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235)

내가 우습나?

통로를 얼마나 가로질렀을까.

명한은 솜털이 비죽 서는 살기를 감지했다.

모습을 감추고 기를 억누르고 있지만, 명한의 감각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묵혼공이 깊어지며 한층 깊어진 통찰의 감각이었다.

"……이렇게 기다리지 말고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건 어때?"

돌아오는 건 침묵.

하지만 몇몇 기척이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은밀함을 장점으로 삼는 적면의 특성대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드러난 이상 은밀함은 의미가 없지.’

손바닥 위의 장난감일 뿐이다.

쿵.

명한이 발로 땅을 찍고 떠오른 돌멩이를 사방으로 튕겼다.

"악!"

"윽!"

된소리와 함께 굴러떨어지는 붉은 가면의 무리.

혈교의 적면이었다.

"말했잖아. 기다리지 말고 나오라고."

"크윽! 모두 공격해라!"

기습이 실패한 이상 합공밖에는 없다.

사방에서 적면이 튀어나와 명한을 에워쌌다.

그 숫자가 족히 열은 넘었다.

예전 같았다면 꽤나 버거워했을 숫자.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무래도 너희와는 악연으로 끝날 거 같다."

허리를 축으로 타구봉을 돌린 뒤, 그대로 던졌다.

타앙. 탕. 탕.

벽을 타며 연달아 충돌하는 타구봉.

탄력이 속력을 더 붙여 순식간에 적면 무리를 후려쳤다.

제법 재주가 있어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실린 힘이 압도적이었다.

무기째로 튕겨 나갔다.

"크, 크윽! 고수다!"

"모두 전력을 다해라!"

일제히 작은 단약을 꺼내서 깨무는 적면의 무리.

가라앉아 있던 기도가 짚을 던진 모닥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진원진기. 아니, 그 수준은 아니네.’

아마도 마인 따위에게 실험하던 벌레나 약의 완화판.

적당하게 기혈만 자극해서 내공을 북돋고 있다.

"교를 적으로 돌린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갑절은 빨라진 속도로 적면이 달려들었다.

검, 도, 조.

무기도 제각각이었다.

"반대지. 너희가 날 적으로 돌린 걸 후회하게 될 거다."

명한은 타구봉을 핑그르 돌려서 장병기를 일제히 쳐냈다.

한 획에 여러 번의 변초가 있는 현란한 공격이었다.

손아귀에서 털린 무기들이 공중에 뜬 사이, 단병을 쥔 이들 사이로 뛰어들어갔다.

밀고, 당기고, 휘어 감는 절묘한 수가 연달아 펼쳐졌다.

극천일무기는 기운을 품는 심법이며 동시에 형을 담은 외공이기도 했다.

손을 통해 풀려나오는 투로는 적면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고등의 방식이었다.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어찌 이자가 이토록 강한 거지!?"

"도망쳐라! 우리 상대가 아니다!"

남은 놈들은 무너진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명한도 굳이 잡은 물고기에 힘 쏟지 않고 이들 뒤를 쫓았다.

그 거리가 고작 서른 족장이었다.

"이야아아아! 나쁜 사람!"

"황상은 우리가 지킨다!"

그리고 그 순간.

좌우에서 호랑과 호릉이 튀어나왔다.

앞서 사용했던 그물을 뿌리면서.

명한은 달려들던 기세가 있어, 이를 피하지 못하고 휘감겼다.

"하하! 잡았다!"

"에헴! 교룡삭에 걸리면 아무리 강해도 빠져나올 수 없어!"

명한이 힘을 주어 당겨 봐도 그물은 끊어지지 않았다.

엄청난 보물이라는 의미.

순식간에 전세가 일변했다.

"예상대로네."

하지만 명한은 당황하지 않았다.

여기까지의 상황은 모두 상정하에 있었다.

한 번 당해본 공격을 염두에 두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내.

"뒤, 뒤쪽에 적이다!"

"기습이다! 적이 난입했다!"

"뭐, 뭐야?"

계획대로 은소소와 향아가 혈교 무리의 허리를 끊었다.

성난 성성이의 울음과 쌍각사의 벼락 내려치는 소리가 통로를 타고 들려왔다.

딱 좋은 시점이었다.

"군 장군께서 너희 둘을 찾고 있다. 빨리 안 돌아오면 크게 혼날걸?"

"거, 거짓말하지 마! 넌 황상을 유폐시키려고 온 거잖아! 그런 속임수에 안 당해!"

