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돌
파운과는 이미 악연이 있다.
소림사의 사건에서 배후자로 활동하는 것이 바로 파운이었다.
붉은색 도찰령을 쥔 이들을 움직여 악무군 등을 제어하고 전쟁의 불씨를 틔웠었다.
명한의 개입으로 상황은 수습됐지만, 가슴 서늘했던 일임은 부정할 수 없다.
"신기자가 말하더군. 이쪽으로 가면 널 만날 수 있다고."
"하. 나도 그런 사람 하나 옆에 두고 싶네."
"네놈 그릇에 품을 사람이 아니다."
"거, 악담은."
명한이 파운과 거리를 두고 섰다.
가까이서 얼굴을 맞대고 서보니 그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피부로 와닿았다.
‘화경을 넘어선 것 아닌가?’
솜털이 서고 피부가 찌릿할 정도였다.
"그보다 한 가지…… 좀 물어보자."
"죽기 전 유언이라면 들어주지."
"왜 날 쫓은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날 노릴 이유는 떠오르지 않아. 강유나 적운이면 모르겠지만, 당시의 나는 네 눈 밖 아니었나?"
"흥. 몇몇 패를 움직이는 과정에 네가 엮였을 뿐이다. 내가 네놈 따위를 그렇게 중시했을 것 같나?"
"이 마당에 거짓말은 하지 말자고. 네 수들은 모두 감정이 실려 있었어. 뭔데, 그 이유가?"
모든 기억을 다 뒤져봐도 파운과는 접점이 없다.
뭔가 뒤틀린 거라면 명한은 알아야 했다.
"……은소소."
"응?"
"은소소 말이다! 은소소! 어째서 그녀가 네놈과 함께 움직이는 거지?"
명한이 잠시 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눈만 깜빡였다.
"은소소. 그러니까 우리 누이인 소소 말이지?"
"흥. 네놈이 아는 걸 내가 모를 것 같나? 은소소는 우리와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 그녀의 부친은 무당의 장문인 막천우. 한때 무당제일검이라 불리던 인물이다."
"그것도 신기자의 실력인가?"
"그래. 내 물음에 대한 그의 답이기도 하지."
"물음이라니?"
"나, 도귀 파운의 씨를 품어줄 계집. 월익 부족의 고귀한 혈통을 아무에게나 잇게 할 수는 없다. 무당제일검이라 불린 막천우의 딸이라면 좋은 밭이 되어주겠지."
명한이 다시 한번 말을 잊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신교의 순위 다툼이나 후계를 위한 암계.
혹은 중원을 둔 대계의 일부라 생각했었다.
헌데, 자신의 배필로 은소소를 점지했기 때문이라니.
"하. 나도 가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잊곤 한다니까."
"무슨 소리냐."
"이런 시국에 잘못 말하면 큰일 나는 그런 주제가 있어. 네놈은 죽어도 모르겠지만."
"감히 내게 장난질인가, 소백?"
슥, 도를 들어 올리는 파운.
점점이 가열되는 기세가 용암처럼 뜨거웠다.
"도 치워 새끼야. 화는 내가 내야지. 네놈이 뭔데 감히 소소를 두고 밭이니 뭐니 지껄여? 소소가 그런 취급 받아도 좋을 여자 같냐?"
"제정신이 아니군. 밖에서 힘을 길렀다고 네놈 따위가 내 도를 받아낼 수 있을 것 같나?"
"그건 해봐야 아는 일이지. 이쪽도 나름 아등바등 힘을 키워 왔거든."
명한도 타구봉을 뽑아 자세를 취했다.
눈앞의 상대는 권왕 수준.
아니, 어쩌면 그보다 윗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만 쳐서는 이 수라도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배에 힘 딱 주고 기세를 끌어 올렸다.
"덤벼."
도와 봉이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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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은 신교의 근본인 다섯 가문 중 ‘월익’의 후계.
정식으로 평가받은 신교 10강 중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 도법은 이미 10대에 팔반으로 하여금 ‘천하제일도가 될 재질이다.’라고 인정을 받은 바 있다.
천재 중의 천재.
도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간이었다.
"사지를 잘라 개의 먹이로 주마."
월익 부족의 독문무공, 월광도법(月光刀法)이었다.
도광에 의해서 그려지는 달의 형태가 만월에 가까울수록 그 경지가 깊다고 한다.
