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정비
한숨 돌리고 다시 움직였다.
소궁까지 돌아오는 데 방해하는 세력은 더 이상 없었다.
‘이런 초라한 곳에서 머물라는 것이냐?’ 된소리 하는 황제를 제외하면 일단락 낸 셈이었다.
"궁을 벗어나 네가 말한 곳으로 가는 계획은 어찌할 셈이지?"
"내각 각주가 우리에게 빚진 게 좀 있거든요. 어떻게 잘만 협상하면 하루 이틀 내로 내보낼 수 있을 겁니다."
"그 뒤는?"
"귀의와 함께 제가 적어둔 장소로 가세요. 화무천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흠. 그리운 이름이로군."
흑점을 통해서 화무천의 거처 역시 옮겨 두었다.
적어도 한동안 요양하기에 무리는 없는 장소.
미리 백약문에 언질을 넣어 귀의와 함께 치료를 진행하게끔 준비하면 된다.
적어도 중원 전역에서 이보다 병리에 밝은 이들은 없다.
"황상의 병이 낫거든 반드시 보은하도록 하겠네."
"그 말, 기억해 둘 겁니다."
"나 군율휘.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내는 아니네. 한평생. 단 하나, 황상의 안전만을 위해서 살아왔네. 그분께서 정상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뭘 못 하겠나."
"장군다운 답이네요. 그럼 뭐 그건 됐고. 지금은 호릉과 호랑을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호릉과 호랑을? 어째서?"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아직 황제진경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군율휘는 의아해하면서도 호랑과 호릉을 불러왔다.
일단의 일을 겪으며 신뢰가 쌓인 것이다.
"소 공자의 말에 성심성의껏 답하거라."
"네, 장군님!"
"명심할게요!"
씩씩한 답을 뒤로 군율휘는 물러나고.
방 안에는 명한과 두 사람만 남았다.
"서복. 그리고 황제진경에 대해서 알아?"
명한은 시작을 본론으로 했다.
#
"……빌어먹을 새끼들. 그놈이나 이놈이나 날 무시하고 있어."
으드득.
나형의 입안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승부수가 엇나가 팔반의 제지를 받은 지 하루.
날이 바뀌어도 끓어오르는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대전의 승리자가 될 몸이다. 난 더 이상 멸시받던 잡초가 아니라고! 누구도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돼!!"
쾅. 콰직.
손에 닿는 집기들이 요란하게 부서졌다.
화를 견디지 못해 뭐라도 좀 박살 내야 했다.
아니면 속이 뒤집혀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나형 도련님께서 많이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누구냐!?"
순간, 지척까지 다가온 낯선 인물.
나형이 응조수를 사용해서 그 인물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화는 잠시 넣어 두시죠."
"……넌?"
"혈교의 교주, 백석입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인간 같지 않은 기묘한 기척의 남자였다.
"네가 혈교의 교주라고?"
"이 몸이 제 것은 아니지만, 감히 신교의 안방에 본신으로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를."
"으음. 그쪽이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지? 악불군 건으로 우리와는 선을 그은 것 아닌가?"
나형이 손을 풀고 물러났다.
이런 기묘한 재주로 소궁을 출입할 수 있는 건 혈교밖에는 없었다.
"악불군 건은 어디까지나 저희의 실책. 소백이라는 자의 역량을 잘못 판단했을 따름입니다."
"흥. 자책할 것 없다. 그 빌어먹을 놈에게 손해를 본 건 그대들만이 아니니까."
"맞습니다. 저희 모두가 그자를 잘못 판단했지요. 하지만 도련님."
"음?"
"그건 팔반의 어르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백석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나형도 눈썹만 꿈틀거릴 뿐, 그 말을 제지하지 않았다.
"애초에 혈염마녀를 죽이고 돌아온 소백을 주의 대상에서 제외했던 건 팔반의 어르신입니다. 연달아 발생한 사고의 책임을 과연 누가 져야 옳을까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왜 잘못은 다른 이가 하고 책임은 도련님께서 져야 할까요. 전 이 취급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나형의 볼이 씰룩거렸다.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습니까. 도련님을 이번 대전의 승리자로 밀겠다고 약속은 하지만, 행동은 그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잃어버린 환염은 되찾으셨나요?"
