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
남은 적면은 오래지 않아 정리됐다.
허리를 끊은 은소소와 향아면 충분했다.
둘은 서둘러 적을 처리하고 돌아와 ‘대장이 없었다!’라며 소리쳤다.
"대장이라면 여기."
툭툭.
명한이 발끝으로 널브러진 마골의 시체를 두드렸다.
강한 혼기에 정신이 무너지는 그는 견디지 못하고 전신 혈맥이 끊어져서 죽었다.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죽음의 순간에 무엇을 느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거기 둘. 이쪽으로 와라."
이어, 명한은 구석에 숨어 있는 호릉과 호랑을 불렀다.
둘은 명한이 마인의 형상을 취한 이후부터는 꼬리를 말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우, 우리는 금의위 장군이다."
"막 나쁘게 대하고 그러면 황상이 화낼걸……?"
주춤주춤 마지못해 다가왔다.
명한은 이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머리통을 주먹으로 한 대씩 후려쳤다.
쾅. 쾅. 소리가 제법 컸다.
"아으악! 아, 아프잖아!"
"아파! 아프다고!"
"아프라고 때리는 거다. 대체 뭔 생각으로 저 인간들을 찾아간 거냐?"
타박에 입술만 댓 발 내밀고 눈치만 봤다.
장군이니 뭐니 칭호를 붙여도 아직 덜 여문 아이에 불과했다.
명한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군 장군이 찾는다. 너희가 말도 없이 사라져서 걱정하고 있어."
"화…… 많이 났어?"
"글쎄. 돌아오면 곤장이라도 치지 않을까?"
"히익! 아, 아픈 건 싫어! 우리를 못 찾았다고 그냥 돌아가 주면 안 될까?"
"이 꼬맹이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명한이 다시 한 대씩 쥐어박았다.
둘은 끙끙, 앓으면서도 도망치거나 대들지 못했다.
마골이 당하는 꼴을 봤으니 감히 그럴 용기는 낼 수 없었다.
"장군께서 너희를 찾으라고 이렇게 자신의 물건까지 내어 주셨다. 말없이 사라지고 아픈 게 싫다고 도망칠 거면 아예 이 피리도 부러뜨리지 그래?"
"아, 아니야! 피리는 건드리지 마!"
"그건 우리가 장군께 선물한 거라고!"
피리를 잡고 힘을 주는 시늉에 펄쩍 뛰었다.
단순한 증표 이상의 물건이라는 의미였다.
"내가 이곳…… 황궁의 삶은 잘 모르지만, 몇 없는 이들끼리 부대껴 사는 거라면 가족 아니냐? 그렇게 말없이 사라지고 그러면 다들 걱정한다."
"우우. 미안해. 우린 그냥 황상께서 유폐될까 봐 걱정한 거야."
"응. 응. 잘못했어."
금세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울상을 지었다.
또래다운 모습이었다.
"대체 왜 유폐라고 생각한 거냐?"
"하지만 은거촌으로 황상을 모셔간다며. 황궁을 떠나서 촌으로 가는 거면 유폐잖아."
"하아. 그래, 그래. 내가 설명이 짧았다. 은거촌으로 가는 건 유폐가 아니라 치료야. 너희도 황상께서 불편하시다는 거, 알지?"
"응. 가끔 황상께서는 다른 사람이 되곤 해. 그때면 장군이 우릴 내보내고 황궁 안에서 독대를 했어. 잘은 모르지만…… 아파서 그렇다고 들었어."
"그걸 치유하려고 내가 온 거야. 은거촌은 유폐가 아니고 요양지고. 이제 이해했어?"
"응…… 우리가 오해했네. 미안해."
호릉과 호랑이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철없고 생각이 짧을 뿐 나쁜 아이들은 아니었다.
명한이 둘의 머리를 다독이며 몸을 일으켜 주었다.
"돌아가자. 다들 걱정하고 있어."
"응!"
"우리 산책 갔던 거로 해주면 안 될까?"
금세 기운을 차렸다.
#
한바탕 잔소리 듣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군율휘도 호랑과 호릉을 진심으로 혼낼 생각까지는 없었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에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자네는 확실히 그들과는 다르군. 결심했네. 황상과 함께 자네의 제안대로 은거촌으로 옮기도록 하지."
그리고 이것이 제안을 수락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안 그래도 흔들리던 상황이었으니, 작은 계기 하나면 충분했다.
