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235)

옛것의 흔적

"통과. 소백."

짧은 선언을 뒤로 명한이 걸어 나왔다.

진법의 입구가 출렁거리다, 다시 어둠으로 묻혔다.

일찍이 통과한 강유 등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흥. 생각보다 느긋하군."

"하하. 모두가 너희 둘처럼 경쟁을 하는 건 아니니까."

"시끄러워, 강유."

아니, 기다린다기보다는 서로 각을 세우는 중이었다.

경쟁 관문이 아님에도 누가 빨리 통과했는지는 꽤 중요한 내용.

가장 늦게, 여유롭게 나오는 명한이 되레 이상한 노릇이었다.

"꽤 얄팍한 수를 썼어. 아마 이 안에 있는 사람 중 하나겠지."

적운은 팔짱을 낀 채 나머지를 훑어봤다.

관문의 특이한 성질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관문을 짓밟고 온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우습군."

"시끄러워, 파운. 너야말로 난도질하면서 오지 않았나? 아니면 그 모습도 그냥 연기였나? 신기자가 뒤에서 수작을 벌인 걸지도 모르겠군."

"난 이따위 허접한 수는 쓰지 않는다."

"글쎄. 그 말대로일지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적운과 파운 사이가 달아올랐다.

"자자, 그만들 하지. 어차피 통과했으면 끝난 일 아닌가? 진법에 사소한 장난질을 쳤다고 한들, 그게 대수인가? 역량 없는 자를 거르기에 적당한 그물이었다고 보는데."

"……네 수는 아니겠지, 강유?"

"하하. 내가 짠 그물이었다면 너희가 나올 수 있었을까?"

"강유."

넌지시 끼어든 강유까지 포함해서 뜨거웠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관계였다.

"싸우고 싶으면 다들 얼마든지 싸워. 난 그만 씻고 잘 테니까."

"하. 소백, 네놈이 우리 중 가장 늦었다. 진법의 특성을 알고 기다렸던 것 아닌가?"

"내가 무슨 수로 알겠어. 이 망나니에게 능력이 어디 있다고."

"……의뭉스러운 새끼."

"정 따지고 싶으면 대전을 주관하는 대총관에게 따지든가. 쓸데없이 힘 빼지 마라."

굳이 꼬투리를 주기 싫었던 명한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나마 이들의 의심이 백리향까지 닿지 않았다는 건 다행.

‘불행이라면 의미 없는 함정이었다는 거지.’

생각보다 강유 등의 역량이 높았다.

"도련님, 저쪽에서 은단이 기다리고 있어요."

"조바심을 느끼는 건가."

살짝 이른 접선.

명한이 한숨을 삼키며 방향을 틀었다.

#

백리향의 초췌한 안색을 보며 명한은 알아차렸다.

꽤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그렇게 무모한 돌파를 할 필요까지는 없었어. 그들은 널 신경 쓰지 않아."

"……그 말이 더 화가 난다는 거 알아?"

"다독여주기를 바라면 다른 사람을 찾아."

"됐어. 앉기나 해."

별다른 대꾸 없이 명한이 맞은편에 앉았다.

어디까지나 상호 이득을 위한 협력 관계였지,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

"두 번째 관문은 전혀 효과가 없었어."

"생각보다 강유 등이 강하다는 거지. 진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어."

"그 말을 듣는다면 좋아할 사람이 있지만……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야."

"한 번에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이야. 다음 관문은?"

"영물 사냥."

백리향이 지도를 내밀었다.

출입이 제한된 신교의 특수 구역이었다.

지하 미로와는 다르지만, 천산의 영기를 받고 자란 영물들이 대거 서식하고 있었다.

"사냥이라. 진입 조건은?"

"단체. 영물의 내단을 가져오는 것이 통과 조건이다. 장소는 넓지만 얼마든지 충돌이 가능한 영역이야."

"상황이 벌어지기에 딱 맞겠네. 만마당주의 생각은?"

"천년호(千年虎)를 풀어놓을 생각이야."

천년호. 말 그대로 천 년을 산 호랑이를 일컫는다.

영물의 강함이 대부분 수명과 비례하는 걸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부르기만 영물이지 사실상 신수 등급이라는 건 당연했다.

"애꿎은 영물만 죽이겠다는 거냐?"

"그냥 영물이 아니야. 사람을 잡아먹고 마도에 빠진 마물이지."

