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대전으로
연무장 한가운데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누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겨우 된 거죠?"
"그래. 더는 하라고 해도 할 힘이 없다."
"죽을 거 같아……"
향아, 명한, 은소소였다.
셋 모두 일월배심경을 통해 투영한 그림자와의 사투를 끝냈다.
결과는 제각각이었지만, 하나는 같았다.
죽을 만큼 힘들어서 더는 못 하겠다는 것.
"내일이 천마대전 시작인데 두 분 괜찮으시겠어요?"
"푹 쉬고 나면 괜찮겠지. 약으로 탕을 만들어서 원기부터 회복하자고."
"제가 준비할게요."
"너도 쉬어야지. 성성아, 가서 물 좀 올려주겠어?"
"크릉?"
"널 끓이지는 않거든? 부탁할게."
성성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러났다.
영물을 누가 하인처럼 쓰냐고 묻거든 명한이었다.
"그보다, 소백. 내일 말이야. 자신은 있어?"
은소소가 살짝 뜸을 들인 뒤 물었다.
"자신이라면 언제나 있었지."
"상대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 거야. 파운이나 적운. 나형은 둘째 치고 부동의 일 위인 강유도 있어. 누구 하나 만만하게 볼 사람이 없어."
"알다마다. 내가 천마궁을 떠나서 지금까지 뭐를 위해서 힘을 키웠겠어. 대전에서 이 인간들에게 안 죽기 위한 발버둥이었다고. 뭐, 궁곡이라는 적수 하나는 일찍이 치워뒀지만."
"그럼 남은 이들도 상대할 비책이 있는 거지?"
명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앉았다.
비책이 있냐고 묻는다면 답은 여러 개.
하지만 그 모든 답이 확실하냐고 묻는다면 끄덕일 수는 없었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던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했어. 나머지는 하늘에게 맡기자고."
"쉽지 않다는 얘기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게 어디 있겠어. 최선을 다하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면 하늘이 응해줄 거다. 그런 믿음으로 사는 거지."
"후후. 네 입에서 하늘 운운하니 우습기는 하네."
은소소도 자리에서 일어나 명한과 어깨를 맞대고 앉았다.
오래전, 그를 찾아 주먹을 맞대고 흐른 시간이 얼마일까.
묘한 감흥이 가슴 언저리를 간질였다.
"도련님은 반드시 원하는 바를 이룰 거예요. 저도 미천한 목숨이지만, 그걸 위해 바칠 각오는 돼 있어요."
향아도 한마디 거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미천하기는 누가 미천하다는 거냐. 너나 나나 여기 있는 소소나. 아니, 저 높은 궁에서 바라보고 있을 천마나 모두가 같아. 하늘 아래 발붙이고 사는 이들에게 위아래는 없어. 모두가 자신만의 것을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거지."
"도련님……"
"그러니 너도 날 위해 목숨 바치기보다는 네 것을 찾아라."
"네……"
향아가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제 목표는 도련님인걸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정해둔 것이 있었다.
"자자, 궁상맞은 이야기는 그만하고 씻으러 가자."
"도련님 제가 등을 밀어드릴까요?"
"어딜 가. 넌 나랑 씻자, 향아야."
연무장 저편,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
세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천마대전 하루 전.
마지막 정비였다.
#
이른 아침.
천마궁 전역으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각에서 파견된 인물들은 소궁을 개별적으로 찾아, 한 가지 소식을 전달했다.
천마대전의 시작.
모든 인물이 집결하라는 내용이었다.
"시작이군."
명한 일행도 짐을 챙겨 내각의 안내원을 따라갔다.
작은 물길이 합쳐서 강이 되듯, 소궁의 길이 한곳으로 모여 중앙궁으로 이어졌다.
신교의 큰일이 있을 때면 사람을 소집하는 장소였다.
수십, 수백의 인원이 북적거리며 한곳에 모였다.
"많네."
"많지. 이럴 때 아니면 서로 어울리는 일 없는 이들이니까."
일궁부터 사십팔궁까지 모든 인원이었다.
수발하는 하인과 몸종을 더하면 그 숫자는 몇 배였다.
익숙한 얼굴도 있고 낯선 얼굴도 있었다.
"이렇게 보는 건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음? 아, 미윤."
슥, 다가와 말을 건 건 사십칠궁의 미윤이었다.
소궁 순위에서 알 수 있듯이 큰 세력이 있거나 무공에 재능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탓에 과거 소백과는 몇 번 교류가 있긴 했다.
