이야기.

수습을 위해 바삐 움직였다.

"도련님, 내각에서 전갈이 왔어요."

해가 중천에서 넘어가기 전에 소식이 각 소궁으로 전달되었다.

하루의 유예를 가지고 관문을 정비한다는 이야기였다.

명한은 어렵지 않게 이 소식의 숨은 뜻을 간파했다.

"만마당주가 설계한 관문을 폐기한다는 거겠죠?"

"그대로 활용할 거였으면 굳이 미룰 이유가 없지. 묵호주가 사라진 이상 설계를 불신하는 건 당연해. 다른 방식으로 관문을 설계하겠지."

"도련님께는 안 좋은 소식이네요. 차라리 대전이 끝내고 두 분을 내보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묵호주가 무사하기 힘들어. 용혈이 파괴된 것을 알았을 테니, 묵호주가 멀쩡하게 있으면 그를 제거하려 했을 거야. 미끼로 쓸 게 아니면 빨리 내보내는 것이 현명하지."

필요한 정보는 얻을 만큼 얻었다.

적을 꾀어내는 미끼로 써도 충분히 가능했겠지만, 명한은 그렇게 냉정하지 않았다.

백리향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두 사람을 빼돌렸다.

중간이 일이 없다면 무사히 은거촌에 당도할 것이다.

"쉬운 길을 돌아가는군. 지금 관문을 누가 담당하게 됐는지는 알고 있어?"

밖에서 돌아오는 건 은소소였다.

"내각 아닌가?"

"아니야. 팔반의 일원. 마창(魔槍) 육마완이 맡았어."

"육마완? 그가 이번 일에 나섰다고?"

마창, 육마완.

팔반 중 가장 활동이 적은 인물로 과거 정마대전 이후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창의 달인으로 그 실력은 군계일학.

천마조차 창에 있어서는 그가 천하제일이라고 선언한 적이 있다.

"알다시피 팔반도 이리저리 엮여 있잖아. 서로가 서로를 못 믿으니 그나마 동떨어진 인물을 선택한 거지. 문제는 육마완의 성격이야."

"……관문이 의미가 없겠네."

"맞아. 그는 오로지 무 하나만을 추구하여 팔반의 일익이 된 사람이야. 관문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 남은 관문은 사실상 폐기했다고 보는 편이 옳아."

"단번에 힘 싸움이라 이건가."

본래의 계획은 관문에서 경쟁 상대의 전력을 줄이는 것.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대로 전력투구에 들어가면 총 전력이 부족한 명한이 불리한 건 자명했다.

"다른 세력도 찬성한 거냐?"

"뭐, 불만은 있었지만 궁여지책이지. 누구도 득을 보지 못하는 형태가 최선이라는 것에는 동의를 했어."

"난감하네."

육마완의 성격이라면 매수나 간계도 불가능.

승리의 관건은 소궁의 실력으로 압축되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강행돌파밖에는 없겠어."

"승산은?"

"삼 할 정도."

"희망적이지는 않네."

"뭐, 인생이 다 그렇지.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 보자고."

천마대전이 종극으로 향해갔다.

#

중앙궁에 남은 소궁주들이 다시 모였다.

도망친 백리향을 제외하고 전부 여덟이었다.

"왜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 모은 거지?"

"글쎄. 덕담이라도 해 주려나? 어차피 떨어질 놈들, 말이라도 좋게 해 줘야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냐, 파운?"

"죽고 싶은 거냐?"

분위기는 살벌했다.

각을 세우는 파운과 적운을 제외해도 긴장감이 상당했다.

수가 한 자리로 줄어든 이상 이제 대전의 결말이 코앞이었다.

모두가 적이었다.

"모두 모인 건가?"

"……마창."

그리고 그때.

중앙궁 단상 쪽으로 한 남자가 내려왔다.

커다란 체구에 두서없이 기른 수염.

호랑이 같은 이목구비에 기세는 거칠기 짝이 없었다.