"식인을 한 호랑이라고? 그런 놈이 멀쩡하게 천산에 자리 잡고 있을 리는 없을 텐데?"

"만마당이야. 기괴함은 그들의 몫이지. 어떻게든 잡아서 사육하고 있나 봐. 삼 관문이 시작되면 목표가 있는 쪽으로 천년호를 풀어 놓을 생각이야."

"……흠."

천년호는 분명 대단한 존재다.

신수 등급의 힘에 식인을 한 놈이라면 흉포함도 대단할 터.

뭇 고수라 해도 이를 당해낼 재간은 없다.

"하지만 상대가 그 셋이다. 천년호로 잡을 수 있어 보이나?"

"말했지. 만마당이라고. 기괴함은 그들의 장기. 내보낼 천년호는 단순히 오래 산 영물이 아니야. 제아무리 세 괴물이 강해도 호락호락 잡을 수는 없어."

"……설사 이긴다 해도 하나가 상처를 입으면 나머지가 기회를 잡겠군."

"그래. 미끼만 충분하면 상잔은 수순이야. 수를 줄이고 나머지 관문에서 처리한다."

명한은 말없이 백리향을 바라봤다.

살짝 마른 입술과 총기를 잃어버린 눈동자.

‘확실히 초조해하고 있어. 만마당의 그 때문인가?’

썩 믿음이 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할 거야, 말 거야?"

"흠. 시간과 방향을 말해라."

하지만 굳이 이를 바로잡아 줄 이유도 거를 필요도 없다.

어차피 남은 셋도 저마다의 수를 움직이고 있을 터.

설사 실패하여 깃대가 부러진다고 해도 쓸 수 있는 건 전부 쓸 뿐이다.

천마대전은 그런 장소.

명한은 기조를 확실히 했다.

#

"……그래. 알았다고 전해라."

천산 깊은 곳, 만마당.

흑의 차림의 한 남자가 부하에게 보고를 듣고 있다.

은밀히 전해진 백리향의 전언이었다.

"결국, 저 아이를 쓰게 되는군."

흑의의 남자, 만마당주 묵호주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가 보고를 받은 장소는 흑색의 묵철로 사방이 막힌 거대한 우리의 앞.

그렁거리는 숨소리가 그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

손을 뻗어 우리를 만지려는 묵호주.

― 크아아아앙!!

그 순간.

엄청난 포효와 함께 그림자 하나가 우리 앞으로 달려왔다.

그야말로 집채만 한 흑호였다.

앞발을 뻗어 묵호주를 할퀴려 했다.

철컹―!!

하지만 흑호는 사람 팔뚝만 한 쇠사슬로 전신이 묶여 있었다.

앞발은 우리에 닿지 않고 허공만 가른 채 스쳐 갔다.

"진정해라, 천년호. 네 분을 풀 시간은 충분히 주겠다."

"크르르르르……"

"나 역시 달가운 건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 방법이 아니면 우리에게 미래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묵호주는 조금은 슬픈 듯, 우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신교의 그림자 속에서 군림하는 천하의 만마당주치고는 꽤 힘없는 목소리였다.

"내게 선조와 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만마당의 시작과 끝을 달리할 역량이 있었다면 선택을 바꿀 수 있었을까?"

짧은 한숨을 머금었다.

"의미 없는 가정이겠지."

그리고 이내, 감정을 추스르며 우리 안으로 손을 뻗었다.

성난 천년호가 포효를 내지르며 아가리를 벌렸다.

앞서와는 다르게 아슬아슬하게 닿는 위치였다.

"미안하다."

와작―!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조건은 매우 간단했다.

숲에서 영물을 찾아서 그 내단을 가져오는 것.

제한 시간은 자정까지.

참가자 면면을 보자면 어려울 것 하나 없는 내용이었다.

"도련님, 분위기가 살벌해요."

"그래. 이제부터가 시작이니까."

하지만 이 내용을 단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이번 관문은 앞의 두 번과는 다르게 각 소궁의 전력이 자유롭게 부딪칠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 죽어도, 연합으로 다른 하나를 몰아쳐도 상관이 없다.

이곳부터가 진짜 천마대전임을 모두가 인지했다.

"소백. 목 씻고 기다려라."

"……끈질긴 놈."

예를 들어 명한을 노리고 있는 파운.

