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235)

격의 차이

날이 밝고 두 번째 관문이 시작되었다.

각 소궁으로 내각의 인원이 파견.

관문 내용과 일시가 적힌 서신을 전달했다.

"백리향의 말대로네."

전날, 사전에 논의한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소궁 자체의 힘으로 만마당의 진법을 통과하는 거네."

"응. 이번에는 소궁주가 아닌 소궁의 전력을 시험하는 방식이야."

"그럼 같이 못 움직이는 건가?"

"아무래도 이번에는."

은소소가 조금 실망한 얼굴을 했다.

"제가 도련님을 보조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반대로 향아는 활짝 웃었다.

소궁으로 움직인다는 건 몸종인 향아도 포함된다는 의미였다.

"자세한 내용은? 강유 등을 처리할 계획이 있다면서."

"이번 관문의 관건은 어디까지나 진법의 통과. 성공만 하면 시간이든 방식이든 상관하지 않아. 하지만 알잖아. 상위권 소궁끼리 견제하는 거."

"남보다 빠르게 통과하려고 한다?"

"응. 그 부분이 핵심이야."

명한이 목패 두 개를 잡아 나란히 세웠다.

각각 ‘적운’과 ‘파운’의 이름이 적힌 목패였다.

"가장 경쟁심이 높은 둘을 나란히 출발시킬 거야. 경쟁에 불이 붙은 둘은 최대한 빠르게 관문을 통과하겠지."

"그게 문제가 되는 거냐?"

"응. 이 관문은 빠르고 격렬할수록 어려워지거든."

"만마당의 설계가 그렇다는 거야?"

"조급하면 조급할수록 상대를 옥죄는 설계야. 두 사람 능력이면 이것조차 이겨낼 가능성이 있지만, 적어도 전력 누수는 기대할 수 있겠지."

명한이 ‘마(魔)’ 자가 새겨진 목패를 적운과 파운 앞에 세웠다.

백리향의 의도대로 최후 결전까지 최대한 전력을 줄이는 계획이었다.

"그 여자의 말은 신용할 수 있는 거야?"

"백리향?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어떻게 믿어?"

"믿음이라기보다는…… 나름의 보험이 있거든. 상황이 바뀌기 전까지는 그쪽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

"뭔가 좀 의뭉스러운 답인데?"

"얘기해 봐야 괜히 의문만 더 생길 거야. 차라리 변화가 생기면 그때 언질을 줄게."

"뭐, 네가 그렇다면 그렇게 해."

판세는 꽤 얼기설기 얽혀 있다.

명한조차 딱 잘라서 이건 이렇다, 라고 말하기 힘든 상황.

최선은 그때에 맞춰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보다 혼자서 관문에 들어가는데, 괜찮겠어?"

"흥. 내 걱정은 넣어 둬. 이래 봐도 광검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무력대도 키웠던 몸이라고."

"나한테 깨진 그 인간들?"

"……하여튼! 너나 다치지 말고 통과해."

툴툴대지만 마음은 같다.

명한이 가볍게 웃으며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둥둥둥.

저 멀리서 소집의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만마당이 설치한 진법.

이런 거창한 이름을 떼고 보면 장소는 그저 평범한 숲이었다.

나무도 풀도 모두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새 지저귐이 없네."

"네, 도련님."

하지만 이곳이 괴이하다는 걸 명한은 한 번에 간파했다.

지저귐 없는 새, 나지 않는 풀냄새, 생기 없는 꽃과 나무.

모든 것이 인위적이었다.

"향아야, 눈에 보이는 걸 얘기해 봐."

"선들이 복잡하게 이어져 있어요. 흐름을 보자면…… 저쪽이 출구 같아요."

"흠. 진을 이루는 기의 흐름 자체는 크게 복잡하지 않네."

향아의 손끝을 따라 명한이 그 너머를 엿봤다.

그의 눈에도 복잡하게 이어진 선과 그 안을 흐르는 기운이 보였다.

만마당이라는 이름치고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진법이었다.

"도련님, 중간중간에 이상한 게 섞여 있어요."

"그래. 나도 보인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지하 미로에서 봤던 그 형태예요."

"일월교의 창시자, 천기자가 만든 진.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형태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뭉개서 섞어 두었어."

"쇄혼금진이요?"

