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시작은 우연이었다.
펼쳐둔 몇 가지 계획에 우연이 엮였을 뿐이다.
혈염마녀를 통한 약간의 실험과 수작질도.
혈교와의 거래로 얻게 될 악불군이라는 무기도.
50년 전에 모습을 감춘 황제라는 비밀 도구도.
하나하나는 전부 우연일 수 있지만, 이 모든 걸 더하면 더 이상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뭐냐."
통로 저편에 나타난 명한 일행을 보며 나형이 읊조렸다.
혈교가 습격당한 장소를 확인한 뒤, 만약을 대비해서 움직인 장소.
아무도 모를 거라 예상한 곳에서 더욱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왜 저자일까.
"소백.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거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네가 왜 이곳에 있지, 나형?"
"하. 어이가 없군. 설마하니 악불군을 건드린 것도 네놈이었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혈교와 손잡은 게 네놈이었나 보네."
서로가 서로에게 확인을 했다.
명한은 확신을, 나형은 제쳐 두었던 진실을 알게 됐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혈염마녀야 폭주 때문에 일을 망쳤다고 치부할 수 있지만, 악불군은 아니야. 그곳에는 종주와 교주가 직접 움직였다. 네놈이 처리할 단계를 아득하게 넘었다고."
"계속 반복인가? 나야말로 묻고 싶어. 궁의 말단이었던 네가 무슨 수로 혈교와 손을 잡고 뒤에서 이런 움직임을 보인 거지? 무슨 재주로."
"……"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목적이 뭐냐, 소백."
다시 말문을 연 건 나형이었다.
"곧 대전이다. 목적은 모두가 같지 않나?"
"진지하게 묻고 있다. 모두가 이번 대전을 후계를 위한 쟁투로 바라보고 있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상위 서열 모두가 전력을 다해서 달려들 거다. 본래라면 너나 나 같은 하위 소궁은 감히 견줄 수도 없는 일."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이건가?"
"서로 답을 하지 않으면 알 길은 없지만…… 너나 나. 둘 모두 상위 소궁에 근접한 힘을 얻었다. 즉, 충분히 대전의 승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지."
"대전의 승리자. 천마의 후계자. 이걸 바라는 건가?"
"정답이다."
명한이 나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거짓을 말하는 기색은 없었다.
혈교와 손을 잡은 것도 황상을 빼돌리려 한 것도 모두 하나의 목적이었다.
수는 분명 과하지만, 목적 자체는 단순했다.
"난…… 너와는 상황이 조금 달라. 대전의 승리를 원하는 건 맞지만, 후계를 탐하진 않는다."
"무슨 소리지? 신교의 자식이 후계를 탐하지 않는다니?"
"사람마다 저마다의 가치가 있는 거다. 난 천마의 뒤를 이어서 신교의 지배자가 될 생각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대전의 승리가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권리다."
"비고인가?"
"뭐, 정 없는 아버지와의 대화도 포함해서."
비고. 정확한 명칭으로는 천마비고.
신교의 유구한 역사와 무공의 총람이라 불리는 장소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얻어야 할 물건이 그 안에 있다.
"이유를 모르겠군. 중원의 패자인 신교를 원하지 않는다라."
"말했잖아. 사람마다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고. 난 남이 쌓아 올린 밥상에 숟가락 올리는 취미는 없거든."
"……묘하군. 정말 네가 예전의 그 소백이 맞는 거냐?"
"같은 생각이야. 내가 기억하는 너는 수줍고 겁이 많아 언제나 화원 뒤뜰에서 남몰래 무공을 연습하던 샌님 아니었나?"
"옛이야기는 꺼내지 마."
툭 던진 말에 나형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 옛일도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나형?"
"네게 말해줄 의리 따위는 없어. 세월이 가면 사람은 변하는 법. 나라고 언제까지 패배자처럼 웅크리고 있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혈교 같은 사파와 손을 잡았다는 거냐? 그들이 어떤 집단인지는 알고?"
"너보다는 훨씬 잘 알고 있다. 어차피 그들은 쓰고 버리는 패. 내 목적을 위해 잠시 이용했을 뿐이다."
"말은 쉽게 하는군. 혈교는 뿌리가 깊고 집요한 집단이야. 네 생각처럼 쉽게 흔들리는 그런 도구가 아니라고."
