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이는 굴욕
본래 짙은 어둠 속의 한 가닥 빛이 가장 환한 법.
명한의 무일은 잦아드는 빛의 한 줄기를 불태우는 힘이었다.
그야말로 음중양.
태양의 힘이었다.
"……생소한 무공이군."
"마찬가지다. 네게 그런 무공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흥. 수를 꺼내 든 이상 물러나는 길은 없다."
"마찬가지야."
순식간에 두 사람이 충돌했다.
무기를 집어넣은 적수공권이었다.
아무리 타구봉이 ‘파괴불가’ 속성이 달려 있어도 이런 양강지기를 담기에 좋은 물건은 아니었다.
주먹과 주먹, 팔과 팔, 어깨와 어깨가 연달아 부딪쳤다.
퍼엉! 펑! 펑!
그때마다 피어오르는 불꽃.
단순한 양기를 넘어서 실체화된 화염의 향연이었다.
"네 잿더미 위에서 나는 비상할 거다, 소백!"
"꿈은 자면서 꿔. 나를 잿더미로 만들기에는 네 열이 부족하다."
"날 우습게 보지 마!"
나형의 양손이 교차하며 백염을 토해냈다.
중심에서 뻗어 나오는 거대한 태양 빛 같았다.
받아봐서 알기에 명한은 이걸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빛을 쥐고 왼손으로 이를 눌렀다.
손안에 들어온 태양이 어마어마한 열기를 내뿜으며 타올랐다.
"소용없다, 소백! 환염은 너 따위가 제어할 물건이 아니다!"
"누가 제어한다고 했지?"
명한은 움켜쥔 손을 통해서 무일을 발현했다.
성취가 낮아 불안함은 상당했지만, 상대인 나형의 환염 역시 완벽한 건 아니었다.
불꽃을 구축한 기운의 형태가 상당히 조악했다.
억지로 만든, 혹은 누군가 주입한 정수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가능하다.
챙―!
무언가 깨지는 소리.
이글거리던 환염이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멈췄다.
모든 열기도 동시에 사라졌다.
나형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일월교의 비전, 무일. 음중양의 이치이며 그 자체로 극한의 양공. 하지만 이름이 무일인 이유가 있다. 태우기 위한 빛은 그 스스로를 거두는 것도 가능해야 하는 법."
"일월교의 비전이라고!?"
"불은 끄고 다녀야지."
팍.
형태를 유지하던 나형의 환염이 연기로 변했다.
극도의 양강지기를 음과 양의 교차점에 가둬서 그대로 잠재운 것이다.
익힌 건 무일이지만, 향아의 무월도 봤던 명한이기에 가능한 수였다.
"이제 네 손에 불꽃은 없다, 나형."
"닥쳐! 고작 한 수로 날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악에 받친 나형이 손을 오므려 조공을 사용했다.
상당히 예리하지만, 앞서 보여준 환염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였다.
이것이 본래 나형이 가지고 있는 무공.
실제 그의 실력이었다.
"불꽃뿐이었던 거냐."
명한은 이를 손쉽게 제압했다.
손목을 잡힌 채 나형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환염을 제외하면 나형의 무공은 예전 명한보다 조금 나은 수준 불과했다.
몸으로 무공을 갈고닦은 명한과 비교해서 나형은 그저 환염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놔, 놔!! 나는 고작 이런 곳에서 무너질 수 없다!"
"우습네. 자신의 것도 아닌 힘을 믿고 천마궁의 패자를 꿈꿨던 거냐?"
"시, 시끄러워! 그분께서 말씀하셨어! 내가 승자가 될 수 있다고! 더 이상 패배자로 멸시받고 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그분? 네가 말하는 구분이 누구냐? 팔반의 인물인가?"
"직접 와보기를 잘했군."
"……!"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명한이 깜짝 놀라 나형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찰나의 차이로 조금 전 서 있던 곳이 두 치 간격으로 잘렸다.
엄청난 쾌속의 일격이었다.
"본좌의 일수를 피하다니. 확실히 재주가 있는 놈이로구나."
어느새 나타난 금색 가면의 남자.
나형의 어깨를 쥐고, 주변을 오시하고 있었다.
풍기는 기도, 좌중을 압도하는 기백.
모든 것에서 이 남자가 어마어마한 고수임을 나타냈다.
"크으윽. 죄, 죄송합니다."
