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동맹
숲이 떨고 있다.
명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숲을 바라보며 그 이면을 느꼈다.
수많은 존재와 수많은 기운이 교차하는 한가운데서, 유독 도드라진 이질감이 존재했다.
그 기운이 숲을 떨게 하고 있었다.
"단순히 천년호가 아닐 거라고 하더니."
"뭘 느낀 거냐?"
"매우 위험한…… 어둡고 탁한 것이 숲 안에 있다."
명한이 은소소의 질문에 짧게 답했다.
그도 기운만을 느낄 뿐 그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묵혼공의 능력으로도 그저 헝클어진 형태만 보일 만큼 기운은 이질적이었다.
"필요한 내단은 소궁당 하나였나?"
"응. 우리 둘을 기준으로 삼자면 적당한 영물 둘이면 충분해."
"의미 없이 영물을 죽이는 건 내키지 않는데."
품 안의 쌍각사가 고개를 내밀고 볼을 비볐다.
복잡한 생각을 알 만큼 지능이 높았다.
"도련님."
"흠. 다른 곳은 이미 시작한 모양이군."
기운이 치솟고 영물의 울음소리가 숲을 가로질렀다.
명한이 머뭇거려도 시작된 관문은 멈출 수 없었다.
"가자."
망설임은 이내 지우고 발을 뗐다.
사소함에 발이 묶인다면 살아남기 힘든 곳.
그게 천마대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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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음과 함께 거대한 곰이 무너졌다.
가슴팍에 새겨진 깊은 도상이 생명을 앗아간 후였다.
푹, 바닥에 박히는 도 위로 파운이 내려앉았다.
"흥. 의미 없는 관문이군. 신기자, 이렇게 거리를 둘 이유가 있는 건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영물 사냥 같은 건 그에게 있어서는 대수로울 것 없는 작업.
도에 묻히고 싶은 피는 영물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후후. 이번 일은 제게 일임해 주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도련님?"
"알고 있다. 한 입으로 두말할 생각 따위는 없어. 다만, 의문일 뿐이다."
"의문이라기보다는 초조하신 것 아닌가요?"
"……신기자."
"이런, 제가 과했군요. 죄송합니다, 도련님."
장난스럽게 사과하는 신기자.
하지만 이내 신색을 정돈하고 말을 이었다.
"이번만큼은 거리를 두고 지켜보심이 좋습니다."
"어째서냐?"
"안 좋은 것이 엮여 있거든요."
"안 좋은 거라니? 뭘 말하는 거지?"
"오래된 것을 추종하는 자들입니다. 흩어져서 활동하지만, 여전히 꺼림칙하기 짝이 없군요. 엮여서 좋을 것이 없지요."
"오래된 것이라. 백리향이 움직인 말인가?"
"움직였다고 봐야 할지. 아니면 떠내려가고 있다고 해야 할지."
손으로 수를 셈하며 신기자가 숲 너머를 바라봤다.
그늘진 숲의 전경 너머의 무언가가 그의 눈앞을 아른거렸다.
더럽고 추악하여 손대고 싶지 않은 그런 종류였다.
"초조함에 쫓겨 둔 수는 언제나 악수가 되곤 하지요."
"선문답은 됐다, 신기자."
"멀찍이서 지켜보자는 의미입니다, 도련님."
"흥."
시선을 거두며 신기자가 물러났다.
파운은 도를 걷어차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았다.
불만은 있지만, 신기자의 조언을 무시할 만큼 생각이 없진 않았다.
삼 관문은 이렇게.
방관자의 위치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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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과 은소소도 오래지 않아 적당한 영물 사냥을 마쳤다.
숲 전역에 퍼져있는 어린 영물이었다.
조건은 만족했으니 더 이상의 사냥은 필요 없었다.
"도련님. 뭔가 다가오고 있어요."
"응. 나도 느껴진다."
하지만 명한 일행은 숲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백리향의 계획을 지켜보기로 했다.
정말로 효과가 있다면 한 손 거들 생각도 있었다.
"저건…… 적운인가?"
그리고 이내, 지나온 길 쪽에서 적운 일행이 걸어왔다.
적운을 포함 고작 다섯밖에 안 되는 작은 무리였다.
"도련님, 이쪽은 길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시지요."
적운의 옆에서 넌지시 충고하는 건 참모 역의 ‘한숭’이라는 인물.