"비슷하지만 달라. 이건 가두기보다는 되레 자극하는 형태야."

명한이 손끝으로 진의 기운을 당겼다.

묵혼공으로 혼을 빨아들이는 것과 흡사했다.

빛나는 선 하나가 손끝으로 당겨와 다른 선들을 흔들었다.

공간이 출렁거리고 공간에 대한 감각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도, 도련님!?"

"진정해. 진을 구축한 핵심을 건드려서 잠깐 흔들릴 뿐이니까."

선을 통해 진의 흐름이 전해졌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였다.

‘이건 굉장히 편하네. 묵혼공의 덕분인가.’

지금이라면 쇄혼금진도 한 번에 해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그러던 중 명한이 묘한 기운을 발견했다.

진을 구축한 기운 사이에 섞어 둔 작은 흠이었다.

얼핏 힘의 공백으로 느껴지기도 하나, 명한은 다른 무언가를 알아챘다.

‘왜 여기서 황제진경이 보이는 거지?’

극히 일부였지만, 같은 성질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상한 거라도 있어요, 도련님?"

"이상하다면 이상한 거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 이들 사이에 접점이 생겼으니까."

"접점이요?"

"기다려 봐."

명한은 아예 가부좌를 틀고 그 흔적을 더듬었다.

진 전체에 드문드문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꽤나 길게 필요했다.

하지만 어차피 서두를 필요가 없는 싸움이었다.

‘뭘 숨기고 있는 거냐.’

시작 지점에서 주저앉은 채.

명한은 자신만의 싸움을 시작했다.

#

"……백리향 통과!"

관문 참관인의 선언에 백리향이 스쳐 지나갔다.

전체 참가자 중 가장 빠르게 관문을 통과해서 나오는 길이었다.

대전을 지켜보던 수많은 이들이 이 속도에 놀라워했다.

"은단아, 가자."

"네, 아가씨."

하지만 백리향은 이런 분위기를 티끌만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은 이들은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걸음을 서둘렀다.

"문단속해라."

"근처에 인기척은 없습니다, 아가씨."

"그래. 그럼…… 우으으으윽!!"

그리고 문이 닫힌 걸 확인함과 동시에 속의 것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피와 음식물이 섞인 토사물이었다.

수십여 초를 쉼 없이 게워냈다.

"하아. 하아."

"이걸로 닦으세요, 아가씨."

겨우 구토를 멈추고 일어난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창백했다.

"이렇게까지 무리하셔야 했나요? 서두르면 다친다는 걸 아시면서……"

"내가 이러지 않으면 의심할 사람이 여럿이야. 파운이나 적운 같은 거물을 잡으려면 나도 다칠 각오 정도는 해야지."

"아가씨……"

"됐어. 그보다 그가 주고 간 물건은 없어?"

"아. 당주께서 남기신 물건이라면 여기 있습니다."

은단이 수정으로 테두리를 두른 거울을 끌고 나왔다.

"환요경. 그다운 수법이네."

"아가씨께서 나온 이후로 두 사람이 진입했을 거예요. 거울을 문지르고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면 그 모습이 비친다고 해요."

"일단은 강유부터 확인하지."

테두리를 손으로 문지르는 백리향.

은은한 빛이 그 위로 머물더니 어떤 상을 투영했다.

"저긴 진법의 거의 마지막 부분이네요."

"벌써 저기까지 간 건가? 나처럼 손해를 감수하고 돌파한 것으로는 안 보이는데."

"……맙소사. 저거 흑백시동이에요. 저 둘이 언제부터 강유를 모시고 있었던 거죠?"

거울 속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검고 흰 얼굴의 두 남자.

세간에는 흑백시동이라 불리는 엄청난 고수였다.

누구도 따르지 않으며 세외에 은거한 것으로 유명했던 인물인 만큼, 그 둘이 강유 휘하에 있다는 건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 있는 건 백리창, 하소음이다. 백가 창법의 고수로 한때는 군부의 장군까지 했던 인물이지."

"대체 무슨 수로 저 사람들을 영입한 거죠?"

"강유. 강유. 보통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개인의 무력을 떠나 이런 세력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일단 저자에게 피해를 주는 건 실패했다고 보는 게 낫겠군. 차라리 파운과 적운을 보자."

"네, 아가씨."