"흥. 설득은 집어치워라, 소백. 승리를 위해서라면 가족의 원수와도 손을 잡는 것이 우리 마도의 사람이다. 고작 잊힌 사파 따위 하나와 연합했다고 내게 비난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딱히. 책임은 결국 벌인 놈이 지는 거니까."
이 이상의 의리는 없다.
명한이 말을 아꼈다.
"좋아. 그 정도 거리면 충분하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
"우리 사이에 본론이 있을까?"
"지금까지 네놈이 훼방 놓은 일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죽여 마땅해. 하지만…… 같은 말단 소궁 출신이었기 때문일까. 한 번은 기회를 주고 싶다."
"기회?"
"나와 손을 잡아라, 소백. 네 능력에 내 힘이면 강유, 파운, 적운 등과도 겨룰 수 있다."
이건 나형으로서도 큰 도박이었다.
지금껏 뭉개진 일들의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일.
하지만 말단 소궁의 동질감과 묘한 느낌 탓에 처단이 아닌 회유를 택했다.
"대전에서 협력할 소궁을 택하는 건 중요한 일이지. 네가 얻은 힘이 어디서 왔는지, 배후에 누가 있는지 등은 알 수 없지만 이건 좋은 선택일 수 있어."
"그럼 나와 함께하자, 소백."
"하지만 아니다, 나형."
"뭐? 어째서?"
"나는 결과만큼 과정도 보는 사람이라서. 혈염마녀의 일, 악불군을 대한 혈교의 수단, 황상을 노린 계획. 이 모든 것에 네 방향성이 묻어나오고 있다. 사람을 도구로 보고, 목적을 위해 모든 걸 박살 내는 방식은 나와 맞지 않아."
"소백! 대전의 승리를 위한 것이다! 대를 위해 사소한 것 따위 버리는 것이 우리 마도야! 어차피 우리도 천마가 후계를 건지기 위해 싸지른 씨앗 중 하나 아닌가?"
"천마가 그랬다고 우리까지 그런다면…… 대체 뭐가 다르겠어. 난 네 제안을 거절한다."
"……"
나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숱하게 뱉어낸 거짓과 기만 중 방금의 말만큼은 진실이었다.
천마궁. 수십의 소궁은 훌륭한 후계를 고르기 위한 천마의 닭장.
그 안에서 바동거리는 절대다수는 언젠가 도축될 닭에 불과했다.
‘그것만큼은 인정할 수 없어.’
말라붙은 입술을 떼었다.
"잠깐이나마 형제가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걸 꿈꿨다."
"우리 삶에 피붙이는 과욕이겠지. 아쉽지만, 너와 나는 길이 다르다."
"그래. 그게 이 천마궁. 빌어먹을 마궁의 삶이니까."
나형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검붉은 기운이 맴돌며 사방에서 수십의 인원이 쏟아져 나왔다.
"죽어라. 네 시체를 밟고 나는 올라가겠다."
대전의 시작 며칠 전.
초전의 불이 올랐다.
#
수십의 전력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잠깐의 의문은 순식간에 해소됐다.
"흑풍이다!"
"흥. 대놓고 지원하는군."
팔반의 누군가에서 지원받은 신교의 무력부대 중 하나였다.
빠르게 맹렬하게 일행의 주변을 포위.
망설임 없이 합공을 가해왔다.
"군 장군께서는 황상을 부탁드립니다."
"알았네. 이곳은 맡기게나."
뒤는 군율휘에게 맡기고 명한이 선두에 섰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검기는 매서웠지만, 이 정도는 이제 익숙했다.
큰 걸음으로 기운을 바닥부터 뽑아 올려 와류를 만들었다.
나선형의 바람이 검격을 밀어내고 그 사이로 타구봉을 찔러 넣었다.
번개 같은 공격에 흑풍이 우르르 밀려 나갔다.
"혼자서 활약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은소소도 뒤를 이어 난입했다.
혼원일기를 두른 검이 공간을 찢어발겼다.
흑풍은 감히 그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밀려났다.
"……확실하게 처리해라."
"이 일은 상정 외요. 후에 답을 받겠소."
단순히 흑풍만으로는 부족하다.
나형은 이를 판단하고 사람을 추가했다.
검은 흑풍의 차림의 남자였다.
훌쩍 뛰어 은소소의 검을 받아내는데, 그 힘과 내공이 보통이 아니었다.
