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사정
각자의 길로 흩어진 이후.
명한은 가루가 되어 사라진 천년호의 흔적을 살폈다.
압도적인 위력에 형태마저 남기지 못했지만, 죽은 후에도 볼 수 있는 건 존재했다.
"확실히 섞여 있네."
"네. 다른 기운이 함께 묶여 있어요."
명한의 말을 향아가 확인해 주었다.
두 사람의 눈에는 죽은 천년호의 혼에 엉겨 붙은 이질적인 존재가 보였다.
같은 혼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틀린 기운이었다.
"혈염마녀 때처럼 식물이 기생한 거야?"
"아니, 그때와는 달라. 홍련은 이것과 비교하면 애들 장난이지. 육체가 사멸하고 그 흔적만 남았음에도 아직 생명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어."
"뭐야 그게……"
"지독한 생명력. 아니, 그 이상. 불사의 존재라고도 볼 수 있겠네."
"불사? 네가 말했던 불사종법 말이야?"
명한이 시원하게 답을 하지 못했다.
그도 확실하게 선을 긋기 힘든 문제였다.
지금 이 상황은 그가 기록한 습작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련님. 품이 빛나고 있어요."
"응?"
그때였다.
명한의 품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은은하지만 어딘가 무게감 있는 빛이었다.
"이건…… 금환인가?"
예전에 세외 상단의 주인 타르에게서 받았던 금환이다.
외 등급의 영약으로 과거 황제가 소유했다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신기자가 그랬지.’
황제가 호랑이를 키웠다고.
"관계가 있는 걸까?"
의아해하며 금환을 내밀었다.
그러자 천년호의 흔적에서 어떤 기운이 빨려 나와 금환으로 스며 들어갔다.
너무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명한조차 반응하지 못했다.
"도련님. 이건……"
"응. 섞인 게 아니야. 본래의 것으로 돌아간 거지."
금환에는 기운이 섞이지 않았다.
본래부터 하나였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천년호에 섞여 있던 기운이 금환에게서 나왔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이건 왕가 진상품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지. 변방왕이 황가에 진상하는 물건. 하지만 이런 건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저 보기 좋은 돌덩어리에 불과해."
"다룬다고 하면……?"
"조금씩 다르지만 전부 같은 계통이야. 지독할 정도의 생명력. 생에 대한 집착. 홍련도 극천마인에 사용한 벌레나 술법도. 지금 이 천년호에 기생한 무언가도. 전부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어."
명한은 이제야 무언가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전체 흐름을 관통하는 물건이라면 이미 가지고 있었다.
"황제진경. 불사종법."
"역시 그 물건인가. 역시 이 뒤에도 혈교가 있는 거냐?"
"아니. 딱 잘라서 그렇게 말하기는 힘들어. 생각해 봐. 혈염마녀를 우리에게 보낸 건 팔반의 누군가야. 반면, 혈교는 나형과 거래를 하고 제물과 전대 황제를 원했지. 둘이 같다면 팔반의 인물이 혈교가 돼야 하는데……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확실히. 혈교는 셈을 속이고 나형과 거래를 맺었지. 단순하게 주종관계라고는 볼 수 없어."
"응. 게다가 이번, 천년호. 이건 백리향이 준비한 함정이야. 팔반의 누군가, 혈교, 나형 모두와 관계가 없어."
"그럼 이 모든 게 전부 제각각 일어난 사건이라는 거야?"
"일어난 사건. 아니, 누군가 그렇게 유도하고 있는 거지."
명한은 일련의 사건에서 흐름을 느꼈다.
"혈염마녀는 홍련을 사용한 실험. 혈교는 벌레와 술법을 통한 실험. 천년호는…… 흠. 이것만 조금 느낌이 다르긴 하네. 하여튼 이 모든 흐름을 주도하는 제3자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
"하.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네. 누가 감히 신교를 대상으로 그런 실험을 자행할 수 있을까?"
"글쎄. 그건 이제부터 알아가 봐야지. 적어도 단서는 얻었으니까."
"단서?"
"이거."
명한이 금환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환에 섞인 기운은 내공으로 가볍게 자극하면 그 존재를 피력했다.
상자에 갇힌 벌레의 느낌.
"동류가 있다면 찾을 수 있어. 이런 기운은 서로 이끌리게 돼 있으니까."
