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235)

첫 번째 관문

주변이 조용해졌다.

벌레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한 남자가 가로질렀다.

조용히 울리는 발걸음 소리만이 그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천마."

그가 단상 끝에 걸음을 세웠을 때.

이미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천지간의 인과도 모든 행운과 불행도.

오롯이 그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전보다 더 강해진 거 같잖아. 대체 뭘 어떻게 하는 거지?"

은소소가 입술을 꽉 깨물며 이 흐름에 저항했다.

과거, 천마검을 전수받을 당시의 천마와 지금의 천마는 격이 달랐다.

아예 인간을 벗어나 신의 경지에 발을 들인 것 같았다.

"이게 하늘 아래 적수가 없다는 천마인가."

명한도 깊은 호흡으로 겨우 지배력에 저항했다.

커다란 그림에서 귀퉁이를 떼어내듯, 한 걸음 물러났다.

이건 그와 은소소만이 아니었다.

‘강유, 파운, 적운. 그리고 소수인가.’

장내의 인물 중 소수만이 이런 지배력에 저항했다.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시험.

"부족하군."

순간, 천마의 입이 처음으로 떼였다.

나직한 울림이 파동의 형태로 주변을 훑었다.

앞서 저항했던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기도 무엇도 아닌 단 한 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괴물이군.’

명한은 천마의 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때 호적수로 싸웠다고 알려진 악불군보다 훨씬 위.

이미 당시의 경지를 아득하게 초월하고 있었다.

"싸워라. 그리고 이겨라. 승자만이 독식할 뿐."

쿠웅―!

천마는 한마디를 남기며 바닥에 발자국을 새겼다.

천마대전의 단순명료한 목적이었다.

발자국을 따라가 승리하는 자만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승자독식의 방식.

천마다운 짧고 굵은 선언이었다.

"패배자는 필요 없다."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사라지는 천마.

그의 존재가 지워짐과 동시에 사위를 압도하는 분위기도 씻은 듯 사라졌다.

쓰러졌던 이들 역시 분분히 일어났다.

하지만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 하하하하! 간단명료해서 좋군!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이게 본래의 신교였지!"

포문을 연 것은 도귀 파운.

그는 맹렬하게 투기를 내뿜으며 천마가 남긴 발자국을 향해서 다가갔다.

"그 걸음, 잠깐 멈추지?"

"적운. 지금 여기서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못 할 것도 없는데."

그 앞을 막아서는 건 적운.

두 사람 사이로 엄청난 투기가 몰아쳤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서열 2위와 3위가 생사결을 벌일 판이었다.

"그만. 아버님께서 만드신 여흥을 그렇게 날려서야 쓰겠나."

하지만 이 투기는 강유의 개입으로 씻은 듯 사라졌다.

경지에 이른 두 고수 사이를 제집 드나들듯 가볍게 거닐었다.

적운과 파운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속셈이지, 강유? 천마가 남긴 의도는 분명하다. 싸워서 이긴 자가 승자가 될 뿐이다."

"하하. 마도의 가치를 내가 어찌 거부할까. 다만, 몇 년 만에 열린 대전의 승부를 그렇게 멋없는 방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을 뿐이야."

"멋이라. 과연 일군 강유다운 말이로군."

"천마대전은 신교 전체의 축제이기도 해. 싱겁게 끝나면 뭇 교인들에게 면목이 없지. 안 그런가 대총관?"

강유는 도발적인 언사를 부드럽게 흘리며 누군가를 지명했다.

천마궁 대소사를 관장하는 대총관, 마윤걸이었다.

"큰 도련님께서 제 역할을 대신해 주시는군요."

"대총관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을 뿐이네. 자, 본래의 대전을 설명해 주겠나."

"감사합니다, 큰 도련님."

자연스럽게 중심이 마윤걸로 넘어갔다.

좌중을 장악하며 이야기를 쥐고 흔드는 강유의 능력이었다.

투기를 불태우던 파운도 적운도 이 마당에 다짜고짜 싸울 수는 없었다.