"괜찮다, 나형. 대업에 앞서 이런 것들은 사소한 문제일 뿐이니까. 전력 외로 평가했던 사십팔궁의 꼬맹이가 생각외로 강했을 뿐이야."
남자는 나형과 이야기하면서도 명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다, 다시 한번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환염이 있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아쉽지만, 나형. 환염은 저잣거리 당과처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지금은 물러나 있거라. 네 역량은 후에 확인해 줄 테니까."
"하, 하지만……!"
"물러나라는 말을 못 들었나?"
"큭."
나형은 처참한 얼굴을 한 채 뒤로 물러났다.
모든 것을 조율하던 지배자의 역할에서 병풍으로 전락한 셈이다.
끓는 감정을 쉽사리 제어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세운 얼굴인데 꽤 박하군."
명한이 슬쩍 그 틈을 찌르고 들어갔다.
"모든 것은 대업을 위한 역할일 뿐이다. 나형도 흑풍의 아이들도. 심지어 나조차."
"대업이라. 판을 짠 사람은 따로 있다는 의미 같네. 팔반의 일원을 움직일 사람이 있나?"
"모든 것이 천리라고 한다면 너는 믿겠느냐?"
"천리라. 사이비 종교라도 가입했냐?"
"후후. 무지한 자에게는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군."
희미하게 웃는 남자의 모습에서 명한은 묘한 기색을 감지했다.
어딘가 광신적인 모습이었다.
신교의 팔반이라면 그야말로 실세 중 실세.
그런 인물이 저렇게 맹목적으로 따를 존재는 정말로 몇 없다.
"후. 이제 이런 잡설은 그만하도록 하지. 황제를 우리에게 넘겨라. 그럼 고통 없이 죽여주마."
"이제 보니 황제 건도 혈교가 아닌 그쪽이 주도했던 모양이네."
"주도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뿐이지. 혈교의 독특한 수법은 제법 쓸 곳이 많거든. 대상이 황제라면 더더욱."
"말인즉슨, 보고 있는 판이 신교만이 아니라는 거네."
"……후후. 너무 총명하면 단명하는 법이지."
황제를 이용하는 것이 혈교의 계획이었어도, 이제는 나형 쪽도 타고 있다.
애초에 판을 신교만이 아닌 중원 전체로 보고 있다는 의미.
"아무래도 그쪽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아야겠어."
"하하. 감히 네가, 본좌에게 말이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팔반하고 맞설 정도는 아니지. 그쪽 상대는 따로 정해져 있어."
명한이 뒤로 훌쩍 물러나며 황제 옆에 섰다.
"부탁드립니다, 장군."
"흠."
언월도를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서는 군율휘.
무시무시한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여유만만하던 팔반의 남자도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설마…… 군율휘?"
"총명하면 단명한다고는 하지만, 무지하면 그보다 더 빨리 죽지."
쿵. 언월도가 바닥과 충돌했다.
"감히 황상을 음해하려던 죄. 네놈들의 목숨으로 받아가겠다."
군왕의 기세.
판도는 다시 한번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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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율휘는 무려 50년 전 사람이다.
그 당시에도 이미 나이가 적지 않았으니 상당수가 그를 죽은 인물 취급했다.
앞서 생존을 확인했던 건 혈교의 무리가 유일.
팔반의 남자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생각지도 못했군. 설마 50년 전에 사라졌던 당대의 고수가 아직도 살아 있었을 줄이야."
"황상을 모시는 일에 내 수명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보아하니 네놈도 그 사특한 자들과 한패인 듯 보이는데…… 내 언월도에 몸이 잘리기 싫다면 물러나거라."
"하. 하하. 이거 재미있군. 당대의 고수였던 당신과는 한번 싸워보고 싶었어. 황궁 무예의 정수라고 불리는 인물이 과연 어느 정도일지. 한번 붙어보자고."
"무엄한 놈."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남자 역시 극의에 이른 고수.
침착함을 되찾고 군율휘와 대치했다.
양쪽에서 쏟아지는 기세에 뭇 사람은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도련님, 승산은 있겠죠?"
"괜찮아. 군 장군이 나이를 먹어 전성기만큼의 실력은 뽐내지 못하겠지만, 호락호락 당할 사람은 아니거든."
"그래도 팔반의 고수인데. 현경급이면……"
"현경급이라도 마찬가지야."