"대전 안에서 첩자를 찾자?"
"이보다 큰 행사도 없으니까."
"재밌겠네."
승리를 위해서라면 적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금환을 통해 수습한 기운은 큰 수확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의심스럽군. 신기자는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더 큰 의혹은 잠시 묻어둔 채.
"나가자."
삼관문을 통과했다.
#
"묵 가가―!"
다급한 외침과 함께 백리향이 뛰어들어갔다.
이리저리 찢긴 종이와 혈흔으로 얼룩진 양피지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창백한 얼굴의 묵호주가 누워 있었다.
"……미안. 실패한 것 같아."
"지,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요! 상처부터 치료해야 해요!"
"소용없어. 이 상처는 낫지 않아."
다급한 외침에도 묵호주는 힘없이 대꾸했다.
생기가 바닥난 목소리였다.
"어째서. 어째서 무리하신 거예요!? 우리 약속은 그냥 천년호로 충분했잖아요!"
"안 될 것이 뻔했으니까. 신교의 괴물들에게 천년을 산 신수는 조금 똑똑한 짐승에 불과해. 어차피 악의를 품기로 했으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하지만 묵 가가……"
"그만 울어. 울면 네 아리따운 얼굴이 망가지잖아."
묵호주는 찢겨나간 오른팔 대신, 왼팔로 백리향을 다독였다.
그 말투는 다정다감하여 연인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연인 그 자체였다.
백리향은 묵호주는 연인관계였으니까.
"묵 가가. 우리 그냥 도망쳐요. 이 지옥 같은 곳에서는 우리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요."
"미안, 백 매. 나도 마음으로는 백 번이라도 그러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버리고 너와 도망쳤을 거야."
"그럼 어째서……?"
"이유라면 뻔한 것 아닌가?"
"누구냐!"
끼어드는 낯선 목소리에 백리향이 은침을 던졌다.
경지에 오른 쾌속한 수였다.
"후후. 빙백은침. 빙궁에서 찾은 물건을 백 아가씨께서 사용하고 있었군."
하지만 은침은 닿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에 잡힌 채 허공에 멈춰섰다.
엄청난 경지의 허공섭물이었다.
"여기는 어째서 온 겁니까?"
"그야 자네 상태를 보러 온 것 아닌가. 그분께서 내려주신 오른팔을 날려 먹었다던데. 아무리 자네가 총애를 받는 입장이라고 해도 안 될 일이네."
"……"
인물과 묵호주는 아는 사이였다.
다만, 미미하게 떨리는 손은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님을 증명했다.
"묵 가가. 대체 저 사람은 누구죠?"
"……백 매. 오늘 일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 줘."
"묵 가가?"
"부탁이야. 백 매를 아끼기에 하는 말이야. 우리 계획은 어떻게든 해 볼게. 오늘은 아무것도 본 것으로 하고 돌아가 줘."
벡리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만마당의 당주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 이후로, 서로에게 비밀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신교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후계자가 되는 계획을 세운 이후로도.
이런 묵호주의 태도는 너무 낯설었다.
"후후후. 묵 당주. 사랑하는 연인에게 너무 매정한 것 아닌가?"
"신경 쓰지 마시죠. 당신이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아니. 자네가 처신을 잘했다면 분명 그랬겠지만, 그분께서 주신 팔을 날려 먹은 이상 이건 이제부터 내 일이야. 일에 사사로움이 개입되어 대업을 방해하려 한다면 방해물을 처리해야 하지 않겠나?"
"……!"
순간, 남자의 몸에서 기운이 폭풍처럼 치솟아 백리향으로 날아갔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었다.
묵호주는 하나만 남은 왼팔을 뻗어 공간을 단절하는 쇄금진을 펼쳤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충돌이 발생하고, 벽과 바닥이 잔금으로 뒤덮였다.
"호오. 그래도 만마당주라 이건가?"
"그만 하세요! 백 매를 건드리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용납하지 않으면? 자네가 날 막을 수는 있나?"
"……큭!"
아득하게 뒤덮는 압력에 묵호주가 휘청거렸다.
오른팔을 잃고 힘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지금 상태로는 견딜 수 없었다.
