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235)

숨겨둔 한 수

일시적인 동맹.

이렇게만 보면 낭만적이지만, 현실적으로 대단한 건 아니다.

애초에 연습도 되지 않은 협격이 잘 맞아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

대상이 경쟁하는 사이라면 더더욱 힘들다.

"내게 맞춰라, 소백."

"시끄러워."

하나와 하나를 더해서 셋이 되는 효과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이기적인 싸움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천년혼의 앞으로 튀어나가는 적운과 그 위를 넘어서는 명한.

앞발이 전면을 휩쓸어 갈 때, 명한의 타구봉이 천년호의 등을 강타했다.

"크으윽! 이 비열한 놈!"

"누가 누구한테?"

"내려와라, 머저리!"

용트림하듯 몸을 비틀어 솟구치는 천년호.

타구봉을 수습하던 명한을 그대로 후려치고 몸을 허공에서 돌렸다.

적운은 그 모습을 빤히 보면서도 돕지 않았다.

대신, 떨어지던 천년호의 몸통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거대한 천년호의 몸통이 북처럼 흔들렸다.

"이런 식으로 한다 이거지?"

"큭큭큭. 도중에 죽어주면 더 좋고."

"누가 먼저 죽는지 한번 보자."

경우 자세를 수습해서 내려온 명한.

입가로 흐른 피를 소매로 닦아내고, 손끝으로 독을 털었다.

무색의 기운이 천천히 퍼져 주변을 잠식했다.

천년호와 적운이 동시에 비틀거렸다.

"독?"

"견뎌 보든가."

슬쩍 비웃으며 앞으로 튀어나가 천년호의 머리를 강하게 찔렀다.

극천일무기가 담긴 일격이라 바위도 쪼개고도 남을 정도.

하지만 천년호는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이를 정면에서 받고, 되레 밀어냈다.

타구봉이 부러질 것처럼 휘었다가 반대로 튕겼다.

주르륵, 밀려나는 명한의 모습에 적운이 파안대소를 했다.

"크하하하! 독 따위를 쓰니까 약한 거다!"

"젠장. 성분이 부족하잖아."

칠채향이라고 무적은 아니다.

성분을 분석하여 최적의 독을 만들고 싶어도 재료가 부족하면 헛일.

천년호도 적운도 독은 한 호흡을 유지하지 못했다.

"휩쓸리지나 마라, 머저리."

쿵, 소리와 함께 내려앉는 지반.

명한이 천년호의 힘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로 균형을 잃었다.

발 구름을 중심으로 퍼진 천마군림의 힘이었다.

천년호의 몸이 태풍에 휩쓸리기라도 한 듯 거칠게 요동쳤다.

"무너져라, 미물아!"

점점 무거워지는 천마군림.

세상을 오시하는 천마의 신공답게 그 위력은 단연 발군이었다.

천년호가 단순히 신수였다면 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을 터.

하지만 그도 알고 명한도 알듯이 천년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 크아아아앙!!!

포효와 함께 천마군림보의 기운이 찢어졌다.

여력이 칼날처럼 날뛰어 명한과 적운을 할퀴고 지나갔다.

강철과 같은 육체가 갈라지고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큭. 멍청한 놈. 적의 힘도 파악하지 못했는데, 무조건 찍어 누르려고 하면 어쩌자는 거냐?"

"닥쳐. 네놈도 독으로 설쳤잖아."

"모자란 새끼. 힘이 다가 아니라고."

"시끄러워! 신교는 힘이 전부다! 힘만이 진리라고!"

"하여튼 이 새끼나 저 새끼나…… 피해!"

명한이 이죽거림 사이에서 타구봉을 던졌다.

적운이 힘에 밀려 튕겨 나가고 그 위치로 천년호가 떨어졌다.

바닥이 통째로 무너지는 것은 앞서 보였던 천마군림의 힘과 유사했다.

충격파가 수십 족장 범위로 퍼졌다.

"크으으윽! 저 미물 따위가 감히 어디서 흉내를!?"

"좀 머리를 쓰면서 싸워라! 향아, 한숭 어떻게 돼 가냐!?"

씩씩거리는 적운을 만류하며 거리를 벌렸다.

굳이 두 사람만 앞서 싸운 건 거리를 두고 상황을 파악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

적운에게는 한숭이 명한에게는 향아가 있었다.

"몸 안에 색이 다른 게 있어요!"

"이건 종법(種法)의 일종입니다. 무언가 체내에 뿌리를 내리고 역량을 한계 이상으로 뽑아내고 있습니다."

향아와 한숭의 답이 거의 동시에 나왔다.

