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235)

해피엔딩

만마당주 묵호주의 경지는 잘 쳐줘야 절정 끝자락.

지금의 명한에게는 절대로 위협이 될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흑서가 그의 목덜미를 물고 난 뒤로는 전신이 찌릿거릴 정도의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건 거의 권왕에 근접한 수준이었다.

‘단번에 몇 개의 경지를 뛰어넘을 수는 없어.’

명한의 눈은 묵혼의 기운으로 묵호주를 훑었다.

단전과 심장으로 이어진 생명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꽃 가운데에 검게 자리 잡은 또 다른 존재.

"천년호와 같군."

천년호에게서 느꼈던 이질적인 것이 묵호주의 안에도 있었다.

다만, 그때보다 더욱 깊고 무겁게 자리 잡은 상태였다.

아마도 아주 오래전에 뿌리내린 것.

오래전부터 만약을 대비하여 묵호주에게 심어둔 존재 같았다.

‘생각보다 역사가 깊은 조직이다.’

만마당주의 나이가 어려도 당의 역사는 깊다.

그런 인물에게 이런 수작을 벌이려면 신교 내부에 깊이 관여했다는 의미.

예사 조직으로는 있을 수 없다.

"크…… 아아아아! 날 보지 마!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폭주한 묵호주는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눌러 두었던 진심이 함께 쓸려 나온 격이었다.

인간이면 누구나 치고 있는 벽이 있다.

기생한 존재가 이를 해제하고 끝도 없이 증폭했다.

인간 ‘묵호주’의 한계를 강제로 뚫어버린 셈이었다.

"……오래 끌면 죽겠군."

당연하게도 이런 힘에는 대가가 있다.

진원진기를 태우고 그 안의 영혼마저 빠르게 줄어들었다.

묵혼의 힘으로 영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명한의 눈에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묵호주의 모습이 여실히 보였다.

처연하고 비참한 광경이었다.

‘그가 어떤 인간이었든 간에 이런 취급은 있어서는 안 된다.’

존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존재해야 하는 법.

"두들겨 패서라도 깨어나게 해 주마."

허리춤에서 타구봉을 뽑아서 크게 일보를 디뎠다.

땅이 타점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무너졌다.

펑. 소리와 함께 공기가 터지고 명한의 손에서 타구봉이 섬광과 같이 진격했다.

뒤늦게 반응한 묵호주의 손이 일격의 점을 양손으로 겹쳐서 막지만, 힘은 벽을 뚫고 그 너머를 꿰뚫기에 충분했다.

명치가 움푹 파이며 묵호주의 몸이 팽이처럼 돌아 벽에 처박혔다.

쿠르르릉.

벽이 으깨지며 돌무더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족히 수십 번은 죽고도 남을 충격.

하지만 명한은 이 일격으로 묵호주가 침묵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기생된 존재는 지독할 정도의 생명력을 자랑했다.

지금의 일격도 명치에 닿는 순간 근육이 단단하게 조이고 기운이 벽처럼 충격을 막아섰다.

힘에 망설임 따위는 필요 없었다.

콰쾅!!! 쾅!!

돌무더기에 처박힌 묵호주를 향해서 연격을 쏟아부었다.

한 발, 한 발이 돌을 으깨고 철을 뭉갤 정도의 위력이었다.

산사태라도 날 것처럼 은신처 전체가 들썩였다.

"……!"

하지만 그 순간.

가루처럼 부서지는 돌무더기 안쪽에서 길고 가느다란 선이 하나 튀어나왔다.

즉각 반응한 명한이 타구봉으로 회(回)의 요령을 사용해서 걷어냈지만, 선은 자연스럽게 그 힘을 타고 올라와 중심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어마어마한 힘.

명한의 몸 전체가 그대로 딸려 들어가 벽으로 내팽개쳐졌다.

"크아아아!!"

곧이어 돌무더기가 폭발하며 묵호주가 튀어나왔다.

"실. 실을 무기로 사용하는 건가."

그의 전신은 은색의 실로 칭칭 감겨 있었다.

충격을 흡수하고 연격을 날리던 명한을 날린 무기의 정체.

만마당 고유 무기 비사(飛絲)와 이를 다루는 무공 비사공(飛絲功)이었다.

"크으으으…… 나는 만마당의 수치가 아니다. 나는 만마당주다!!"

묵호주의 몸에서 실이 폭발적으로 풀려나왔다.

하나하나가 몸을 중심으로 회전력을 더해서 주변을 절삭했다.

돌도, 철도, 단단한 기둥도 모조리 잘려나갔다.

무기의 절삭력도 엄청나지만, 이걸 사용하는 묵호주의 비사공이 더 대단했다.

‘타구봉이 없었다면 위험했겠어.’

명한은 벽을 박차며 거리를 확보.

타구봉에 휘감긴 실을 그대로 찍어 눌렀다.