"아니.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역시 그렇군요. 정말로 도련님을 승리자로 만들고자 했다면 이렇게 빙 돌아가는 모습을 보일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저와 손을 잡으시죠, 나형 도련님."
백석이 손을 내밀었다.
"감히 소궁 안까지 찾아와 내게 배신을 종용하는가?"
"배신이 아닙니다. 궁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팔반의 어르신도 흑풍의 대주도 아닙니다. 도련님이시지요. 필요에 따라 협력을 택하는 건 다른 누가 아닌 도련님이 돼야 옳습니다."
"으음."
"아니면 이대로 굴욕을 당한 채로 내팽개쳐질 생각이신가요?"
"감히! 누가 굴욕을 당했다는 거냐!?"
"후후. 그 분노. 저와 손을 잡으신다면 다신 겪지 않아도 될 겁니다."
목소리와 말투가 조금씩 더 은밀해졌다.
나형의 분노와 굴욕감은 감출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백석의 눈에는 그 일그러짐이 훤히 보였다.
"대체 네가 뭘 어떻게 해 줄 수 있다는 거지?"
"도련님께서 저와 손을 잡는다면……"
낮아지는 목소리. 은근한 속삭임.
나형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게 정말인가?"
"네. 모든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죠. 옳게 된 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이 중원 땅 전역을 주무르고도 남을 겁니다."
"하. 하하하. 터무니없군. 터무니없어."
지나치게 허황된 이야기.
평소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축객령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형은 평소의 상태가 아니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마음은 제대로 된 사고를 구축하지 못했다.
‘이 굴욕을 갚아줄 수만 있다면……!’
뭐라도 좋았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군. 좋아.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후후. 현명한 선택입니다, 나형 도련님."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 거래.
아직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
하루가 지나고 날이 밝아올 무렵.
명한은 내각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서 황제 일행을 천마궁 밖으로 내보냈다.
대기 중이던 흑점이 이를 인계.
빠르게 천마궁에서 멀어져 화무천이 머무는 은거촌으로 향했다.
진행은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이걸로 한시름 덜었네."
"한동안은 안전하겠지. 대전이 끝나고 장소를 옮기더라도 그 전까지는 딱히 큰일은 없을 거다."
"은거촌. 그 이름 그대로?"
"글쎄. 은거만 하고 살기에는 세상이 팍팍해서. 당분간은 내버려 두자고."
뒷이야기는 일단 묻어두고 현재로 돌아왔다.
황제와 은거촌을 다루기에는 당면한 문제도 시급했다.
"그보다 찾는 건 모두 찾았어? 두 꼬마한테서 알아낼 정보가 있다면서."
"응. 다행히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긴 했어. 완벽한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필요한 정보는 수급했지."
"뭔데? 황제진경에 대한 비밀이야?"
"글쎄. 이걸 뭐라고 해야 하려나."
명한은 적당한 말을 찾기 힘들었다.
호릉과 호랑의 입에서 들은 황제진경과 서복에 대한 이야기는 설정 그대로.
다만, 딱 하나의 이야기만 추가되어 있었을 뿐이다.
"서복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이 혈교를 창시했던 거 같아."
"응?"
"과거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데. 황제의 저서인 황제진경에는 불사의 비법이 적혀 있는데, 서복은 이를 감히 익히려 하지 않았어. 이에 불만을 느낀 한 사람이 황제진경을 가지고 도망쳐 버린 거야. 그게 혈교의 진전이라 이거지."
"불사의 비법을 찾으려고?"
"응. 혈교의 사특한 수법이 황제진경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얼추 맞아 떨어지지."
아귀는 맞지만, 이 모든 건 설정에 없던 내용.
몇 번이나 겪었던 설정 보충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황제진경은 습작과 상관이 없어.’
굳이 보충할 이유가 없는 걸 끌어온 느낌이었다.
"그럼 뭐야. 우리가 지금 혈교의 보물을 손에 넣은 거네?"
"정황상 그렇지. 근데, 저번에도 봤듯이 딱히 절실한 모습은 아니란 말이야. 어쩌면 교주도 종주가 들고 나간 걸 모르는 거 아닐까?"