"일단은 함께 제 처소까지 움직이도록 하죠. 그 뒤에 천산 밖으로 움직일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화무천에게 말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아, 지금 신교의 주인은 화무천이 아닙니다. 그 아들인 천마죠."
"그렇군. 하긴 세월이 그렇게 지났으니 계속 있는 것도 이상할 터. 천마에게는 우리 일을 터놓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네. 대대적으로 움직이는 건 지양하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황상을 이용하려는 자들도 아직 남아 있고…… 이래저래 은밀한 편이 좋죠."
군율위도 이 점은 납득했다.
50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황제다.
이 사실이 크게 알려지면 질 나쁜 파리가 꼬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난 황상께 이야기를 전하고 준비를 하지. 그동안 자네는…… 아, 그렇지. 황상의 명경이 필요하다고 했었나? 창고에 보관 중이니 호릉과 호랑을 시켜서 안내해 주겠네. 자네가 확인하고 챙겨 두게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딱 필요한 걸 짚어 주었다.
이내, 군율휘가 물러나고 호릉과 호랑이 열쇠 꾸러미를 들고 찾아왔다.
나름 황궁이라고 자물쇠가 달린 창고도 있었다.
먼지를 풀풀 날리며 문이 열렸다.
"저거야. 저게 황상의 일월배심경이야. 아주 가끔 황상께서 보러 오시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쓰인 적이 없어."
"그렇겠지. 겉으로 보기에는 장식만 화려한 명경이니까."
명한이 일월배심경의 먼지를 천으로 닦아냈다.
좌우에 달과 해가 교차적으로 장식된 멋들어진 거울이었다.
아주 오래전, 일월교의 명공이었던 한 인물이 당시 교주의 부름을 받고 제작했다고 알려진 물건이다.
"향아야, 이쪽으로."
손짓에 향아가 명경 앞에 섰다.
일월배심경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당연하게도 일월교의 명월심법을 익히고 있어야 할 것.
둘째는 일월교에서 전승으로 전해지는 몇 마디 말이었다.
"달은 밤의 벗. 태양을 그리는 그림자의 연인. 일과 월의 마주침은 거울 속 마음. 드러나야 하는 건 밝음이 아닌 맑음."
명한의 읊조림에 명경의 표면이 빛나기 시작했다.
"도련님, 이거……"
"그래. 명월심법을 익힌 네 눈이라면 보이겠지. 천천히 받아 적어라."
"네, 네."
향아는 거울에 떠오른 구결을 하나하나 받아적었다.
100자가 넘지 않은, 짧은 구결이었다.
하지만 글자 하나하나가 서로 대비되고 그 안의 음률이 묘한 공명을 자아냈다.
향아는 계속해서 입안으로 그 구결을 굴렸다.
몸이 뜨겁고 어딘가 들뜨는 기분이었다.
"무엇이 보이지?"
"새카만 어둠이요. 밤? 아니, 그보다 훨씬 어두워요."
"보이지 않는다는 건 네 생각인가? 아니면 정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건가."
"……아. 새카만 어둠이지만 무언가 있어요. 커다란 달. 어둠 속에도 달은 항상 존재하고 있었어요."
"그래. 네가 얻은 건 무월이구나."
명한이 손끝으로 향아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그녀는 잠에서라도 깬 듯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눈을 깜빡이는 얼굴에는 당황밖에는 그려져 있지 않았다.
"도, 도련님 방금 제가 뭐라고 했어요?"
"달. 네가 얻은 건 달이다. 어둠이라 생각한 건 태양의 그림자. 그 속에 숨은 달의 형상이지.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는. 도가적 이치의 한 분류라고 생각하면 된다."
"양 속에 음이 있는……"
"일월교에서 부르기를 무월. 중원 전체를 다 놓고 살펴도 이와 비견될 무공은 손에 꼽는다. 기연이니 부지런히 되새기도록 해라."
"네, 네!"
향아는 다시금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자신이 깨우친 무월을 몸에 새기기 위함이었다.
"일월교의 비전무공이라. 이걸 향아에게 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던 거냐?"
"어째 말투가 조금 질투하는 거 같다?"
"질투는 무슨."
은소소는 살짝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샘내지 마. 네게 어울리는 무공은 따로 있으니까."
"흥. 질투한 거 아니라니까. 그보다 이게 다야? 향아에게 줄 무공 하나? 황제를 밖으로 빼돌리고 나면 시간이 부족할 거 같은데."