본래 황실 관료였다가 환멸을 느끼고 신교로 편입된 사람이었다.
수와 셈. 점을 비롯한 온갖 주술에서 능했다.
그 역시 숲 너머의 불길함을 감지하고 있었다.
"후후후. 불길함이라. 딱 어울리지 않나?"
"도련님. 이런 곳에서 틈을 보이면 다른 맹수에게 물어뜯기가 십상입니다."
"할 수 있다면 해보라지. 어차피 신교라는 곳은 그런 장소다. 우리 모두가 들에 풀어놓은 맹수야. 물어뜯고 상처입히고 피로 몸을 적셔야 살아가는 짐승이다."
"……으음."
조언은 현명했으나 받아들이는 적운은 그렇지 않았다.
가장 천마와 닮았다고 평가받는 인물.
그 안에는 천마가 가진 ‘광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정마대전 당시 보여주었던 화무천의 광기와는 다른 종류의 광기.
"하! 온다!"
순간, 적운이 양팔을 펼치며 웃었다.
수풀이 크게 출렁거리더니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크기는 거의 집 두어 채를 합치고도 남을 정도.
굉음과 함께 땅이 들썩였다.
"도련님!"
"주변을 살펴라.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
"……네."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사이에서 적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마어마한 충격이 있었음에도 그의 기세는 한 톨도 꺾이지 않았다.
쿵―!
이내, 찍어 누르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주변 대기가 짓눌렸다.
모든 것을 밟아서 파괴하는 천마군림보였다.
"하하하하하! 마음에 드는 짐승이구나!"
걸음의 주인, 적운이 파안대소했다.
전신이 검붉은색으로 번지고 눈은 흰자가 사라져 완전히 흑색으로 변모했다.
그야말로 ‘마인’.
명한과는 조금 다르지만,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모습이었다.
― 크아아아앙!!!
그리고 그 앞.
세상을 짓누르는 천마군림에 맞서 두 다리를 박고 서 있는 거대 호랑이가 있었다.
검은색 털을 갈기처럼 늘어뜨리고 성난 이빨을 드러낸 모습.
풍기는 기운은 흉험함 그 자체였다.
"네놈이 날 위해 준비된 선물인가? 심장을 뽑아 목을 축이면 신공이 한결 깊어지겠구나!"
적운은 웃으며 달려들었다.
검붉은 기운이 해일처럼 일어나 천년호를 휩쓸었다.
굉음과 포효.
파괴와 파괴가 맞부딪쳐 주변을 초토화했다.
인외마경, 그 자체였다.
"……저 천년호도 대단하지만, 적운은 그 이상이네."
"응. 천마신공을 거의 모두 전수받은 거 같아. 신공이 경지에 이르면 천마진기가 일어나 자연스럽게 그 위용을 드러낸다고 하지. 기운이 완전히 검은색으로 탈바꿈하면 천마신공을 대성했다는 증거야."
"천마신공을 대성한 인간이라."
"영물. 아니, 신수라 해도 견줄 수 없어."
쏟아 내는 기운이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
천년호도 분명 대단했지만, 적운에는 미치지 못했다.
일정 수준에 오른 천마신공이라는 것은 천년 묵은 신수조차 찍어누를 정도로 강했다.
"하하하하하! 더 힘을 보여라! 더 쥐어짜란 말이다!"
물론, 적운에게도 상처가 없는 건 아니다.
이리저리 할퀸 상처, 흘러나온 피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날뛰는 건 단순한 무공의 영역 이상.
천마신공을 갑옷으로 두른 광기였다.
가장 천마를 닮은 소궁주, 라는 별칭은 허풍이 아니었다.
"크르르르……"
"크크큭. 꼬리를 마는 건가? 난 아직 남았다. 아직 더 싸워야지."
그 천년호가 꼬리를 말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적운이 가진 흉포함이 마침내 천년호마저 상회한 것이다.
여기까지인가.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
"……이상하다."
하지만 그때 명한은 무언가를 눈치챘다.
"명한?"
"숲 너머에서 느껴지던 불길함이 없어."
"무슨 소리야? 천년호라면 저기 있잖아."
"아니, 저게 아니야."
숲 너머에서 느껴지던 불길함은 천년 묵은 호랑이 수준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단순한 흉포함이나 난폭함의 기세가 아니었다.