"들었지?"

"흥. 남의 사람을 함부로 부리지 마라."

"찾을 순 있어?"

"나는 혼재, 적운이다."

동공 주변이 회색빛으로 빛나는 적운.

기세가 한결 무겁게 가라앉았다.

‘힘에 휘둘리기만 하는 인간은 아니라는 거네.’

명한도 묵혼공을 가다듬어 눈에 집중했다.

눈으로 보는 것 너머의 존재를 확인해야 했다.

"찾았다."

"저기 있군."

답은 거의 동시.

― 크아아아앙!!!

천년호가 울부짖는 것도 함께였다.

기세가 힘을 가지고 주변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위세를 위한 포효가 아니었다.

"다른 영물들이다!"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숲 전역에 퍼져있던 영물들이 천년호의 포효에 모여들었다.

그 숫자가 족히 수십은 됐다.

"네가 데려온 이들, 허수아비는 아니겠지?"

"흥. 내가 할 소리다."

적운과 명한은 그 수에 겁먹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대상은 다르지만, 생각은 같았다.

"한숭. 주변을 정리해라."

"소소, 향아. 가지를 부탁할게."

총력전이었다.

#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든 존재에는 중심이 있다.

무인의 단전, 영물의 내단과 같이.

기운을 응집하고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적인 중심이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

명한과 상대하는 천년호도 마찬가지였다.

"봤지?"

"흥. 기괴한 놈이로군."

하지만 그 형태가 일반적인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천년호의 중심은 계속해서 그 위치를 변화시켰다.

처음에는 머리, 그다음에는 심장.

지금은 또 복부 중심에.

중심 자체가 살아있는 생명처럼 계속해서 이동했다.

"종법이라 했으니 고의 일종일지도 몰라. 사지를 잘라도 고를 처리하지 못하면 다시 살아날 뿐이다."

"내게 설명하는 건가? 헛소리할 시간에 붙들고 늘어져라."

"붙드는 건 네가 해라. 너보다 내가 강하니까."

"감히 어디서 헛소리를……"

두 사람의 말다툼 사이.

천년호가 입을 쩍 벌리더니 흑색의 번개 줄기를 내뿜었다.

쌍각사가 사용하는 뇌기에 버금가는 위력이었다.

"방해하지 마라!"

하지만 강하기만 한 기운이라면 천마진기 앞에서 기를 펼 수 없다.

천지가 뒤집히는 강한 기운의 요동과 함께 번개가 허공에서 사라졌다.

적운이 사용한 천마신공이었다.

"천마하복장(天魔河覆掌). 많이도 배워먹었군."

"흥. 그만큼 내가 적법한 후계라는 의미다."

"배운 게 많다고 강한 건 아니라서."

이번에는 명한이 앞서서 튀어나갔다.

타구봉에 실린 극천일무기의 기운이 점과 점을 이어서 그 사이를 끊어버렸다.

천년호의 어깨 부근 살점이 통째로 뭉개졌다.

피어오르는 건 붉은 피와 검은 무언가였다.

"구역질 나는군."

"몸에 기생해서 한계 이상을 끌어내는 건가. 불쾌하네."

그리고 두 사람이 양쪽으로 나뉘어 동시에 뛰었다.

상처 입은 호랑이를 방관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강렬한 장법과 봉법이 비처럼 쏟아졌다.

중심을 옮겨 타격을 피하는 천년호라도 이런 맹공은 다 받아낼 수 없었다.

상처가 벌어지고 점차 뒤로 밀렸다.

"흥. 기괴한 모습에 비해서는 별것 없군."

"방심하지 마라."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마무리를 택한 건 적운.

천마진기가 먹구름처럼 손바닥에 실려서 천년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물결 모양의 파형이 몸 전체를 타고 전해졌다.

밖에서 안으로 충격을 전하는 전형적인 침투경이었다.

중심을 파악했으니 그걸 파괴하겠다는 생각.

"뭐―!?"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였다면 명한이 개입할 이유가 없다.

어찌 됐든 천년호로 다른 전력을 줄이겠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

싸움으로 죽어주면 나쁠 것 없었다.

‘어쩐지 불길하다 싶더니.’

억지로 개입한 건 익숙한 불길함 때문.

푸화하학―!!

천년호의 옆구리가 터지면서 검은 덩어리가 연기처럼 터져 나왔다.

적운을 다 덮고 수십 족장 거리를 전부 검게 물들게 할 정도였다.

안개와 같이 가벼우나 바닥과 옷자락에 닿은 점성은 비교적 강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포자.’

균체의 그것과 닮았다.