신교의 팔반이라기보다는 숲에서 사는 야인에 가까웠다.

"우리를 왜 불러온 것이오, 마창."

"조용히 해라."

"……!"

소궁 서열 칠 위, 차오의 말에 육마완의 기세가 창처럼 쏟아졌다.

위세 좋은 소궁주라도 꼼짝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식은땀만 뻘뻘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네놈들이 지위가 소궁주라고 해도 어차피 애송이에 불과하다. 후계를 논한다며 머리 굴리는 쥐새끼에 신교의 후계 자리가 어울릴 것 같은가?"

"하! 팔반이라고 해도 말이 심한 것 아닌가, 육마완."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입을 열지 마라."

"너……"

"말했을 텐데."

발끈한 적운의 앞으로 무형의 창이 날아와 꽂혔다.

적운의 기세를 단번에 찢어 버리고 그를 두 걸음이나 물러나게 했다.

이건 단순한 내공의 고하나 무공의 위력 차이가 아니었다.

힘의 격.

적운도 미간만 찌푸릴 뿐 대들지 못했다.

마창, 육마완이라면 천마의 자식이라도 창으로 꿰어 버릴 수 있었다.

"이제야 어울리는 얼굴이 됐군. 네놈들이 무슨 수를 쓰든 잔꾀를 뽑아내든 의미 없다. 이 신교는 오로지 무학의 정점으로 이룩한 업적이다. 힘만이 이 괴물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표. 관문? 함정? 간계? 집어치워라."

쾅!

마창이 독문무기, 흑마창으로 대전을 찍었다.

그를 중심으로 수십 장의 공간이 거대한 압력에 짓눌렸다.

마창이라는 존재감이 사역한 영역이었다.

적운, 파운. 심지어 강유조차 이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남은 관문 따위는 폐기한다. 이곳의 여덟이 목숨을 걸고 겨루는 것. 강한 자가 살아남고 승자가 승리를 독식할 뿐이다. 불만이 있다면 날 꺾고 바꿔 봐라."

누가 있어서 지금의 육마완에게 덤빌 수 있을까.

침묵만이 대전을 흘렀다.

"흥."

짧게 코웃음 치며 육마완이 깃발을 던졌다.

한 사람당 하나, 여덟 개의 색이 다른 깃발이었다.

중앙궁 대전 중심에 차례대로 하나씩 박혔다.

"뽑아라. 누구와 겨루는지 정하게 될 거다."

말하자면 번호표.

하나둘 중앙으로 모여서 깃발을 뽑아 갔다.

색만 다를 뿐 동일한 모양에 동일한 크기였다.

모두가 깃발을 쥐고 자리로 돌아갔을 때 다시 육마완이 입을 열었다.

"날이 밝으면 순서대로 진행한다. 죽이든 살리든 그딴 규칙 따위는 없다. 살아서 서 있는 놈이 승자일 뿐. 마지막 한 놈이 남을 때까지 싸운다."

"모두 한날에 진행합니까?"

"삼 일. 포기하고 싶은 놈은 지금이라도 해라."

남은 여덟 중 포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마창이 대전 가운데에 창격을 날렸다.

언제 띄워 놓은 지 모를 큰 장막이 끊어져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 위에 새겨진 것은 깃발 색에 따른 대진표.

"……적운."

명한의 첫 상대는 혼재, 적운이었다.

#

이길 수 있는가.

명한은 기초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신교를 떠나 소림사를 거쳐 다시 신교로.

수많은 여정의 목적은 이 대전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적지 않은 위기를 겪으며 철저하게 기반을 닦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확신은 어려웠다.

"상대는 천마신공을 거의 극성으로 익힌 괴물. 극천일무기의 경지가 깊어지고 있다고 한들 확신은 어려워. 숨겨 둔 기술이 몇 개나 있을지 확신도 힘들고."

"갑자기 약한 소리?"

"아니. 객관적으로 보는 거지. 적어도 이번 승부에서는 요행 따위는 없으니까."