"흑풍대주!?"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흑풍의 대주 운균이었다.
쌍검을 기가 막히게 쓰는 인물로 무력대 대주 중에서는 한 손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좌우 쌍수 검이 현란하게 움직여 은소소의 행동을 제약했다.
"젠장! 아예 흑풍 전체가 저 인간을 지원하기로 마음먹은 거냐!?"
"어디까지나 이건 대좌의 명령. 우리는 그것을 따를 뿐입니다."
"대좌? 팔반의 인물이구나! 누구냐!?"
"죄송합니다만…… 시체에게 답할 의리는 없습니다."
순식간에 쌍검이 흑색으로 물들더니 은소소의 양쪽 팔을 스쳐 지나갔다.
상처가 쩍 벌어지며 피가 쏟아졌다.
"소소!"
"크윽! 난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은소소는 내기를 운용해 출혈을 막으며 검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아 힘줄을 당하지는 않았다.
"제 흑쌍살을 빗겨내다니. 전보다 실력이 늘었군요."
"주변에 괴물들이 있다 보니까."
"……흠?"
"하. 소식이 느린가 보네."
혼원일기를 끌어올려 검 전체에 투영했다.
전처럼 일검, 일검에 일시적으로 쓰는 것이 아닌 검기와 같은 방식이었다.
제어가 쉽지 않고 내공 소모가 극심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이 아니면 안 된다.
‘소백도 향아도 강해지고 있어. 나만 멈춰있을 수는 없다.’
위기를 기회의 발판으로.
각오를 다졌다.
"덤벼.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걸 몸으로 느끼게 해 주지."
"유언으로 새겨듣겠습니다."
검과 검이 충돌했다.
#
싸움이 격화되어 갔다.
명한과 향아는 흑풍 무리와 은소소는 흑풍대주와.
상정한 전력으로는 이미 이겼어야 할 싸움인데, 지지부진 시간만 늘어났다.
나형은 이 대치가 마뜩잖았다.
"그분께서는 아끼라 하셨지만, 이번만큼은 안 되겠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나섰다.
훌쩍 땅을 밟아 거리를 좁히더니 순식간에 현장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그 보법의 정교함은 향아의 월보와 견줄만했다.
"나형."
"내 손으로 형제를 죽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건 해보고 난 뒤에나 말해."
"너는 모른다. 내가 얻은 힘이 무엇인지."
순식간에 나형의 손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주변 대기가 일렁일 정도의 극강한 열염지기였다.
은소소의 백염 정도는 우습게 볼 정도.
"……무슨 무공이지?"
게다가 이 무공의 정체를 명한은 알 수가 없었다.
설정에 수많은 열염기공이 있지만, 이 정도의 열기는 떠오르지 않았다.
"알 필요 없다."
나형은 짧은 답을 뒤로 주먹을 뻗었다.
거대한 화구가 날아가듯 극강의 열염지기가 바람을 태우며 쏟아졌다.
명한은 땅을 차 거리를 세 족장 이상으로 벌렸다.
‘무시무시한 열기로군.’ 하지만 그럼에도 피부가 익고 머리카락이 타는 걸 막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열기였다.
"다들 물러나라! 도련님께서 환염(幻炎)을 사용하신다!"
"말려들지 마! 붙으면 같이 타죽는다!"
흑풍 무리는 익히 알고 있는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파괴적인 공능이라는 의미였다.
"두 번은 없다. 재로 변해라, 소백."
나형은 이 열기를 양 주먹에 모아 부딪쳤다.
태양을 정면에서 보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용암과 같은 열기가 통로 전체를 휘감으며 뿜어져 나왔다.
거리를 벌린 이들조차 황급히 물러날 정도의 엄청난 열기.
이걸 정면에서 받아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어디 밝음으로 한번 해 보자고."
"……뭐?"
하지만 명한은 그 열기의 한복판에서 멀쩡하게 생존했다.
그의 몸 전체를 휘감은 황금색의 기운이 열을 차단하고, 되레 이를 찍어누르고 있었다.
열로 열을 맞받아치는 극단적인 반격이었다.
"칭하기를 무일. 태울 수 있다면 태워봐."
일월교의 비전 무공 무일.
음중양(陰中陽).
양기의 정수였다.
전황은 이제 화력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