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235)

은밀한 곳에서

네 번째 관문은 기관이었다.

정해진 함정을 피해서 목적지까지 도달하면 그만이었다.

천마대전답게 난도도 높고 다양한 변수가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은 이들 중에 이 정도를 어려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통과. 수고하셨습니다, 소백 도련님."

탈락하는 사람 없이 네 번째 관문이 지나갔다.

개별 시험이라 서로를 견제할 수단도 없었다.

"미묘하네."

"응. 확실히."

명한만이 아니라 은소소도 이상함을 감지했다.

기관만큼 만마당이 손쓰기 쉬운 관문은 없다.

백리향이 생각이 있다면 반드시 이번에 적의 숫자를 줄였을 터.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역시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건데."

"짚이는 구석이라도?"

"첫째로는 아무래도 만마당이지. 천년호를 준비한 건 어디까지나 만마당이니까. 그 이상한 존재 역시 관계가 되어 있을 거야."

"그 만마당을 움직인 건 백리향일 거고?"

명한이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순서로 보자면 거의 확실했다.

"그럼 그 이후에 행동이 달라졌다는 건, 만마당 쪽의 이상으로 변심했다는 건가?"

"그게 좀 미묘해. 차라리 배신감으로 생각을 달리했다면 되레 평범한 모습을 연기했겠지. 아니면 감정적으로 대처를 하든가. 둘 다 아니었단 말이야."

"흐음. 삼자의 개입은?"

"가능해. 만마당주와 백리향은 연인. 삼관문의 실패 이후로 만마당주 쪽에 삼자가 개입하여 백리향을 협박했다면 지금의 상태도 이해는 되지."

"적운이?"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아무리 적운이라도 만마당주를 어찌할 수는 없다.

독립 기관인 만마당은 팔반도 직접적으로 손을 대지는 못한다.

"그럼 누구? 짚이는 곳이라도 있어?"

"생각해 봐. 만마당주는 백리향의 부탁으로 천년호에 무언가 수작질을 했어. 그게 혈교 등에서 본 것과 같은 계통의 수법이라 이거지. 그럼, 당연히 만마당주도 그들과 한패라는 의미 아닌가?"

"……어. 그렇지. 그렇게 되네?"

"근데, 봐봐. 만마당주가 혈교나 혈염마녀 등과 같은 기조를 보인다고 생각해?"

"백리향은 연인. 연인의 부탁으로 천년호를 조작하여 일부를 습격. 확실히 뭔가 다르네."

"응. 그래서 여기에 가정을 더하는 거야."

명한이 바닥에 ‘묵호주’ 이름 석 자와 ‘?’ 표기를 나란히 적었다.

그리고 각자에 동그라미를 쳐, 작은 부분을 겹치게 했다.

"이건 백리향과 겹치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그쪽 무리?"

"그렇지. 혈교, 혈염마녀 등을 움직이는 세력과 묶은 거야. 만마당주가 정말로 백리향과 진심으로 은애하는 사이라면 이 미묘함도 설명돼."

"모종의 세력에 포함되어 있으며 백리향을 위해서 움직였다?"

"우린 사람이니까. 기계처럼 딱 잘라서 행동하지는 못해. 어쩌다가 백리향과 사랑에 빠져서 그녀를 돕고자 했다면…… 그 결과가 천년호라면."

"백리향은 입막음을 당한 건가?"

"내 생각도 그래."

가장 손쉬운 수단은 살인멸구.

하지만 백리향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다.

‘떠오르는 건 혈교의 주술이나 혈염마녀의 속박. 하지만 금환은 반응이 없었어.’

불사종법과 관계가 없다는 의미.

"연인을 통해서 협박했다는 건가?"

"문제는 지금까지의 행적을 볼 때, 그들이 이런 불확실한 방법을 쓸 것 같지는 않거든."

"고독은?"

"아니야."

"흐음…… 그럼 이럴 게 아니라 확인해 보자."

빙빙 도는 대화에 은소소가 선을 그었다.

"대전 한복판에서?"

"어차피 그놈들이 누구인지도 확인해야 하잖아. 백리향을 제압한 것이 확실하다면 접촉할 가능성도 있고. 만마당주 쪽보다는 백리향이 가능성은 높지."