"어차피 요행 따위에 기대는 성격도 아니잖아."

툴툴대는 은소소의 목소리에 명한이 피식 웃었다.

그녀의 상대로 지목된 차오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텐데, 굳이 와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걱정을 에둘러 말하는 태도가 제법 귀여웠다.

"그러니 나도 승부수를 던져야지. 오늘 일월배심경을 통해서 권왕을 꺾는다."

"권왕을? 몇 번이나 도전했지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잖아."

"이번엔 승산이 좀 있거든. 그와 대전하며 가다듬으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거야."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자신과의 싸움에서 꼬이면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어."

"그때는 네가 꺼내 줘야지."

"……대책 없기는."

입술을 비죽대지만 싫은 눈치는 아니다.

"맡겨도 되겠지?"

"제대로 하기나 해."

괜히 어깨를 툭 치고는 문가로 걸어가 앉았다.

일월배심경을 사용하는 동안 침입자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럼."

준비된 일월배심경에 명한을 손을 올렸다.

투영된 상(想)이 그림자처럼 번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권왕, 율무기였다.

"매번 신세만 지네. 오늘만큼은 내가 이겨야겠다."

"어림없는 소리. 내 주먹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기억 속의 권왕의 모습 그대로 싸움이 시작됐다.

화경의 끝자락에 있는 삼왕의 힘이었다.

강기로 이루어진 주먹이 쉼 없이 날아들었다.

명한은 타구봉을 휘두르며 이에 대응했다.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강(姜)에 대응하여 유(流)로 흘리고 쾌(快)와 변(變)으로 변주를 섞었다.

배우고 익힌 모든 무리를 총동원한 공격이었다.

"부족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권왕에게는 닿지 않았다.

실전이라면 칠채향도 섞어 쓰겠지만, 여기는 아니었다.

순수한 무리만이 통하는 공간.

그간 쌓아온 무(武)로는 권왕에게 미치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뭐가 부족한 걸까.’

수많은 기연을 얻고 영약과 묵혼으로 엄청난 내공을 쌓았다.

계획대로라면 지금 즈음이면 권왕에 닿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닿지 않는 주먹만큼의 간격이 있었다.

― 어째서?

"깨달음이 부족해서?"

― 극천일무기의 본질을 깨달았어. 묵혼공의 본질을 깨달았어. 더 필요한가?

"경험이 적기 때문에?"

― 수많은 사지를 극복했어. 더 많은 것이 필요한가?

"그럼 왜?"

― 그럼 왜?

되묻는 소리에 명한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수많은 가정과 수많은 해답을 내놓아도 쳇바퀴만 돌 뿐이었다.

그동안 먹어치운 영단의 수만 고려해도 이미 벽을 넘었어야 옳다.

무언가 맞지 않았다.

"자네는 현경의 의미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군."

"……무슨 뜻이야?"

"작디작은 인간이 어째서 현묘함에 닿을 수 있지?"

"현묘함에 닿는다?"

현경의 의미는 말 그대로 현묘한 경지.

하지만 그건 지혜나 학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밖’에서 ‘나’로 시작한 무학이 ‘나’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경지.

작디작은 인간이 대자연에 섞이는 경지를 의미한다.

"……내가 이곳에 섞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건가?"

이미 오래전에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한은 본질적으로 이 땅의 존재가 아니다.

섞이지 못하는 이질감은 그 너머의 걸음을 방해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땅에 섞일 수 있지?"

"답은 이미 알고 있다."

"……"

선문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건 권왕의 훈계 따위가 아니다.

무의식을 반영하여 모습을 드러낸 것이 눈앞의 권왕.

이 선문답은 결국 무의식이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이 땅의 모든 존재와 비교해서 내게 부족한 것.’

명한이 잠시 눈을 감았다.

무언가 머릿속을 스쳐 가는 짧은 생각이 있었다.

"덤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몸으로 실험하는 것뿐.

권왕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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