구겨진 얼굴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대전은 일주일에 걸쳐서 진행됩니다. 하루에 하나의 관문씩. 개별적으로 혹은 단체로 이를 극복하는 형식입니다. 시간을 초과하거나 큰 부상. 혹은 죽으면 탈락으로 간주됩니다."

"중도에 포기할 방법도 있나?"

"네, 큰 도련님. 도무지 어렵다고 생각되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도 가능합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재도전할 수 없으니 염두에 두시기를."

몇몇 소궁주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욕심 없이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다섯 관문을 넘어서면 통과한 인원을 바탕으로 대전을 시작합니다. 이때는 신교의 모든 장로 팔반의 어르신들도 참관한 상태로 진행됩니다."

"그렇게 이틀인가? 마지막 날에 승자를 가리고?"

"네. 최후의 1인이 나올 때까지 대결을 지속. 승자는 천마대전의 모든 권한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대총관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이번 대전의 승자는 공식적으로 신교의 후계자로 지목됩니다."

"후, 후계자라고!?"

"공식적인 후계 선정이라는 건가?"

"후계라니."

물 위로 번진 파문처럼 웅성거림이 번졌다.

지금껏 천마대전이 벌어지기를 수 번.

한 번도 공식적인 후계 선정은 없었다.

암묵적 1위와 공식적인 1위는 다른 법.

이번 대전이 신교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리라는 것을 모두가 인지했다.

"크…… 크흐흐. 크하하! 잘됐군. 차라리 잘됐어! 그동안 지지부진하게 서열 놀음하는 것도 지겨웠던 차다. 이번 기회에 누가 이 신교의 후계자인지 확실하게 정해 보자고!"

"재미있겠네. 승냥이들도 이번에는 계속 숨을 수 없을 테고. 확실히 재미있는 축제가 되겠어."

파운이나 적운처럼 아예 호기를 드러내는 이들도 여럿.

"젠장, 후계자라니.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이번에 도전했다가는 목이 날아갈 판이야."

"소궁 서열도 휴지 조각이 되는 거 아니야?"

두려움을 드러내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소백, 어떻게 생각해?"

"달라지는 건 없어. 어차피 전부 넘어서야 할 산들. 조금 더 거칠고 극적일 뿐이야."

"후우.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 사이에서 명한은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후계 선정은 지금이 아니야.’

지금 흐름이 본래의 것이 아니더라도.

"그럼 천마대전의 첫날. 첫 번째 관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

관문에 관한 내용은 내각 인원에 따라 각 소궁으로 배포되었다.

"영패 탈취인가."

장소와 내용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천산 중턱, 널리 분포된 숲에서 합격을 위한 영패를 손에 넣는 방식이었다.

형식은 어디까지나 개인전.

하지만 암묵적인 동맹과 협조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번 건 소궁주만 참여할 수 있네. 향아야 넌 대기해야겠다."

"으윽. 그렇게 열심히 수련했는데……"

"기회가 또 있을 거야."

관문의 형식상 향아는 참여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소궁주들 개개인의 역량을 보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아쉬워하는 향아를 달래고 정해진 곳으로 이동했다.

널리 퍼진 숲의 입구에 이미 수십의 사람이 집결해 있었다.

"시간은 자정까지. 지금 나눠 가진 영패를 포함, 두 개를 마련하지 못하면 탈락으로 간주됩니다."

"흥. 한 놈만 처리하면 된다는 건가? 너무 쉽군."

"영패의 양도 역시 가능하니, 이 점도 활용하시기를."

마지막 말로 도장을 찍었다.

개인전이지만 단체로 묶이면 얼마든지 강자를 떨어뜨릴 수 있는 방식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세력이 약한 소궁이 불리한 조건.

하지만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힘의 균형에서 ‘세력’ 역시 하나의 지표로 작동하고 있었다.

앓는 소리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패를 받은 소궁주들께서는 차례대로 입장하셔도 좋습니다. 내각에서 호각 소리가 들리면 그때부터는 자유롭게 쟁투가 가능합니다."