매우 불길한, 혐오스럽고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이제 그만 죽어라."
"……! 멈춰, 적운!"
마무리를 위해 적운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명한은 무언가를 느끼고는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검게 내리치는 벼락과 명한의 타구봉이 충돌하는 건 거의 같은 시점이었다.
"소백!?"
핑―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히는 타구봉.
검은 기운이 번개 줄기처럼 그 위를 맴돌다 안개와 같이 사라졌다.
적운의 천마신공을 타구봉이 피뢰침처럼 흡수한 것이다.
― 크르르르…… 크아아아아앙!!!
"젠장."
하지만 늦었다.
흘러넘친 천마신공은 타구봉을 넘어 천년호를 때리기에 충분했다.
천년호의 포효에서 지금껏 느껴지지 않던 이질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뭉개지고, 뒤틀리고, 어긋난 기운이었다.
명한의 등장에 적의를 세우던 적운조차 그 이질감에 방향을 틀어 경계의 방향을 바꿨다.
"……뭐냐, 이건."
"쯧. 어쩐지 불길하더니."
머리가 반쯤 뭉개진 천년호가 비틀비틀 일어났다.
깨진 신체는 이상하게 증식된 살점이 채우고 곳곳에는 검은 돌조각 따위가 자라 있었다.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기괴한 모습이었다.
‘죽음’ 자체를 억지로 부여잡아 천년호에 쑤셔 박은 느낌이었다.
"말해라, 소백. 대체 저 괴물은 뭐지?"
"나도 몰라. 주변이 기이할 정도로 불길해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
"거짓말.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거짓말이면 굳이 나올 이유가 없었지. 너 같으면 저런 괴물하고 싸우고 싶겠냐?"
"……"
슬금슬금 몸을 일으키는 천년호.
완전히 검게 물든 눈동자에는 적아를 가리는 이성 따위는 없었다.
"적운, 도련님. 저 괴물은 불길합니다. 여기서는 물러나시죠."
"시끄러워, 한숭. 신교의 주인은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도련님……"
"나는 천마신공의 전승자다! 내게 두려움을 청하지 마라!"
한숭의 조언에도 적운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평소 한량 같고 늘어진 듯 보이는 모습은 이런 ‘광기’의 반동.
한번 발동 걸린 이상 물러나는 건 선택지에 없었다.
‘도련님의 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천년호는 지나치게 불길했다.
"그럼, 도련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소백 도련님과 협력하는 것으로 하죠."
"뭐?"
"강유 도련님께 틈을 보일 생각이십니까? 한시적으로 힘을 합치십시오."
"감히 내게 그런 유약한 선택을 내리라는 거냐?"
"하지만 도련님!"
"시끄러워!"
누를수록 튕겨 나오는 고무처럼.
적운의 반응은 꽤 격렬했다.
‘하필 이럴 때……’
한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쪽. 한숭이라고 했나?"
그때, 명한이 적운을 넘어 한숭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머저리는 맡겨 둬."
"네놈부터 죽고 싶은 거냐, 소백?"
"군림에 꿈이 없다면 덤벼 보든가. 넌 뭘 원하는 거냐? 피만 바라는 망나니? 아니면 신교를 다스릴 군주?"
"……"
"어차피 너한테 협력 따위는 바라지 않아. 내가 저 괴물을 처리할 때까지 거추장스럽게 방해나 하지 마."
아예 적운의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명한.
적운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저놈은 내 사냥감이다, 소백!"
"무리잖아. 네 천마신공을 얻어맞고 뭔가 불길한 게 깨어났다고. 저런 괴물을 상대로 네가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어?"
"닥쳐라. 내 천마신공은 천하제일이다. 상대가 누구라 해도 날 이길 수는 없어."
"그래? 그럼 어디 지켜보자. 허풍만 치는 놈인지, 아니면 제대로 천마의 힘을 잇고 있는지."
"……"
등을 보이고 선 명한.
적운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적의를 가슴에서 불태웠다.
하지만 아무리 태워도 그 불길은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다.
"방해되는 건 네놈이다."
본능이 알기 때문.
지금 이 순간에 상대해야 할 존재가 누구인지.
걸음을 옮겨 명한의 옆에 섰다.
"죽이는 놈이 승자다."
"똑똑히 알려주마, 소백. 누가 승리자인지."
일시적인 동맹이 체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