"거짓말이 아니야. 군 장군께서는 너희에게 보여주라고 피리까지 내주셨는데."

"어? 그걸 네가 어떻게 가지고 있어?"

명한이 품 안에서 피리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호릉과 호릉의 얼굴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난 황상께서 편히 쉬실 수 있게 안내하고자 할 뿐이야. 왜 유폐라고 오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기 저 붉은 가면 놈들이야말로 황상을 해코지하는 나쁜 놈들이라고."

"지, 진짜?"

"바보야 속지 마! 황상이 황궁을 떠나서 왜 촌으로 가는데?"

"그건……"

황상께서 아프기 때문.

명한이 적당한 답을 입을 굴려는 순간.

예의 예감과 함께 솜털이 비죽 솟았다.

콰드득―!

바닥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건 그야말로 찰나.

명한이 발을 빼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평소라면 멀찍이 피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몸을 옭아맨 그물이 있었다.

"제법 감이 좋군."

"―!"

공격은 단발이 아니었다.

묵직한 장력이 연달아서 날아왔다.

명한은 몸에 달라붙은 그물 때문에 제대로 된 동작이 어려웠다.

중심이 무너진 채 연신 뒤로 물러났다.

장력이 스칠 때마다 상처가 늘어났다.

턱.

그리고 더 이상 물러날 공간이 없을 때.

붉은색 파도가 그를 정면에서 휩쓸며 다가왔다.

콰콰콰쾅!!

이번에는 피하지 못하고 정면에서 그대로 받아냈다.

통로 내벽이 무너지며 명한의 몸이 조각처럼 처박혔다.

입에서 분수처럼 피가 쏟아졌다.

"쿨럭! 쿨럭!"

"몸은 튼튼하군."

"……!"

적은 멈추지 않았다.

처박힌 명한을 향해서 수십 가닥의 강기 다발을 날렸다.

호를 그리며 날아오는 강기는 피할 곳도 피할 시간도 없었다.

명한은 몸을 웅크리며 반야의 힘으로 이를 견뎌냈다.

몸이 들썩이고 내장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크으윽."

눈이 핑핑 돌고 전신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었다.

이렇게까지 밀리는 건 악불군의 몸을 뒤집어쓴 교주와의 싸움에서도 없었다.

고통보다도 당혹감이 더 컸다.

"올 것을 예상하여 적의 허리를 자르고 두 아이를 구출한다. 생각은 좋았다. 하지만 역량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건 크나큰 실책. 교주님의 전언만큼은 전혀 아니었군."

"……왜 네가 선두에 있지?"

"이 무리를 이끄는 대장이 나다. 선두에 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쯧."

설정에서는 아니었다.

꾀가 많고 행동에 기민함이 있지만, 언제나 후위를 지키던 것이 적면귀 마골.

지금처럼 선두에서 용감하게 나서는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내가 아는 마골은 몇 년 후의 인간인가.’

과거의 마골은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젠장. 너무 믿는 게 아니었는데."

입안 가득 찬 죽은 피를 뱉어내며 명한이 몸을 일으켰다.

진탕된 속에 머리가 핑 돌았지만, 겨우 두 발 딛고 설 수 있었다.

"아직 일어날 수 있는 건가? 교주가 경고하던 건 네놈의 그 튼튼한 몸이었나 보구나."

"수작 부리다가 처맞고 도망친 네놈들 교주 말이냐?"

"……네놈은 그 입 때문에 단명하겠군."

"시끄러워. 기껏 계획 짜고 애들 부렸는데…… 된통 당한 터라 속이 쓰리니까."

우득. 우득.

몸을 흔들 때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환골탈태를 겪은 몸이지만, 이 정도로 맞으면 탈이 날수밖에 없었다.

‘내상이 꽤 깊어.’

평소보다 내공의 흐름이 어지러웠다.

"대가 센 놈이군. 하지만 그것도 지금뿐이다. 네놈의 목을 베어 교주께 선물로 가져가야 하거든."

"이놈이든 저놈이든 다들 날 왜 우습게 볼까."

하지만 죽지 않았다면 기회는 있다.

‘흡―’ 짧게 쉰 호흡 속으로 약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칠채향이 명한의 내상을 분석하여 직효성이 있는 약 성분을 배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 자동 회복 상태.

콰드드득―!!

그리고 이내 순식간에 터져나가는 그물.

