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는 주사위
첫 번째 관문에서 절반 이상이 떨어졌다.
필요한 영패는 하나였지만, 기회 되는 대로 수를 줄였다.
애초에 승산이 없다고 여긴 이, 굳이 모험하고 싶지 않은 이들도 재빨리 포기하고 물러났다.
사십팔궁 중 두 번째 관문으로 넘어간 건 고작 스물이었다.
"고생했어. 파운과 만났다면서?"
이 안에는 은소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큰 어려움 없이 영패를 얻어 숲을 통과했다.
"한바탕했지."
"별일 없었던 거야?"
"살짝 아슬아슬한 수준에서 강유가 개입했어. 그놈이 없었으면 둘 중 하나는 죽었겠지."
"……그게 누구인지는 확신할 수 있어?"
명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극천일무기의 깨달음을 얻었어도 파운은 강했다.
절반. 아니, 절반에 못 미치는 확률.
솔직히 강유의 개입이 고마울 따름이다.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보통이 아니네. 쉽지 않겠어."
"신교라는 마굴이 낳은 괴물들인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싱겁게 끝났으면 되레 실망했을지 몰라."
"농담은. 일단은 돌아가서 쉬자. 이 관문 내용은 숙소로 전해준대."
은소소와 명한이 나란히 숙소로 방향을 옮겼다.
어차피 시작부터 편 가르기를 막지 않은 이상 굳이 가릴 이유도 없었다.
소궁 앞까지 함께 이동했다.
"아, 도련님."
그리고 그 앞에서 향아와 낯선 인물 하나를 발견했다.
복색이 향아의 그것과 흡사했다.
"두 분 소궁주께 인사 올립니다. 소인 백리향 아가씨를 모시는 은단이라고 해요."
치맛단을 잡고 예의를 갖추는 소녀, 은단.
복색에서 짐작했든 향아와 같은 몸종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신분이 아닌, 그녀가 모시고 있는 사람.
"백리향. 네 번째 소궁의 주인께서 널 보냈다고?"
백리향.
적운에 이어 소궁 서열 4위에 존재한 인물이다.
바깥출입이 적은 터라 그 정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적다.
실제로 그의 소궁 서열이나 평가를 의심하는 사람도 많다.
"아가씨께서 소백 도련님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흐음. 갑자기 이렇게?"
"네. 주변 시선이 많으니 부득불 절 따라 사람 없는 길을 통해서 가시죠."
명한이 잠시 고민하며 은소소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정황상 백리향의 의도는 하나밖에 없다.
상위 서열에 대항해서 아래 서열끼리 손을 잡다는 것.
"가 보자. 가서 손해 볼 건 없지."
은소소가 먼저 생각을 정리했다.
"죄송합니다만, 아가씨께서 초대하신 건 소백 도련님 한 분이세요."
하지만 은단은 그런 그녀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뭐 하는 거냐. 네가 날 막겠다고?"
"감히 제가 어찌 소궁주를 막겠습니까. 다만, 아가씨께서 제게 지시한 내용은 분명하니 몸종 된바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를 수행할 뿐이죠."
"짜증 나는 성격이네."
"됐어, 소소. 혼자 오라고 했으니 혼자서 가 보지 뭐. 넌 일단 향아랑 들어가서 쉬고 있어."
명한이 울컥하는 은소소를 다독이고 앞으로 나섰다.
굳이 여기서 드잡이질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오냐, 안내해라."
이 낯선 초대가 득일지 실일지.
명한도 지금은 알 수 없었다.
#
고아한 풍취의 방이었다.
코끝을 스치는 꽃내음과 하늘하늘 흔들리는 비단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누군가 봤다면 어딘가의 기루가 아닐까 싶을 정도.
신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오랜만이네, 소백."
그 안에 치렁치렁 늘어지는 예복 차림의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길게 뻗은 눈썹과 시원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
신교 내 은소소와 함께 양대 꽃으로 뽑히는 백리향이었다.
"여전히 화려한 걸 좋아하는군."
"신교는 삭막한 곳이니까. 앉아."
손끝이 가리키는 의자에 명한이 털썩 주저앉았다.
"날 이곳까지 부른 이유가 뭐지?"
그리고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급하기는. 오랜만에 만났는데 차 한잔할 여유도 없는 거야?"
"그럴 거였으면 대전이 시작하기 전에 불렀어야지. 발등에 불 떨어진 모양새로 날 부르면 기쁘게 받아주기가 힘들잖아."
"매정하네. 그래도 어릴 때는 함께 어울리곤 했는데."
"……뭐. 그건 그렇지."