"생각보다 실전이 모자라긴 했지만, 예상 범주 안이야. 부족한 건 내가 채울 수 있어."
"네가? 무슨 의미야?"
"이거."
명한이 일월배심경의 표면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퉁, 하는 울림과 함께 표면이 물처럼 흔들렸다.
"뭐야?"
"무일. 무월과 무일은 본래 한 쌍으로 일월교는 언제나 남녀 교주가 함께 무공을 익히게끔 했어. 향아가 무월을 가져갔으니 남은 걸 내가 수습하는 거야."
"넌 일월교가 아닌데 그게 가능해?"
"난 가능해."
향아가 구결을 필사했기 때문에 습득이 가능했다.
무월은 빠졌으니 남은 무일을 익힌 것이다.
무월과 무일.
즉, 일월교의 비전무공이 전수됐다는 건 절차의 완수.
한 세대가 끝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무월과 무일의 전수가 끝나면 일월배심경은 다른 역할을 수행해. 전수자들이 제 몫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역할이지."
"거울이? 무슨 수로?"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심상으로 겨룰 수 있어. 만나봤던 사람, 혹은 자기 자신을 투영해서 겨룰 수 있지. 시간의 부족함을 채우기에는 이만한 기물도 없어."
"하! 세상에 별별 물건이 다 있다고 하더니."
은소소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심상으로 누군가를 투영해서 싸울 수 있다는 건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이들과 대결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전투광인 그녀에게는 더없는 희소식이었다.
"이제야 웃네?"
"시끄러워."
짓궂은 농담에도 미소는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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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군율휘는 황제를 설득.
짐을 챙겨서 곧바로 떠날 채비를 꾸렸다.
"용케 별말 없이 설득이 됐네요?"
"황상께는 춘방궁으로 처소를 옮긴다고 했다."
"춘방궁?"
"예전에 황상께서 좋아하시던 별궁이다. 황후마마께서 볕 드는 곳에 매화나무를 심어 두어 같이 술을 드시곤 했지."
"그랬군요."
정신이 온전치 않아도 자신이 좋아하는 건 기억한다.
조금은 씁쓸한 이야기였다.
"어쨌든 자네 말대로 처소를 옮기고 치료에 전념하면 황상의 용태는 호전이 가능한 건가?"
"천하에 귀의만큼 유능한 의원은 없습니다. 그가 하지 못하면 아무도 못 하겠죠. 게다가 제가 이래 봐도 백약문의 문주입니다. 모든 수단을 강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백약문이라. 들어본 것 같기도 하군. 자네만 믿겠네."
결심한 이상 행동은 빠른 편이 좋다.
일행은 최소한으로 짐을 챙겨서 곧바로 처소를 빠져나왔다.
길게 늘어진 통로에 황제는 잠시 당황한 듯하다 ‘허허, 궁이 삭막하구나.’라며 나름의 해석을 했다.
"소백. 올라가는 길에 다른 적은 없을까?"
선두에 선 건 명한과 은소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넌 뭐든 알잖아. 생각해 보니까 황제는 황제. 탈이라도 나면 이래저래 큰일일 거 같아서. 적이 있다면 미리 준비하려고."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몰라. 미로에 사는 마물이나 죄인 정도. 혹은……"
"혹은?"
"혈교와 거래를 한 우리 형제가 있겠지."
추측하건대 소궁 서열 5위에 위치한 나형.
"그가 우리를 노린다고?"
"혈교와의 거래 현장을 박살 냈다는 건 그놈도 알겠지. 그럼 거래의 증거가 잡혔는지 확인하고 싶어 할 거야. 흔적을 조금이라도 읽을 줄 안다면 우리가 아래로 떠났다는 걸 알겠지."
"그걸 예측하면서도 움직였다는 거야? 위험하지 않겠어?"
"우리끼리만 있으면 위험하지. 하지만 지금은 되레 안전해."
"지금은? 왜?"
명한이 답 대신 뒤편의 군율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당시 천하제일인에 가까운 사람으로 평가받던 인물이야.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그 힘은 여전하겠지."
"그래? 딱히 그런 느낌은 못 받겠는데."
"뭐.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아직 은소소는 볼 수 없는 영역.
하지만 명한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있었다.
어딘가 뒷방 늙은이 같은 군율휘나 그의 깊은 곳에 침잠된 기운은 그야말로 ‘대장군’ 그 자체였다.
능히 악불군과 비견될 정도.
‘덤비면 나야 좋지.’
든든한 보험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