교룡삭이라는 이름답게, 어마어마한 강도를 지닌 그물이었음에도 견디지 못했다.

이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금 명한이 불러온 파괴적인 기운.

극천일무기의 파괴력 앞에서는 교룡의 심줄이 아닌 강철이라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내 이름 석 자만 들으면 꼬리를 말고 도망치게 만들어 주마."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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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건 없다.

사람도 상황도.

명한은 잠시 자신이 취했었다는 걸 인정했다.

높아진 무공과 새로운 깨달음에 몇 가지는 단정하고 말았다.

그게 실수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몇 대 맞아주니까 내가 우스워 보이지?"

큰 걸음이 벼락같이 이어졌다.

몇 족장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서로의 얼굴이 손가락 마디 거리까지 다가왔다.

팽창하는 동공 속의 자신을 명한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촌각을 나눠서 사고를 병렬 구성하는 건 반야의 새로운 경지.

삼라만상을 꿰뚫는 절대의 진리는 사고의 폭을 압도적으로 늘려 주었다.

수십 가지의 정도가 유성우처럼 날아들었다.

"어림없다!"

반격의 수는 머리와 허리.

명한이 자연스럽게 몸을 회전하며 다리를 마골의 허벅지 옆으로 댔다.

축이 되는 건 맞닿은 점.

붉은색 강기가 볼을 스쳐 벽을 후려쳤다.

우르릉, 무너지는 소리는 그저 스쳐 가는 배경음.

명한은 축을 중심으로 몸을 돌려 타구봉이라는 무기를 횡으로 그었다.

퍼억!

손끝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

"제법 한 수는 있다 이거군!"

한 걸음으로 충격을 해소한 마골이 강기의 파도를 불러왔다.

내공을 바탕으로 하는 강력한 기공이었다.

몰아치면 그야말로 노도와 같이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한 번 당했던 걸 다시 당할 생각 따위는 없다.

웅―

잔 떨림과 함께 타구봉이 파도의 면을 때렸다.

마치 물 위에 떨어진 먹처럼 파도의 색이 순식간에 바랬다.

강기의 흐름을 끊는 절(絶)의 요령.

"불가능해!"

불가능을 외치게 할 만큼 절묘했다.

"닥쳐, 멍청아. 애들 둘을 미끼로 쓰는 새끼가 무에 대해서 뭘 안다고."

"감히! 하찮은 중원의 무공 따위로 교의 법을 상대하겠다는 거냐!?"

무덤의 바람처럼 찬 기운이 사방에서 명한을 옥죄였다.

말 그대로 혼의 기운을 사용한 술법의 일종이었다.

낯설고 이질적이라 뭇 사람이라면 기겁하고도 남을 기술.

하지만 명한은 뭇 사람이 아니다.

아는 것이라면 이 땅에 나은 자가 손안에 꼽히고, 담대함이라면 소림의 삼신승보다도 위다.

극천일무기의 기운을 극성으로 불러왔다.

악귀나찰과 같은 힘과 형상이 그의 몸 위로 구현됐다.

"아, 악귀!?"

"나찰이다. 어설픈 교리 따위로 육과 혼을 어지럽히는 네놈들을 직접 단죄하기 위해서 왔다."

"이익!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찬 바람이 손의 형상을 취하며 명한을 쥐어짰다.

음한 계열의 내공과 가깝지만, 그보다 훨씬 음험한 기운이었다.

죽은 지 오래되어 부패하고 병든 혼의 사기에 가까웠다.

혈교가 혼을 어떻게 쓰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꿇어라."

"……뭐!?"

명한의 한 마디에 손의 주인들이 무릎을 꿇었다.

결속이 강하지 않은 혼기 따위는 경지에 오른 명한의 묵혼공을 견딜 수 없었다.

타고나기를 혼의 주인이었던 천재의 무공이다.

그 기묘함은 마골의 어설픈 술법을 아득하게 초월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 너희를 쫓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계속 앞에서 날 방해한다면 너희부터 철저하게 뭉개주마."

"끄, 끄아아아아!!"

사역된 혼이 마골의 몸에 달라붙었다.

지독한 원념이 스며 들어가 그를 바닥부터 흔들었다.

정신이 무너지고 혼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무공에서도 술법에서도 그는 절대로 명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두 눈과 귀에 새겨 넣어."

팍. 마골의 몸에 새겨진 교주의 술법이 박살 났다.

협박에 가까운 이 충고를 들을지 안 들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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