"……그래.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감수하는 편이 낫겠지."

여기서 백리향이 돌아서면 손해가 크다.

"자정에 움직이자."

"응."

명한은 과감한 수를 택했다.

#

백리향이 비틀비틀 걷다가 푹 주저앉았다.

어딘가 멍한 얼굴이었다.

"나는…… 할 일이 있어. 그래서 여길 왔는데."

중얼거림 역시 힘이 없었다.

흐릿한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보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 매. 정신이 들어?"

그 앞에 묵호주가 나타났다.

"아. 묵 가가. 묵 가가를 만나러 왔던 건가요?"

"……응. 맞아. 이곳에서 백 매와 만나기로 약속했는걸. 잊었어?"

"그렇죠. 그래요. 요즘 많이 힘든가 봐요. 머리가 뿌연 것이……"

"괜찮아. 내가 돌봐줄게. 여기 누워보겠어?"

"네, 묵 가가."

손짓에 백리향이 커다란 석재 단상에 몸을 누였다.

은은한 한기가 흘러나오는 단상이었다.

"등이 차요."

"몸의 피로를 식혀 주는 옥석이야. 내공도 증진시켜 주니까 편하게 있어."

"역시 묵 가가에요."

"……응. 마음을 놓고 내 손에만 반응해. 알았지?"

"네."

묵호주는 그런 백리향의 머리맡으로 가서 향을 태웠다.

기억을 잊게 하는 망혼향이었다.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는데."

본래라면 향 하나로 하루를 잊었어야 옳다.

하지만 묵호주는 백리향의 무공 수위를 잘못 판단했다.

강한 내공은 향에 반발하여 그 효력을 반감시켰고, 이내 기억을 돌렸다.

어쩔 수 없이 묵호주는 향을 중첩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하나씩.

부작용이 생기겠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미안, 백 매. 이 모든 일은 내가 재주가 없어서야. 내게 선대와 같은 능력만 있었어도. 만마당의 비전을 모두 익힐 수 있었다면……"

거래도 없었을 것이고 이런 상황에도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가정이 모두 의미 없음은 알지만, 묵호주는 멈출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백 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내가 어떻게든 할게. 백 매에게 신교의 후계자 자리를 주고, 그분의 대업에 작은 보탬이라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러면 나도 더 이상 만마당의 치욕이 되지 않을 수 있어. 백 매 앞에 떳떳할 수 있다고."

어느새 잠이 든 백리향의 이마를 쓸어내리며 묵호주가 중얼거렸다.

만마당의 당주.

그 멋들어진 이름 뒤에 가려진 치욕과 오욕의 시간을 씻어낼 기회.

많은 것을 포기해도 물러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 키익!

순간이었다.

묵호주의 품 안에서 작은 쥐 한 마리가 고개를 빠끔 들며 으르렁거렸다.

흑서(黑鼠)라는 이름의 영물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같은 영물의 기척을 감지한 것이다.

"이런. 설마 쌍각사를 감지할 수 있는 영물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이내, 천장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일단의 무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백? 은소소?"

백리향을 따라서 이곳까지 온 명한 일행이었다.

숨죽여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제 내려온 참이었다.

"그쪽이 만마당주?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군."

"네가…… 소백 도련님이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거기 누워 있는 사람에게 용건이 있어서. 뒤뜰에 정인이라도 만나러 가나 싶었는데, 이런 은밀한 장소로 안내할 줄은 몰랐어."

천산의 깊은 곳, 은신처.

안내가 없었다면 찾아올 수 없는 은밀한 장소였다.

"백 아가씨께서 피로에 취해 힘들어하셨거든요. 쉬고 나면 다시 소궁으로 돌아가실 겁니다."

"흐음. 이 향 때문인가?"

명한이 한 걸음 다가가며 망혼향을 들이마셨다.

그 모습을 본 묵호주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망혼향은 기억을 잊게 하는 매우 독특한 물건.

회심의 한 수가 될 수 있었다.

"망혼향. 배합은 이런 식인가. 의외로 독하지는 않네."