첫 관문에서는 강유가 말려서 그만두었지만, 이번은 다르다.

작정하고 달려들면 막을 사람이 없었다.

"후후. 도련님께서는 그저 열의가 넘칠 뿐입니다. 이렇게 마주 보는 건 처음이로군요, 소백 도련님."

이글거리는 파운 옆에서 웃으며 말을 거는 한 남자.

명한은 그 사람의 말투에서 정체를 바로 파악했다.

"신기자?"

"네. 작은 도둑 소녀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묘아를 말하는 건가. 은근슬쩍 이용해 놓고 잘도 말하는군."

"하하. 겸사겸사 움직였을 뿐입니다."

"뭘 친한 척 이야기하고 있어!"

느긋하게 대화하는 둘에 파운이 역정을 냈다.

바짝 다가와 으르렁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들어라, 소백. 이번에는 널 도와줄 사람이 없어. 이 대전에 어울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마."

"소소, 파운이 널 좋아한다더라."

"뭐?"

"뭐, 뭣!?"

서로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소백!"

"저번에 나와 만났을 때 고백하지 않았어? 너랑 어울리는 건 소소밖에 없다면서."

"크, 크윽! 그런 의미가 아니지 않나! 혈통을 말한 거다, 혈통!!"

"부끄러워하기는."

명한은 가볍게 웃으며 은소소의 손을 잡아 가까이 당겼다.

놀란 듯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혈통이든 뭐든 내줄 생각은 없어."

"뭐, 뭐 하는 거야 이 바보야?"

"가만히 있어 봐. 저 도에 미친 귀신 놈을 좀 흔들어 보게."

속삭임에 속삭임으로 답하며 파운을 도발했다.

"네놈들 설마 그런 사이였던 거냐!?"

"그건 네 알 바가 아니지. 밭 타령하며 가벼이 여기는 사람에게 내어 줄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

"그건…… 그냥 말일 뿐이다! 말! 나, 파운의 상대로 여겨지면 영광으로 여겨야지!"

"그럼 뭐 진심이기라도 한 거냐?"

"큭……!"

붉게 달아오르는 파운의 얼굴.

분노와는 다른 종류의 표정이었다.

‘이놈 봐라?’

명한의 눈이 살짝 빛났다.

"하하. 소백, 도련님께서 못 보던 사이에 장난이 많이 늘었군요."

살짝 뜨는 분위기에 신기자가 끼어들었다.

"딱히 장난은 아닌데?"

"관문을 시작하기 전에 도련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 가벼운 장난치고는 꽤 효율적인 수입니다. 도에 미치신 분답게 다른 건 조금 어수룩하거든요."

"신기자!"

"하하. 도련님, 이번에는 제게 맡겨 주시죠."

역정 내는 파운 앞을 아예 가로막았다.

붉어진 얼굴로 씩씩대기는 하나, 파운은 그런 신기자를 끌어내지 않았다.

단순한 주종관계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신기자."

"가벼운 약속입니다."

"흐음?"

"도련님께서는 포부가 웅대하고 그 재능이 하늘에 닿는 천재나, 부족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허니, 저렇게 화가 난 모습과는 별개로 이번 관문에서는 소백 도련님을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명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반겨 마지않는 말이지만 상대가 신기자.

그냥 수긍하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하하. 따로 속셈 같은 건 없습니다. 이번 관문에서는 아쉽게도 소백 도련님 쪽과 어울리기에는 저희도 바쁜 일이 생길 예정이라서요."

"그게 앞일을 내다보는 신기자의 예언인가."

"그런 어마어마한 재주 같은 건 없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멀리 바라볼 뿐이죠. 어떻습니까? 이번 관문에서는 서로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네 주인은?"

"이번 대화는 제게 맡겼습니다."

의심스럽지만 거부할 이유는 없다.

명한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좋습니다, 좋아요. 두 도련님의 대결은 더 나은 장소에서 하는 것으로 하죠."

"그때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다면."

"하하, 덕담이군요.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한 걸음 다가와 속삭이는 신기자.

"옛 황제가 검은 호랑이를 키웠다고 하더군요."

"……음?"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뜻 모를 말만 남기고는 물러났다.

"그럼, 건투를. 가시죠, 도련님."

"흥. 엄한 놈 손에 죽지 마라, 소백. 널 죽이는 건 나니까."

삼 관문에 돌입 반각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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