"크, 크으으윽! 이게 대체 뭐냐!?"

적운은 검은 포자에 뒤덮인 채 바동거렸다.

손으로 털고 기운으로 밀어내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접촉 부위부터 살점을 파고들어 적운을 잠식하려고 했다.

"……맞네. 혈염마녀가 사용하던 방식과 같아."

불길함을 원천은 혈염마녀의 싸움.

홍련을 기반으로 하는 기생 괴물과의 대전이었다.

하지만 천년호에게서 받은 이질적인 느낌은 그때의 기운보다 훨씬 더 깊고 무거웠다.

‘이쪽이 훨씬 더 원류에 가까워. 홍련은 차라리 아류라고 해야 하나.’

지하 미로의 극천마인이나 혈교의 수법보다도 우위였다.

"이런 걸 내보내면 대체 몇이나 죽이겠다는 생각이냐."

적의 수를 줄이기 위한 과감한 방식.

천마대전을 생각하면 분명 허용 가능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명한 역시 그 기조를 뚜렷하게 했고.

‘하지만 이건 과해.’

현대전에서 총과 포가 아닌 생화학전이 비난을 받는 이유.

선을 넘어선 잔인함 때문이다.

"이런 건 더 이상 무인의 싸움이 아니야."

명한이 타구봉을 원형으로 휘둘러 기운을 실었다.

나선이 기운을 연거푸 증폭하여 거대한 륜(輪)으로 구축했다.

얇은 편(片)이 수십, 수백, 수천 개로 뭉쳐서 이루어진 륜이었다.

질기고 질긴 검은 포자를 잘라내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필요했다.

"적운, 움직이지 마라."

"……!"

응축한 륜을 그대로 적운을 향해서 날렸다.

칼날이 살갗 아슬아슬한 위치까지 훑으며 포자를 잘라냈다.

검은 가죽이 몸에서 툭 떨어지듯, 적운에게서 갈라져 나왔다.

"사라져라, 이 빌어먹을 놈!"

그 포자를 향해 적운이 강기를 쏟아부었다.

순식간에 형태를 잃고 씻겨져 나갔다.

"크으으으! 대체 저건 뭐란 말이냐!? 소백, 네놈은 알고 있는 거냐!?"

"저런 징그러운 건 몰라. 하지만 비슷한 건 몇 번 봤지. 혈염마녀에게서 지하 미로의 혈교에게서."

"뭐?"

"다들 바쁘게 움직이더군. 너는 다른가?"

"……쯧."

크게 혀를 차며 물러나는 적운.

"전력을 동원해서 이 혐오스러운 것들을 배제해라."

"도련님!"

"명령이다. 내 눈앞에서 이것들을 당장 치워."

"네."

그리고 명을 받은 한숭 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번에 장침을 뽑아 사혈 깊숙이 박아 넣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번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

하지만 한숭과 그 부하들은 누구 하나 죽지 않았다.

되레 기운이 엄청나게 폭증했다.

"사혈대침법(死穴大針法)?"

"흥. 과연, 광검이라는 건가? 보는 눈이 있군."

이를 알아본 건 은소소였다.

검을 보강하기 위해 옛 무공서를 뒤지다가 우연한 기회에 사료를 본 적이 있다.

신교에 의해서 멸문한 한 문파의 비전이었다.

"이걸 보여주는 건 저 역겨운 것들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한숭 등은 엄청난 힘으로 천년호에서 흘러나온 포자를 쓸어버렸다.

포자에 뒤엉켜 형태가 변질된 영물도 쏟아 내는 공격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가 적은 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사혈대침법으로 강화된 이 무리는 한 명 한 명이 화경 이상의 힘을 뽐냈다.

삽시간에 천년호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결코 네놈이 도와줘서는 아니다, 소백."

"……흠."

뒤이어 한 걸음 나서는 적운.

그는 이미 금색의 장침을 백회에 꽂아 넣은 후였다.

지금까지의 기운은 애들 장난이라는 듯 어마어마한 힘이 그를 중심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포자투성이의 천년호마저 주춤거리며 물러날 정도였다.

"이따위 장난질은 이제 그만하자."

합장하는 적운.

무언가 빛이 명멸하는 듯 주변이 깜빡이고……

그의 전면 수십 장 반경이 십 장 아래로 푹 꺼졌다.

범위에 휩쓸린 천년호는 그 형태만 겨우 먼지로 남긴 채 증발했다.

그야말로 소멸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네게로 향할 거다, 소백."

천마사멸장(天魔死滅掌).

천마신공 장법편의 최후 절초.

"……"

괜히 나섰다.

명한은 처음으로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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