보통이라면 잘려야 하겠지만, 타구봉은 파괴 불가 무기였다.

실을 중심에 둔 힘겨루기가 이뤄졌다.

"날…… 무시하지 마!!"

벽을 할퀴며 호선으로 명한을 노리는 수십 개의 실.

중심선을 누르고 있는 그를 사방에서 토막 낼 기세였다.

하지만 힘의 쓰임이라면 누구보다 익숙한 것이 명한이다.

타구봉으로 누른 중심선을 안쪽으로 당기며 힘의 방향을 비틀었다.

몰아치는 태풍 속을 거니는 명한.

마치 태풍의 눈 속은 고요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백리향을 위해서라도 죽지는 마."

소리 없이 울려 퍼지는 무거운 발걸음.

땅을 통해 전해지는 힘은 다리를 지나 허리와 상체까지 전달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묵호주는 실을 당기며 발버둥 쳤지만, 타구봉을 찍어 누르는 명한은 태산이었다.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힘’만을 움직였다.

그야말로 태산압정(泰山压顶).

쩌엉―!!

묵호주가 머리부터 바닥으로 처박혔다.

지면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수 장 반경으로 갈라졌다.

파편이 튀고 지면이 조각날 정도의 위력.

보통이라면 수십 번은 죽어 마땅하지만, 앞서와 마찬가지로 명한은 기생한 존재의 생명력을 알고 있었다.

묵호주의 머리를 발로 밟은 채로 극천일무기를 시전했다.

하늘에서 시작해서 몸을 관통하고 대지로 뻗어 나가는 힘의 격류.

하늘을 먹고 땅을 먹고 마침내 그 주인마저 집어삼킬 파괴의 화신.

극천일무기의 본질이었다.

콰드드드득―!!

무너진 땅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사람 두엇은 충분히 서고도 남을 정도의 깊이였다.

파괴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지반을 흔들어 형태마저 바꿔 버렸다.

"……그래. 이 와중에도 살길은 찾겠다는 거구나."

명한은 그 파괴 속에서 하나의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그건 파편 그림자 사이로 도망치는 작은 쥐새끼.

바로 묵호주의 목덜미를 문 흑서였다.

놈의 귀를 통해 검은 덩어리 하나가 꿈틀거리며 스며들고 있었다.

극천일무기로 묵호주의 혼을 직접 타격했을 때, 보호가 불가능하다는 걸 간파한 기생충이 재빨리 몸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내가 그냥 보내줄 것 같더냐?"

명한의 내공이 실처럼 퍼져서 흑서를 움켜쥐었다.

놈은 바동거렸지만, 옥죈 힘이 한 수 위였다.

그대로 허공으로 떠 명한의 앞으로 배달됐다.

꿈틀거리는 검은 덩어리는 기의 막에 박혀서 사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살길을 찾기 위해 바동거리는 ‘생명’ 그 자체로 보였다.

"지독하군.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게도 집착이 심할까."

생에 대한 아득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이 땅에 나고 자란 생명체라면 모두가 생명에 집착하기 마련.

하지만 눈앞의 존재는 그 정도가 한계를 초월해 있었다.

어떤 이상이나 꿈.

존재의 가치를 구축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생명 하나에만 집중한 모습이었다.

이질적이고 불쾌했다.

"……죽어라."

살려두고 연구하거나 이를 추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대로 힘을 옥죄여 흑서와 함께 허공에서 짓눌렀다.

극렬한 저항과 함께 한 줌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들리는 것은 없으나, 명한은 지독할 정도의 비명이 귓가를 맴도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마치 수천, 수만의 생명이 스러지는 기분.

― 지이이잉!!

"큭!"

그리고 그 순간.

기묘할 정도의 커다란 공명과 함께 명한이 주저앉았다.

속이 매스꺼울 정도로 그를 짓누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부족함에서 나오는 현기증이 아닌, 과함에서 오는 어지러움이었다.

‘혼이……’

묵혼을 통해 느껴지는 혼의 무거움이었다.

기생한 존재가 죽자 그 안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혼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뭉개지고 박살 난 혼의 잔재였다.

그 어디에도 근원적인 개념으로서의 혼은 없었다.

"빌어먹을."

명한은 이를 내버려 둘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조각난 혼은 주변을 오염시킬 뿐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이 혼을 묵혼공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웅. 웅. 웅.

품 안의 금환이 반짝이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혼을 흡수해 나갔다.

#

역광으로 들어오는 빛.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눈앞을 아른거렸다.

사람.

명한은 그림자의 존재를 그렇게 파악했다.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지만,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피력했다.

산이 살아서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이렇지 않을까.

그만큼 거대하고 무거운 존재였다.

"―――"

그 존재가 역광을 받으며 명한을 돌아봤다.