슥. 군율휘가 중심을 낮추고 발을 천천히 앞으로 밀어 넣었다.
태산 같은 기도가 걸음에 맞춰서 주변을 잠식해 들어갔다.
마치 거인이 한 걸음 내딛는 느낌이었다.
"암경(暗勁)."
팔반의 남자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닿지도 않은 발치 언저리가 서늘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뻗어 나와 기세를 앗아가는 무리의 일종.
뭇 고수 중에서도 이를 능숙하게 다루는 자는 많지 않았다.
"제식군도술. 황궁검식. 군 장군께서 익힌 무예는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지만, 핵심은 다른 곳에 있어. 군 장군의 스승은 동창의 수장이었던 백교교라는 인물이거든."
"동창? 군과 동창은 사이가 안 좋지 않나요? 어쩌다가?"
"그 이야기는 너무 길고. 장군의 기반에 암식(暗式)이 있다는 게 중요해."
언월도를 무기로 사용하는 패기 넘치는 장군.
겉으로 보이는 것에 현혹되면 군율휘의 암식에 당하고 만다.
현경에 발을 들인 고수라 해도 마찬가지.
"움직인다!"
"검이 안 보여!"
순식간에 두 사람이 모습을 지우고 허공에서 교차했다.
언월도와 얇은 편검의 충돌이었다.
불꽃이 튀고 충격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견디지 못한 흑풍의 일부는 구석으로 굴러가기까지 했다.
"크윽! 어찌 장군이라는 자가!?"
튕겨 나온 두 인영의 얼굴에서 승패가 엿보였다.
"내 도는 황가를 지키기 위한 것. 무림인의 도리 따위는 관심 없다."
팔반 남자의 옆구리를 할퀸 상처.
그건 군율휘가 사용한 암격의 흔적이었다.
거대한 언월도 그림자 사이로 파고드는 이격(二擊).
고고한 대장군의 수법으로는 상상할 수 없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무덤가기 직전인 주제에 아직 한 수는 남아있다, 이거네."
상처 주변을 손끝으로 누르며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한 번 당하긴 했으나, 아직은 반반의 상황.
‘……아니. 여기서 도박수를 던질 수는 없지.’
들끓는 승부욕이 가라앉는 건 순식간이었다.
"흑풍대주 검을 거두고 물러나게."
한쪽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흑풍대주를 불러세웠다.
이기든 지든 지금 상황에서는 크게 변할 것이 없었다.
"대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되레 크게 반응한 건 물러나 있던 나형이었다.
"이겨도 손해만 남는 싸움이다. 굳이 이런 곳에서 전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어. 지금은 물러난다."
"하, 하지만 저들 때문에 입은 피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악불군을 뺏기고 황제마저 잃고 나면 대업을 어찌 진행하실 겁니까!?"
"잃은 건 잃은 거고 큰 그림을 봐라. 여기서 손실을 보면 향후 대전에서 우리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만. 너는 내 말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나형의 분노는 차가운 대답에 끊겼다.
불이라도 붙은 듯 붉어진 얼굴을 한 채, 나형은 물러났다.
그러기 싫어도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후우. 이래저래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로군."
"그게 싫다면 끝까지 싸워도 좋은데?"
"흥. 그건 서로 원하지 않을 텐데?"
슬쩍 비아냥대 봤던 명한도 뒷말에는 답을 하지 못했다.
군율휘가 승기를 잡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팔반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황제의 보호.
상황이 복잡해지면 전력 이탈도 고려해야 했다.
‘소소가 흑풍대주를 잡고 나와 향아가 협공을 한다고 해도……’
남은 흑풍이 황제를 잡으면 그야말로 무용지물.
"길을 열어 준다면 우리도 잡지는 않지."
"다음에 만난다면 누구 하나는 죽어야 끝날 거다."
"그건 그때 다시 생각을 해 보자고."
합의 비슷한 걸 이뤘다.
여기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대전을 앞둔 상황에서는 최선이 아님을 동의한 것이다.
말없이 거리를 벌리고 각자의 방향으로 물러났다.
크게 붙은 것치고는 싱거운 결말.
그래도 평화로운 마무리였다.
"……"
단 한 사람.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갈고 있는 나형을 제외하고는.
‘이 굴욕은 반드시 갚아주마.’
소리 없는 증오가 타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