명한. 그러니까 소백은 신교의 거의 모든 것에 좋은 기억이 없다.
부친인 천마도 형제라 할 수 있는 다른 소궁주들도.
이질적인 혈통인 그를 반갑게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명.
백리향만큼은 어릴 때의 소백과 어울려 주었다.
"후후. 완전히 잊은 건 아닌 모양이네. 화단에서 숨바꼭질할 때면 항상 나한테 잡혔었잖아."
"넌 그때부터 무공을 익히고 있었잖아. 생각해보니 화나네. 아무것도 모르는 놈 이겨서 좋았냐?"
"아하하. 잡혀서 발끈하는 모습이 웃겼거든. 넌 잘 모르겠지만, 눈이 동그라질 때면 코끝이 이렇게 모이거든. 그게 어찌나 귀엽던지."
코를 씰룩거리며 웃는 백리향.
어릴 적 추억을 되짚는 모습에 명한도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머리에 남은 추억 중 즐거웠던 몇 안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작은어머니께서 그렇게 되신 후…… 다시는 놀 수 없었지."
다만, 그 웃음은 오래갈 수 없었다.
어릴 적의 추억 이후로 따라붙는 건 차가운 현실이었다.
명한의 얼굴도 굳었다.
"이 천마궁이라는 곳이 어떤 장소인지를 알게 된 것뿐이야. 아이가 아이처럼 자랄 수 없는 곳이라는 것도, 서로가 친해질 곳도 아니란 걸."
"슬픈 이야기네."
"다 지나간 일이야. 추억으로 곱씹어도 그건 변하지 않아. 그보다 본론이 있다면 이제 슬슬 꺼내는 게 어때? 이럴 상황은 아닐 텐데."
회상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명한이 분위기를 환기했다.
"하아. 그래, 알았어. 옛일을 더듬으면 그때의 네 얼굴을 또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던 거뿐이야."
"그때의 소백은 어머니와 함께 땅에 묻었어."
"……"
"본론은 얘기 안 할 셈이냐?"
"할게. 지금부터 할 거야. 너…… 이번 대전에서 나와 손을 잡자."
마지못해 나온 이야기는 꽤 뻔한 내용이었다.
"손을 잡자? 천마대전에서?"
"응. 너도 강유 오라버니나 파군 등을 봐서 알잖아. 이미 우리의 경지를 아득하게 초월하고 있어. 개개인이 붙어 봐야 승산이 없다고."
"그럼 뭐, 모여서 합공이라도 할까? 천마대전이 그런 방식이 아님을 알 텐데?"
"방법은 있어. 최후의 관문 전까지 너와 나만 남으면 되는 거야."
꽤 단적인 말에 명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난 두 번째 관문부터 다섯 번째 관문까지의 내용을 알고 있어. 이걸 이용하면 강유 오라버니나 나머지를 미리 떨어뜨리는 것도 가능해."
"네가 어떻게 관문 내용을 미리 안다는 거지?"
"천마대전의 내용은 대총관이 직접 받아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야. 하지만 중간에 하나 더 거치는 곳이 있어."
"중간에?"
"응. 관문을 위해 필수적인 사람들. 바로 만마당이야."
"만마당. 온갖 진과 기관에 전문인 사람들 말이군."
만마당은 일찌감치 지하 미로에서 명한이 언급한 적이 있다.
일정 깊이 이하를 진법으로 봉인했던 것이 만마당.
신교 내에서도 독특한 지위를 가진 이들이다.
"대전에서 소궁주들을 실험하기 위해서는 만마당의 도움이 필수적이야. 그렇기에 그들에게 각 관의 내용이 흘러 들어가지."
"그걸 네가 전해 듣는다는 건가? 무슨 수로?"
"현 만마당의 당주가 나를 돕고 있거든."
"묵호주?"
"알고 있네. 맞아. 묵 당주가 내 후견인이야."
명한이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
만마당은 신교에서 독립적인 위치인 만큼 당주인 묵호주 역시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
지금 백리향의 말은 꽤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놀란 얼굴이네. 하지만 나도 절실하기에 이런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어. 도움이 없으면 이번 대전에서 승리할 수 없으니까."
"이해가 안 돼. 넌 후계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잖아. 굳이 대전의 승리가 필요한가?"
"필요해. 난 반드시 이번 대전의 승리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어."
"필요하다고?"
"답은 해 줄 수 없지만, 내겐 절실한 이유가 있어. 그래서 너와 손을 잡으려는 거야."
"왜 나지? 굳이 날 택한 이유라도 있어?"