파운의 도격은 그야말로 꽉 찬 만월.
도가 사위를 가득 채우며 명한을 옥죄였다.
"반야의 눈은 삼라만상을 꿰뚫는 법."
세상을 가득 채운 달빛을 명한의 눈이 꿰뚫었다.
삼라만상을 관통하는 반야의 지혜가 그 궤적을 선명하게 새겼다.
손끝의 타구봉으로 이 궤적을 하나하나 전부 쳐냈다.
깨지는 유리처럼 달빛이 부서져 은색으로 내려앉았다.
사선 위의 아름다움이었다.
"……소림의 재주."
"말했잖아. 나도 아등바등 배운 게 있다고."
타구봉이 달빛을 휘감아 하나의 날로 영글었다.
점에서 점으로 관통하는 찌르기였다.
바람이 찢어져 커다란 구멍을 남기고 후폭풍이 그 안으로 쓸려 들어갔다.
파운은 이 강렬함에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제자리에 서서 도를 일자로 그었다.
월광을 담은 창이 그대로 쪼개져 이(二)자로 땅을 할퀴었다.
"불쾌하군. 감히 네놈이 내 힘을 이용해?"
"월익의 도가 그리도 강하다고 하던데. 시늉이라도 내 봤어."
"건방진 새끼. 네놈은 형체도 남기지 못할 거다."
"말로는 부족하지 않겠어?"
"죽여주마."
파운의 기세가 다시 한번 폭증했다.
가까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찢겨나갈 것 같은 기세였다.
권왕의 진심이 무거운 추였다면 이건 그야말로 ‘도’.
도신합일.
물아일체의 경지였다.
‘어마어마하군. 그야말로 살아있는 도.’
그 완벽함에는 명한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순수함은 막천우의 검에서도 보지 못했다.
"나도 어설프게 상대해서는 안 되겠지."
명한도 곧바로 극천일무기를 끌어 올렸다.
지독하게 파괴적인 기운이 몸 안을 휘감아 밖으로 그 형태를 표출했다.
파괴, 폭력, 죽음 따위가 형상화된 기운.
그야말로 마인, 그 자체였다.
"……대체 뭐냐, 그건."
"죽음."
말끝이 허공에 남아 흐려지는 순간.
명한이 지면을 밟으며 거리를 좁혔다.
세 족장, 타구봉이 닿는 한계 지점이었다.
가속에 극천일무기가 더해진 찌르기가 공간을 파하며 날아갔다.
주변 형태가 잠시나마 그 위력에 뒤틀리기까지 했다.
‘시건방 떨지 마라.’ 파운은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어떤 준비 자세도 없이 도를 한일자로 그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도가 그은 선이 자연에 존재한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 카앙!!
한 박자 늦게 들려오는 충돌음.
접점이 뭉개지며 나선 형태로 주저앉았다.
수풀도 돌도 그 주변의 나무도.
모조리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 힘에 휩쓸려서 뭉개졌다.
―캉! 카캉! 캉!
그 위로 연이어 들려오는 충돌음.
먼지와 파열의 충격이 다 가라앉지 않았음에도 멈춤은 없었다.
도의 선이 공간을 도륙내며 그 위를 봉의 궤적이 비틀고 찔렀다.
한 획, 한 획이 천지를 울리고 그 충돌은 숲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그야말로 초절한 공방이었다.
"알량한 수만 늘었구나!"
"그 수를 뚫지 못하는 것은 어디의 누구지?"
같은 시기에 호흡을 정돈하고, 다시 달려들었다.
수십, 수백, 수천 합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지나갔다.
도격과 봉격에 휩쓸린 숲은 이미 초토화된 지 오래.
둘이 지나간 곳은 오직 파괴만이 남아 처절하게 버려졌다.
"오늘 반드시 네놈을 이곳에서 묻어야겠다."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파운이 도를 고쳐 쥔 순간.
마치 세상의 흐름이 그를 중심으로 도는 듯, 기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명한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파운이 숨기고 있는 ‘절초’임을 감지했다.
절대의 고수라면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 하나씩은 감추고 있는 그런 기술이었다.
"네놈이 이 정도로 성장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결심이 선다. 네놈은 반드시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먹색으로 변하는 파운의 도.
순간 주변의 색이 사라지고 백과 흑의 공간이 드리워졌다.
단순히 기운을 뻗어 막을 치거나 물건을 베는 경지가 아니었다.