백리향이 다시 거울을 만져 장면을 옮겼다.

어딘가 엉망으로 변한 숲의 전경이었다.

"파운이에요. 근데 저곳은…… 이미 중간 지점을 넘어섰네요?"

백리향이 나오고 조금 후에 파운과 적운이 들어갔다.

즉, 지금 중간 지점이라는 의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진격했다는 의미.

속도를 그렇게 올리면 진이 옥죄게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도귀 파운. 정말로 귀신인가?"

하지만 파운은 도 한 자루에 의지한 채 달려드는 모든 것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적이 오든, 얼마나 강한 적이 오든 그의 도에 걸리면 모조리 잘렸다.

그야말로 파죽지세 그 자체였다.

"읏―!"

게다가 한순간.

파운의 뒤를 따르던 한 인물이 고개를 돌려 백리향을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마주쳤다가 떨어지는 시선.

백리향은 한기를 느끼며 고개를 뺄 수밖에 없었다.

"아, 아가씨?"

"저자가 그 신기자인가? 설마하니 당주의 물건을 꿰뚫어 볼 줄이야."

"계속 지켜보는 건 위험할 수도 있어요. 그냥 적운을 보죠."

"그래. 그 편이 낫겠어."

서늘함을 털어내기 위해 관찰 대상을 황급히 바꿨다.

이번에는 적운이었다.

"……이건 또 뭐죠?"

본래 숲이었어야 할 공간.

하지만 적운이 선 곳은 숲이 아닌 모래밭이었다.

뚜벅뚜벅 걷는 걸음 아래로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아니. 저건 그냥 걸음이 아니야."

백리향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왜 숲이 아닌 모래밭인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리고 저 적운의 걸음이 이질적인 이유도 이해했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벌써 천마신공의 후반부를 전수받은 건가."

천하제일의 무공, 천마신공.

그 어려움을 따서 초반, 중반, 후반으로 나누어 몇몇 재능있는 이가 나눠서 익혔다.

은소소가 익힌 천마검은 그중 초반부의 무공.

반면, 적운의 천마군림보는 후반의 대표적인 무공이었다.

그 위력은 걷는 곳 주변을 모조리 황폐화하는 절대적인 파괴.

진법의 부서져 모래밭이 된 것도 당연했다.

"대체 정상적인 놈이 하나가 없군. 죄다 괴물이야."

"아가씨."

"위로하지 마. 이럴 거라고는 이미 예상했었어. 그래서 어떻게든 힘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한 거야.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만마당의 당주가 만든 진법조차 신교의 괴물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서열 자체는 고작 한두 단계에 불과하지만, 백리향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저들과 자신은 격이 다르다는 것을.

"……그를 보자. 소백."

"그자는 왜요?"

"저 괴물들의 역량이 예상 위라면 협력자도 어느 정도는 받쳐줘야 해. 아니면 우리에게 승산은 없어."

거울의 상이 다시금 바뀌었다.

숲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명한의 모습이었다.

"저긴 진법의 초입부 아닌가요?"

"맞아. 시작 지점이야. 느리게 간다 해서 아예 눌러앉은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움직이지 않는 건……"

백리향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명한이 진의 형태를 알고 속도를 늦추는 건 분명 현명한 일.

하지만 앞서 괴물들의 행태를 보고 온 이상 이런 상식적인 행동은 어딘가 분에 차지 않았다.

과연 손을 잡고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의구심만 들었다.

"……어? 아가씨. 진법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응? 어디가?"

"주변 모양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씩 달라지는 거 같은데요?"

"달라지다니. 이 진법은 그런……"

종류가 아니야.

백리향을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명한이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그녀가 있는 곳을 돌아봤다.

눈이 딱 마주치고 수 초간 얼어붙었다.

파삭―!"

그리고 곧바로 거울이 깨졌다.

"아, 아가씨! 괜찮으세요!?"

"난 괜찮다. 다치진 않았어."

부스스 무너지는 파편을 보며 백리향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착각일까 싶지만, 조금 전 명한의 시선은 너무나 뚜렷했다.

부서진 거울은 더더욱.

‘소백. 소백. 너마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가 더 있다는 거냐?’

기준 이상의 강함은 반겨야 할 일.

하지만 이상하게도 백리향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가슴 언저리를 간지럽히는 불안감.

"……"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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