개차반인 성격 탓에 큰 인연까지는 아니었지만.
"난 이번 대전에서도 숨어 있으려고. 소백, 넌 어떻게 할 거야?"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해 볼까 하는데. 넌 밖의 소식은 전혀 안 듣고 사냐?"
"으, 응. 난 소궁에서 그림이나 그리고 사는 게 편하거든. 싸움 같은 건 나랑 안 맞잖아."
"그래. 그렇다면 이번 대전에서는 확실하게 숨는 편이 좋을 거야. 이전의 대전보다 훨씬 격하게 붙을 거 같거든."
"정말?"
큰 눈을 깜빡이는 미윤의 얼굴에서는 어떤 의문도 없다.
수많은 괴물이 서식하는 천마궁이지만, 이런 사람도 있다.
"내 말 믿어. 어설프게 숨어 있으면 휘말리기 쉬워. 숨을 거면 아예 모습도 드러내지 마."
"응. 알았어, 네 말 믿을게. 근데, 소백. 너 좀 달라진 거 같다?"
"한창 자랄 나이라서."
의뭉스러운 미윤을 보며 명한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설명하자면 너무나 긴 이야기였다.
"아, 아앗! 저기 상위 궁의 궁주들이 모이고 있어."
중앙궁 한쪽이었다.
일궁부터 십궁 사이, 유력 소궁주들이 한곳에 모였다.
소궁 순위가 의미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 손에 꼽히면 유력자인 건 맞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봐봐, 소백. 혼재, 적운이야. 폐관 수련을 마치고 얼마 전에 돌아왔데."
"듣기로는 천마신공을 전수받았다고 하던데?"
"진짜? 폐관 전에도 강했는데, 이젠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멀지 않은 곳에서 온갖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대전의 승리자로 유력한 몇몇에 대한 거라면 천마궁 전체가 주시하고 있기에 소문이 빨랐다.
"혼재 적운이라."
명한도 소리를 따라 무리의 한 인물을 바라봤다.
천마를 가장 닮았다고 알려진 남자였다.
멀리서 봐도 알아볼 정도로 큰 키에 수려한 외모.
어딘가 여유로움이 잔뜩 묻어나는 기색을 가지고 있었다.
‘척 봐도 보통내기가 아니군.’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아니었다.
발톱을 감추고 있는 맹수의 모습이었다.
"오, 옆에는 도귀 파운이다."
"듣기로는 실전되었던 오호단문도를 부활시켰다고 해."
"실전된 지 오래 아니었어?"
"그러니까 더 대단하지. 자신의 역량으로 실전된 무공을 복원하고 개량시켰다는 거니까. 도에 한해서는 겨룰 상대가 없는 수준이라고 해."
"대단하네. 역시 소궁 삼재(三材) 중 하나인가."
그 옆에서 거론되는 건 한 번 얽힌 적 있는 도귀 파운이었다.
오른팔로 신기자를 거느리고 큰 판으로 명한을 괴롭힌 이력이 있다.
중간에 물러나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명한의 판세를 뒤흔든 인물이었다.
도에 관해서는 신교 제일.
채 서른이 안 된 나이에 이미 그런 평가를 받고 있다.
‘적운이 발톱을 숨긴 맹수라면, 파운은 그냥 맹수네.’
거칠게 풀어헤친 머리카락에 감추지 않는 기세.
들판에서 맞닥뜨린 대호가 이런 모습일까.
심과 기가 부족한 이들은 감히 그의 얼굴조차 바라보지 못했다.
"오. 오오. 드디어 일군께서 등장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한 남자.
소궁 삼재로 평가받는 걸출한 삼인 중 가장 상석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일군 강유.
현재, 천마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남자였다.
"역시. 군왕의 자질."
"그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좌중이 숙연해지고 있어."
"타고난 제왕이라는 것은 저런 사람을 말하는 거야. 파운이나 적운이 대단한 고수인 건 맞지만, 신교라는 거대한 집단의 수장으로는 강유만 못하지."
"그렇다고 일신의 무용이 부족한 건 아니야. 듣기로 강유는 이미 현경에 돌입해서 적수를 찾기 힘든 경지에 올랐다고 해."
"현경? 그게 사실이야?"
"확실한 건 아니지만, 강유를 후원하는 팔반의 어르신과 동수를 이뤘다는 말이 있거든."