이것은 ‘나’에서 시작한 기운이 ‘밖’에 영향을 미치는 경지.
그 경지가 현묘하다 하여 ‘현경’이라 불린 힘의 단편이었다.
"……하. 까딱하면 죽겠네."
명한도 이를 경시하지 못했다.
흑백의 세계 속 오롯이 존재하는 파운의 도.
명과 암 사이에 경계가 존재하듯, 그의 도는 어떤 것이라도 경계 지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천지를 양단하는 일격이었다.
삼라만상을 관조하는 반야의 지혜도 이것은 파할 수 없다.
‘내 재주로는 이것을 막지 못해.’
배운 재주를 모두 떠올려 봐도 막는다는 상상이 안 됐다.
그려지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
―――쿵.
그래, 오롯하게 죽음의 찰나.
순간의 파괴를 먹고 사는 괴물이 극천일무기.
어째서 그 파괴는 남의 것만이 되어야 할까.
자신의 파괴 역시 집어삼켜 파멸과 죽음을 내리면 그만.
무언가 명한의 심상(心狀)으로 내려앉았다.
제대로 된 형태조차 갖추지 않은 어떤 기괴한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극천일무기의 본질.
웅……
명한의 몸 전체가 검붉은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흑백의 양단된 세계를 집어삼킬 폭군의 기운이었다.
"……!"
"……!!"
하지만 두 기운이 충돌하기 직전.
거의 같은 순간에 파운과 명한이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한 자루의 검이 날아와서 박혔다.
"강유!! 무슨 짓이냐!?"
일군, 강유의 애검 ‘화홍(化紅)’이었다.
"하하. 대전이 이제 막 시작됐는데, 벌써 끝을 보려는 건가? 두 사람이 그렇게 충돌하고 나면 이 좋은 숲이 다 뭉개질 것 아니냐."
"네놈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아니면 와서 네가 내 도를 받아 볼 셈인가?"
"그것도 재미있는 여흥이긴 하겠지."
"……큭."
시종일관 여유로운 강유.
파운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명한과의 싸움에서 낭비한 기운이 적지 않았다.
애초에 승산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
이 상태에서는 백전백패였다.
"후후. 소백 아우도 무기를 내려놓지 그러나."
"후……김빠지는군."
"아직 무대는 많아. 벌써 그렇게 죽자 살자 싸울 이유는 없지."
명한도 타구봉을 돌려 허리춤에 매며 기운을 다스렸다.
손해 본 건 파운과 마찬가지였으나, 마지막에 좋은 깨달음 하나를 건졌다.
수습하면 손해는 아니었다.
"두 놈 다 반드시 쳐 죽여 주마."
파운은 이를 갈며 물러났다.
그로서는 상당한 굴욕이었지만, 무모함에 날뛸 인간은 아니었다.
이내,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강유와 명한만 남게 됐다.
"자, 슬슬 말해보는 건 어때?"
"응? 뭘 말이지?"
"이유 말이야. 나랑 파운이 공멸하면 그쪽에는 좋은 일 아닌가? 왜 우리의 싸움을 중도에 막아선 거지?"
당연한 의문이었다.
적수 둘이 공멸하면 삼자인 강유에게는 최고의 흐름.
막을 이유가 없다.
"말하지 않았나. 아직 무대는 많다고. 이런 곳에서 두 사람이 공멸하는 건 바라지 않아."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하하. 자신감이 아니라네, 소백 아우."
강유는 검을 뽑아 검집에 넣으며 뒷짐을 지었다.
부서진 숲 사이로 햇빛이 떨어져 그를 후광처럼 비췄다.
마치 이 땅에 존재하는 주인과 같은 느낌이었다.
"소백 아우도 파운 아우도. 그리고 여기 없는 적운이나 다른 아우님들도 힘을 내서 이번 천마대전을 빛내 줘야만 하네. 그래야 나 강유가 옥좌에 올랐을 때, 그 정당함이 빛나지 않겠나?"
"……"
"이야기는 그래야 옳지. 안 그런가, 아우?"
자신감. 아니, 지독한 오만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주인공을 빛내기 위한 조연일 뿐이라는 사고.
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이가 강유라면……
놀랍게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딴 이야기. 아무도 안 사."
"하하하. 그건 두고 보자고, 소백 아우."
웃음을 남기며 사라지는 강유.
누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