"……!?"

하지만 명한은 망혼향을 잔뜩 들이마시면서도 멀쩡했다.

그의 칠채향은 모든 독과 약의 정점.

순식간에 그 성분을 분석하여 자체적인 해독약을 분비했다.

재료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반응할 수 있었다.

"서로 바쁜 사이에 헛소리는 그만하자고. 백리향의 기억은 왜 지우려 하지?"

"……"

"답하기 싫다면 내가 직접 깨워서 물어보는 수도 있는데. 해독은 내 전문이라서."

"그, 그만!"

손을 뻗으려는 순간, 묵호주가 다급하게 막았다.

"당황한 얼굴을 보니까 진심이네. 뭔가 들키면 곤란한 걸 백리향이 목격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차라리 죽여서 없애는 쪽이 훨씬 깔끔한데. 그건 아니라는 거겠지?"

"……내가 어찌 백 매에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백 매라. 역시 그쪽이 백리향의 정인이었군. 그녀가 대전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이유고."

"전부 다 알고 왔군요. 맞습니다. 그녀와 제 관계도. 그녀가 대전에 임하는 이유도."

발뺌이 의미 없음을 깨달았다.

묵호주가 가감 없이 토로했다.

"천년호를 풀어준 것도 백호주의 부탁 때문이겠지?"

"……맞습니다."

"하지만 천년호에 기생한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고."

"!"

묵호주의 몸이 크게 떨렸다.

거짓을 태연하게 넘길 만큼 심지가 굳지 않았다.

‘배후가 될 만큼의 인물은 아니네.’

명한은 단적으로 판단했다.

"굳이 뭐 그쪽을 타박하는 건 아니야. 서로 바라는 게 다를 뿐이지."

"뭘 원하는 겁니까?"

"정보. 적당한 거리감으로 협력해 준다면 그쪽과 백리향을 못 도울 이유도 없지. 어때?"

"……"

은근히 던진 말에 묵호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 그래도 불안한 상황에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던 심정이었다.

명한의 말은 그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분을 배신하는 건 있을 수 없어. 하지만 정보 몇 개를 건네는 것 정도라면……’

배신이 아닐 수 있다.

합리화는 순식간이었다.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가볍게 이름부터 어때? 천년호에 기생한 그 존재의 이름을 알고 싶은데."

"……정확한 명칭은 저도 모릅니다. 다만, 그걸 아는 자들은 모두 ‘용혈(龍血)’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용혈? 용의 피라는 의미인가?"

"어디까지 그건……"

일시적인 호칭.

그렇게 답하려는 순간이었다.

― 캬아악!!

앞서 쌍각사의 존재를 알아차렸던 흑서가 갑자기 묵호주의 목덜미를 물었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라 반응할 수 없었다.

상처에서 퍼진 고통과 당혹감에 휘청거리다 힘이 풀려서 푹 주저앉았다.

"큭―! 크으으윽!"

하지만 이건 단순한 찰과상이 아니었다.

흑서가 문 부위를 중심으로 새카만 선이 퍼지기 시작했다.

지독한 반응이었다.

"가만히 있어! 내가 돕지!"

명한이 빠르게 반응했다.

상처 부위에 손을 올려 그 성분을 분석.

즉각적인 해독 작업에 들어갔다.

‘……독이 아니야?’

하지만 칠채향으로 분석한 성분은 독이 아니었다.

"끄아아아아!! 무, 물러나! 당장 백 매를 데리고 도망쳐! 크아아아!!"

반응은 점차 격렬해졌다.

묵호주는 전신을 뒤틀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는 이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게 안전장치를 남겨 두었구나! 날 믿지 않았어!’

애초에 백리향을 살려둔 것도 상황을 그냥 넘겨준 것도 신뢰의 증거가 아니었다.

다시 배신하면 처리하면 그뿐이라는 자신감.

"크아아아아!!!"

묵호주.

만마당의 당주 역시 쓰고 버릴 수 있는 패에 불과했다는 의미였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묵호주의 의식이 사라졌다.

"……소소, 백리향을 챙겨."

이곳에 남은 건 더 이상 묵호주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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