"크크큭. 이왕이면 큰 놈이 걸렸으면 좋겠군."

"……상위 서열은 피하자고."

"기회를 봐서 진입하자."

각자의 생각과 계획대로 진입 순서가 갈렸다.

자신만만하게 선두에 서는 건 역시 상위 서열의 강자들.

나머지는 뒤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낄 자리를 구별해야지."

"소문대로의 실력자인가? 아니면 그냥 머리가 멋이 간 건가."

"상위 서열 바로 뒤라니. 천마궁 망나니가 미쳤군."

그리고 명한은 강유 등의 뒤를 바짝 쫓아서 입장했다.

수많은 목소리가 뒤를 따라왔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첫 번째 관문.

이런 곳에서 떨어지려고 아등바등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

명한은 숲길을 걸어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멀지 않은 곳에 따라 들어온 소궁주들의 기척이 여럿이었다.

일부는 명한을 노리는 기색까지도 보였다.

앞서 들어간 이들은 건드릴 수 없으니, 그나마 사십팔궁 말석에 있는 그를 노리려는 것이다.

"소소와 떨어지자마자 이런 취급이군."

그 바탕에는 은소소가 있었다.

기존에 퍼진 명한의 소문에는 ‘은소소가 개입되어 있다.’라는 말이 섞여 있었기 때문.

개별전이라는 명목으로 은소소가 따라 갈라져 들어오자 명한이 더욱 만만해 보인 것이다.

"뭐, 크게 상관없겠지."

명한은 나무 둥치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는 아예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수십의 눈이 자신을 노려도 그 안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고수의 자세였다.

휘이익―!

이내, 숲 전체로 호각 소리가 퍼져나갔다.

관문의 시작이었다.

"먼저 잡는 놈이 임자다!"

"물러나! 내가 먼저 찜했어!"

거의 동시에 소궁주들이 명한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승리 조건은 자신을 포함한 영패 두 개.

한 명만 잡아서 빼앗으면 첫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나름의 발버둥은 이해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야."

명한은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라 타구봉을 휘둘렀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일격에 가장 앞선의 소궁주가 면상째로 지면에 처박혔다.

방어를 위해서 검을 들어 올렸지만, 통째로 뭉개졌다.

아주 단순한 힘의 압도.

뒤따라 오던 이들이 그 모습에 순간 움찔했다.

"떨어질 놈들은 미리미리 떨어지자."

하지만 그걸 내버려 둘 명한이 아니다.

큰 걸음으로 땅을 밟고 타구봉을 고속으로 찔렀다.

엉거주춤 서 있던 두 놈이 동시에 복부를 얻어맞고는 나가떨어졌다.

반응조차 하지 못할 쾌속한 찌르기였다.

"커. 커억. 네, 네가 어떻게!?"

"고작 사십팔궁에 불과한 네놈이 어떻게 이 정도로 강한 거야!?"

"귀를 열어두지 않고 살 거면 눈치는 있어야지."

탄력을 받고 손아귀로 돌아온 타구봉.

명한이 그대로 핑그르 돌려서 다시 한번 소궁주들의 얼굴을 후려쳤다.

반격이라도 한 번 할까 싶었지만, 이들에게 그 정도의 역량은 없었다.

피와 이빨을 쏟아내며 기절했다.

"흥. 이제야 눈치를 보나?"

명한이 순식간에 셋을 쓰러뜨리자 주변 기척이 빠르게 멀어졌다.

만만히 보고 접근하던 이들이 아닌 걸 판단하고는 도망친 것이다.

어디까지나 이건 사십팔궁의 말석들이 살아남는 법.

어떻게 영패 하나둘을 얻어도 곧 무너질 이들이었다.

‘어차피 이놈들에게는 관심 없어.’

첫 번째 관문의 승패는 다른 곳에 있다.

"큭큭. 실력은 좀 늘었나, 아우?"

"……파운."

고수와의 대결이 있는가.

첫 관문부터 파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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