강유의 평가는 앞선 둘보다 반보 정도를 앞서고 있었다.
개인적인 무위만이 아닌, 사람이 지닌 분위기.
군왕의 자질로서 그를 이미 천마의 후계로 보는 이들이 상당수였다.
"소백, 너도 강유를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지?"
"응. 앞선 대전에서는 마주치지 못했고, 어릴 때는 그냥 스쳐 간 적이 전부니까."
"다른 둘은 모르겠지만, 강유는 조심해. 오래전에 천마에게서 천마검을 전수받을 당시에 짧게나마 그와 이야기한 적이 있어. 저 인간은…… 위험해."
"위험하다고?"
"무공이나 그런 개념이 아니야. 그냥 뭔가 위험한 인간이야."
은소소의 평가는 어딘가 기묘한 것이었다.
강자라면 불같이 달려드는 그녀임에도 강유에 대해서는 정말로 꺼리는 기색이었다.
"일군 강유라."
겉으로 보이는 강유의 모습은 그야말로 군계일학.
그린 듯한 미남자에 자연스러운 왕의 기운을 풍기고 있다.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사건, 모든 대화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파운과 적운의 존재감이 적은 것이 아님에도 그는 격이 달랐다.
마치 왕이 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
기이할 정도로 그런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렇게 지켜만 보고 있을 셈인가, 소백 아우."
"……!"
순간,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말을 붙이는 강유.
좌중의 시선이 기괴할 정도로 한 번에 명한으로 쏠렸다.
마치 너 따위가 강유 님과 이야기를 하냐고, 타박하는 느낌이었다.
‘이건 뭐 사이비 교주 수준이네.’
생각 없이 대하다가는 쓸려갈 판이었다.
명한이 아랫배에 힘을 딱 주고 다가갔다.
"오랜만이네, 강유 형님."
"이렇게 직접 독대하는 건 처음인가? 이러다가 얼굴도 잊어버리겠어."
"이런 식으로 마주할 입장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서서 바라보니까, 강유 형님 얼굴이 어떤지 확실하게 알 것 같아."
"호오? 내 얼굴이 어떤데?"
"잘생긴 교주님. 여럿 홀리겠어."
"큭큭큭. 저 어린놈이 말주변 하나는 좋네."
마지막 웃음은 파운의 것이었다.
그는 불같은 시선으로 명한을 보며 이죽거렸다.
"그날은 그렇게 가서 서운했어, 파운 형님."
"하하. 서운하지 않았으면 네놈 머리 위의 것이 남아 있었을까?"
"글쎄. 그렇게 장담하다가는 형님 명줄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 같은데?"
"이 새끼가……"
"자자, 그만. 형제끼리 좋은 날에 싸우면 쓰나."
슬쩍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강유가 중재했다.
그 불같던 파운마저도 강유의 손짓에는 순순히 물러났다.
"이쪽 적운과는 본 적이 있나, 아우?"
"오래전 아버님 생신에서."
"오, 그랬나? 적운, 너는 기억하고 있어?"
"음. 글쎄. 이렇게 작은 아이는 처음이라서. 네가 우리 궁 말석에 있는 소백, 맞지?"
"맞아. 사십팔궁의 망나니, 소백. 기억 못 하나 본데, 그때는 내가 좀 실례를 했어. 잔치 음식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쪽 보고 키만 큰 멀대라고 욕했거든."
"……아. 이제야 기억이 나네."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적운은 아주 어릴 적 일부터 모든 걸 기억하는 완전기억 능력자다.
치기 어린 소백이 투정 부린 걸 빌미로 어머니에게 죄를 물었던 일.
소백의 기억으로 명한도 뚜렷하게 기억한다.
"하하. 이거 나만 모르게 다들 소백 아우님과 연이 있었구만."
"강유 형님은 이번 대전에서 연을 키우면 될 거 같은데."
"오호. 좋은 자세야. 아버님을 위한 대전에 있어서 모든 아들들은 최선을 다해야지. 기대하고 있지, 소백 아우."
슬쩍 던진 도발에도 강유는 여유롭기만 하다.
자연스러운 자신감과 남을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다.
명한의 속이 살짝 뒤틀렸다.
둥둥둥둥둥―!!
하지만 그걸 드러낼 틈은 없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대천마신교의 주인, 천마 님이 올라오십니다!"
이 천마대전의 주인.
모든 일의 원흉이자 천하제일인.
하늘 아래 적수가 없다는 인물, 천마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