이 질문에 백리향은 조금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너무 고깝게 듣지는 마. 난 강유 오라버니나 파운 등은 이길 자신이 없어. 아무리 봐도 승산이 없어 보여. 하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이 너라면 도전은 해 볼 수 있을 거 같아. 그래서 너와 손을 잡겠다는 거야."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니 마음에 드네."
"너도 강유 오라버니나 나머지는 부담스럽잖아. 손을 잡고 그들을 밀어내고 우리 둘이서 마지막에 자웅을 가리자."
"……"
어디부터 어디까지나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복마전에 아군이 하나라도 있는 건 분명 큰 도움이다.
‘배신도 염두에 둬야겠지만……’
어차피 확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좋아.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아……! 고마워, 소백."
"나도 필요에 의해서 받아들였을 뿐이야."
대신 작은 보험 정도는 필요하다.
"손을 잡은 증표다."
명한이 악수를 청했다.
"응. 적어도 대전의 마지막까지 우리는 같은 편일 거야."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와 그 너머의 ‘사고’.
명한은 잠시 눈을 뇌까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하지."
보험은 꽤 그럴듯했다.
#
쾅―!!
거친 소리와 함께 바위가 부서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날려서 쉼 없이 부딪쳤다.
바닥에는 이미 튕겨서 구른 파편이 수십, 수백이었다.
부서진 바위가 하나뿐이 아니었다는 의미였다.
"도련님, 아직도 화가 안 풀리신 겁니까?"
사박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내며 한 남자가 다가갔다.
유생과 같은 복색에 백우선을 팔락이는 제갈 명이었다.
세간에서는 신기자라 알려진 인물이었다.
"고작 바위 몇 개로 분이 풀릴 것 같아?"
"그리 역정이 나신다면 저 산이라도 무너뜨려 보시지요."
"날 놀리려고 온 거냐?"
"후후, 설마요."
으르렁거리는 파운의 옆으로 가볍게 섰다.
피부가 따끔할 정도의 기세를 내뿜고 있었지만, 제갈 명은 익숙한 듯 보였다.
"제가 일찍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결전의 날이 아니라고."
"강유 그놈의 방해만 없었어도 목을 땄을 거다."
"그 또한 하늘의 뜻이겠지요. 아직은 그와 목숨을 걸고 싸울 때가 아닙니다."
"빌어먹을 하늘! 네가 말한 그 시기라는 건 대체 언제 오는 거냐!?"
쾅.
휙 집어 던진 도가 벽에 박혔다.
제갈 명은 그 모습을 눈으로만 가볍게 훑고는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동요 없는 모습은 확실히 범인의 것이 아니었다.
"점괘가 나왔습니다. 북극성이 반짝이니 별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자세하게 말해봐라."
"만마당의 죽은 용이 수를 두었습니다. 성공한다면 승천의 기회를 잡겠지만, 아니라면 되레 먹히고 말겠지요."
"만마당의? 네가 말한 그 사문의 인물 말인가?"
"네. 제갈가를 나와 정처 없이 떠돌던 저를 거둬주신 분들이지요. 생각이 달라 갈라지기는 했으나, 잊을 수야 없습니다."
제갈 명은 가볍게 웃으며 부서진 돌무덤에 걸터앉았다.
"만마당의 행보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냐?"
"반반입니다. 제 점괘로도 그 너머의 모습은 엿볼 수 없더군요. 사형께서 가려 두었던지, 아니면 아직 적히지 않은 내용일지도 모릅니다."
"쯧. 선문답하고는. 내가 할 일을 말해봐라."
"선택이 고민될 때, 제가 드린 이 주머니를 열어보시면 됩니다."
제갈 명은 ‘택(擇)’이라 적힌 주머니를 파운에게 건넸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말해주지 않고?"
"제가 누차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천기를 누설하면 천벌을 받는다. 흥. 알았다, 알았어."
품 안에 주머니를 쑤셔 넣는 파운.
제갈명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미 주사위는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나올지는 하늘만이 아시겠지요. 하지만 소인 제갈 명. 도련님께서 승자가 되어 영광을 차지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어차피 너와 네 사문 사람들은 우리 모두를 장기판 위의 졸로 보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명심해라. 판을 휘젓는 자는 결코 판 위의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걸."
"후후, 명심하겠습니다."
"흥."
뽑았던 도로 손을 뻗는 파운.
파르르르 떨리던 도가 휙 뽑혀 나와 그의 손안으로 들어갔다.
허공섭물의 절기였다.
"최후의 승자가 되는 건 나다."
파운의 목소리에는 한 점의 의심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