"설마 그런 콩가루 집단이 있을까……"
"또 모르지. 혈교의 하는 짓을 봐봐. 인력도 제대로 없어서 마인이니 뭐니 인형으로 수를 채우고 있잖아. 예전에 호되게 당한 뒤로 아직 힘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거 아닐까?"
"그런 거면 좀 불쌍한 놈들이네."
"한 짓 생각하면 그것도 아깝지만……예전 명성 생각하면 초라한 건 사실이지. 또 알아? 지금쯤 어디 유력가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나와 손을 잡자! 이러면서?"
"아등바등 사는 거지."
명한이 피식 웃었다.
전부 가정을 바탕으로 한 대화인데, 왠지 모르게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라면 웃길 것 같다는 생각도.
"됐다. 그쪽은 뭐 나중에 또 보게 되겠지. 우리는 우리 일이나 하자고."
"응. 일월배심경을 쓴다고 했지?"
"대전까지 고작 오 일이야. 최대한 경험을 쌓아야지."
화제는 금세 넘어갔다.
대전까지 코앞.
정말로 전력을 끌어올려야 할 때였다.
혈교의 일은……
뒷전이었다.
#
일월배심경을 통한 수련에 들어갔다.
한 번에 한 사람만 투영할 수 있기에 차례를 정해서 사용했다.
시작은 명한.
은은한 달빛을 거울에 비춘 뒤, 피어오르는 빛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했다.
‘내가 맞서 싸워서 극복할 대상은……’
수많은 고수의 얼굴이 스쳐 갔다.
누군가는 너무 약하고 누군가는 너무 강했다.
극복 가능한, 최적의 상대가 필요했다.
"……권왕."
그렇게 결정된 건 바로 권왕 율무기였다.
삼왕오제의 일원이며 화경의 끝자락에 도달한 강자 중 하나였다.
현재의 명한보다야 강하지만, 아예 벽이 안 보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수련을 위해서는 딱 알맞은 강함이었다.
"……"
거울에서 투영된 율무기는 물끄러미 명한을 바라봤다.
"음. 오랜만이군. 내게 도전할 마음이 생긴 건가?"
그리고 이내, 익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월배심경을 통한 인물의 투영은 그 개성마저도 가져왔다.
어디까지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이지만, 그 자체로 굉장히 생생했다.
"슬슬 삼왕 수준에는 근접해야 할 거 같아서요."
"하하. 패기가 있어서 좋군. 자, 어디 그 의지만큼 실력이 있는지도 확인해 보자."
출수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권왕의 독문무공 패왕권의 발현이었다.
거대한 압력이 주먹의 형태로 전면을 찍어 눌렀다.
‘흡―!’ 하지만 명한도 예전의 그 명한이 아니었다.
타구봉을 축으로 삼아서 압력을 걷어 올렸다.
힘이 빙빙 돌아서 바닥으로 무너졌다.
푹 들어가는 지면은 족히 한 족장은 너끈했다.
"좋은 수!"
권왕의 수는 하나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주먹이 수십 개로 나뉘더니 쉼 없이 쏟아졌다.
권왕의 유성권이었다.
명한은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타구봉을 벼락처럼 휘둘렀다.
반야를 통한 반격기였다.
봉과 권이 충돌하며 사방이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받아내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
율무기의 주먹이 더욱 무거워졌다.
하나하나가 벼락이고 하나하나가 태산이었다.
전력을 다한 삼왕의 힘이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명한은 연신 물러나다 등이 벽에 닿았다.
현실에 존재하는 경계였다.
‘그래. 물러나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어.’
가끔은 무모한 도전도 해 봐야 하는 법.
"후배, 명한이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좋다."
소백이 아니라도 되는 공간.
명한이 극천일무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잿빛처럼 타오르는 몸.
그리고 이 안에 극일의 기운을 두르고 가이신공과 반야로 반발력을 제어했다.
폭탄을 끌어안고 겨우 버티는 형국.
하지만 이곳이 아니라면 시도해 보지도 못할 극단적인 공격이었다.
"스스로 이름 붙이기를 극천일무기…… 폭(爆). 받아 보시기를."
"하하하. 오너라."
오로지 힘으로 응축된 몸을 앞으로 던졌다.
벼락과 화염. 폭풍이 전신을 난도질하며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