희미하게 보이는 형체에서 무언가 말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소리는 닿지 않고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일까.

명한은 매우 강렬하게 그 의미를 해석하고 싶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갈망이었다.

"――불(不)―"

다시 움직인 그림자에서 한 단어를 이해했다.

아닐 불(不) 자였다.

무엇이 아니라는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단어에서 매우 깊고 깊은 감정이 느껴졌다.

메마른 사막에서 물을 찾는 방랑자의 갈증과 같았다.

이뤄주고 싶다.

그 갈증에 마음이 요동쳤다.

― 소백!

― 도련님!!

"헉!"

하지만 그 마음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두 눈을 깜빡이는 명한의 앞에 선 건 역광을 진 거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걱정을 한가득 품고 있는 두 여인.

은소소와 향아였다.

"……"

창밖으로 동이 터오고 있었다.

#

명한이 깨어난 곳은 자신의 소궁이었다.

백리향을 먼저 피신시킨 은소소가 나중에 돌아와 쓰러진 묵호주와 명한을 함께 데리고 돌아온 것이었다.

"두 사람 상태는 어때?"

"일단 숨은 붙어 있어요. 백리향이야 망혼향 때문에 의식을 잃은 것뿐이지, 큰 문제는 없었어요. 문제라고 하면 역시 묵호주죠."

"위험한 거냐?"

"네. 간당간당해요."

은소소가 데리고 올 때부터 그랬다.

한계까지 생명력을 태운 데다가 명한에게 받은 상처가 컸다.

기생하고 있던 존재도 사라져 회복도 매우 더뎠다.

"아슬아슬한 상태로군."

명한도 묵호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은소소의 말에 동의했다.

이렇게 두면 한 달도 못 버틸 게 자명했다.

"쿨럭! 쿨럭!!"

"음? 깨어났나?"

그사이, 묵호주가 검은 피를 토하며 깨어났다.

창백한 안색에 눈동자에는 생기가 서려 있지 않았다.

주변을 힘겹게 살피고는 상황을 이해한 듯 푹 주저앉았다.

"제 몸의 그것은 소백 도련님께서 제거하신 겁니까?"

"통째로 날려버렸다. 지독하게 들러붙어 있던데. 네가 허락한 물건은 아니겠지?"

"……네. 천년호에 사용한 용혈이 전부라고 착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절 전혀 신뢰하지 않았더군요. 이렇게 깊은 곳에 용혈을 잠복시켜 두었을 줄이야."

"그들이 누구지?"

"……"

"아직도 충성심이 남은 건가? 널 쓰다 버린 쓰레기 취급했다."

"아뇨. 충성심 따위는 이미 다 버렸습니다."

"그럼 왜 입을 다무는 거지?"

"제가 모든 것을 토로하면 살 방도가 없으니까요."

정보를 대가로 구명을 바란다는 의미였다.

약아빠진 생각이지만, 묵호주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절실했다.

본래 있던 곳에서 버림받은 이상 기댈 언덕은 명한뿐이었다.

"너와 백리향을 신교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신교에서 말입니까?"

"이미 같은 방식으로 빼돌린 사람이 있다. 적어도 당분간은 안전하겠지. 이 조건으로 네 정보를 사겠다. 어떠냐?"

"……네. 거부할 이유가 없겠군요. 하지만 하나. 내용을 바꾸고 싶습니다."

"무슨 내용이지?"

"저는 이제 곧 죽습니다. 생명이 빠르게 소멸되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그러니 밖으로 빼돌리는 건 백 매 하나로 해주세요."

"네가 없으면 그녀가 슬퍼할 텐데?"

"제 처소에 망혼향의 재료와 제조법이 남아 있습니다. 그걸 사용해서 저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워 주십시오."

이것이면 족하다.

묵호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백리향에 대한 마음은 진짜였던 모양이군."

"그녀를 만나 처음으로 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만마당의 치부가 아닌, 한 남자 묵호주로의 삶. 이루지는 못했으나, 마음에 여한은 없습니다."

"……그럼 죽지 마라."

"네?"

명한이 주먹으로 묵호주의 가슴을 후려쳤다.

무언가 파문이 그 주변을 휘감더니 안으로 스며들었다.

창백하던 묵호주의 안색이 대번에 회복되었다.

"이, 이건!?"

"네 혼의 구멍을 메웠다. 수명은 줄어들었겠지만, 잘 요양하면 손자 정도는 보겠지. 쓸데없는 거적때기는 버리고 한 남자로 여생을 살아라."

"……하. 하하. 제게 그럴 자격이 있겠습니까?"

"글쎄. 그건 살아보고 답해라."

인생의 밑바닥에서 잡을 수 있는 동아줄.

명한은 누구보다 그 간절함을 알고 있다.

"제가 무엇을 알려드리면 되겠습니까."

명한은 언제나 해피엔딩을 꿈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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