"뜻을 따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분께 전하세요. 뜻을 따르고 어긋나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그러니…… 백 매는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전하세요."
"흐응. 이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건가? 조금 더 반항했으면 싶었지만, 그분의 뜻을 생각해서 이번만 참도록 하겠네. 앞으로는 이런 일 없기를 바라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뭐 사랑하는 연인과 좋은 시간 보내게나. 자네의 잘린 팔은 조만간 회복시켜 줄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남자는 웃음을 남기며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기척을 곤두세운 묵호주도 백리향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이동이었다.
아득한 수준의 실력이었다.
"묵 가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백 매. 미안하오."
"묵 가가!?"
훅, 퍼지는 흑색의 가루.
백리향이 잠시 휘청거리다 그대로 무너졌다.
향의 이름은 ‘망혼향(忘魂香)’.
단기적으로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는 독특한 물건이었다.
오늘 나눈 대화, 목도한 사건.
모든 걸 잊어야 했다.
"그래야……"
백리향이 안전할 수 있으니까.
묵호주는 쓰러진 백리향을 품에 안고 뺨을 쓸어내렸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아주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다.
#
"아직도 연락이 없군."
3관문이 끝나고 자정이 넘어가는 시점.
본래라면 이미 찾아왔어야 할 백리향과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소궁을 찾아가도 은단 역시 자취를 감춘 상황.
이래서야 4관문에 대한 언질을 받기 어려웠다.
"안 먹히니까 도망간 거 아닐까요?"
"흐음. 그럴 만한 인간은 아니라고 봤는데. 모르겠네."
"흥. 천년호에 해 놓은 수작질을 보니 그 계집도 썩 좋은 사람은 아니야. 수작 부리다가 들켜서 도망간 모양이지."
은소소의 첨언까지 꽤 신랄했다.
애초에 깊은 신뢰는 없었기에 당연했다.
"그쪽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마냥 생각 없이 도망가진 않을 거야."
"이유라도 있어?"
"남 사생활이라 말하긴 좀 그랬지만…… 백리향과 만마당주가 연인관계거든."
"뭐!?"
"저, 정말인가요?"
훌쩍 다가오는 은소소와 향아.
지금까지의 반응 중 최고였다.
"뭔데, 둘 다?"
"말이나 해 봐. 정말로 둘이 연인관계야?"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건가요?"
쏟아지는 질문에 명한이 손을 휘휘 저어 물렸다.
"좀 물러나라 이것들아. 남 일에 뭔 관심이 이렇게 많아?"
"하지만 그렇잖아요. 신교의 꽃과 독립단체 만마당주의 사랑. 아름답지 않나요!?"
"음. 음. 확실히 그렇지."
"확실히 그렇기는. 남녀가 같이 일하다 보면 정분 생기는 거지. 뭐, 특별하다고."
"우우. 도련님은 매정해요."
"맞아, 맞아. 가끔 보면 소백 넌 너무 매정해. 이 달콤한 사랑 이야기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광검 맞냐?"
두서없이 치고 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 명한이 손사래를 쳤다.
이런 주제로는 도무지 상대되지 않았다.
"하여튼, 두 사람 관계가 그러니 포기하고 도망치지는 않을 거다. 백리향은 후계자가 되어 천마에게 만마당주와의 관계를 인정받고 싶을 테니까."
"아. 하긴 만마당주는 독립 집단이라 특정 소궁주를 지원할 수 없군요."
"이래저래 그쪽도 반드시 대전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거지."
"그럼, 지금 연락이 안 되는 건……"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거야."
그게 무엇일까.
쉬이 짐작 가는 바는 없었다.
"음? 누가 접근한다."
그때였다.
외부에서 기척 두 개가 은밀하게 접근했다.
난간을 넘어 소궁 앞쪽에 내려앉았다.
"늦어서 미안하다."
"백리향? 어떻게 된 거냐? 소궁에도 없던데."
"이래저래 일이 있었어. 다음 관문 내용은 이곳에 두고 갈 테니, 네가 연구해 봐."
"뭐? 너는?"
"……나는 좀 정리해야 할 것이 있어서."
기척의 주인은 백리향과 은단이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명한이 문을 열었지만, 이미 사라진 후였다.
덩그러니 놓인 양피지가 전부였다.
"……"
뭔가 이상하다.
예감이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