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235)

말썽꾸러기

귀의의 치료는 두 시진이 넘게 이어졌다.

겨우 치료를 끝내고 나온 귀의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치료가 쉽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상태는 어때?"

"쉽지 않습니다. 워낙 만성적인 질병이라 병과 심리적 반응을 구별하기가 어려워요."

"원인에 대한 건? 뿌리 뽑을 가능성은 없어?"

"하려면 시간을 투자해서 차근차근 증세를 연구해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무리겠죠."

단순한 독이라도 50년이면 골수에 뿌리를 내린다.

만성이 된 증상이 병에 의한 것인지 독인지, 단순한 심리적 이상인지.

아무리 귀의의 능력이 좋아도 단시일에는 무리였다.

"장군. 상황이 이러하니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습니까?"

명한이 귀의에서 군율휘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덜컥 수락하기는 어렵네. 자네의 의도가 순수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황상과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 이 아래에서 기거했지."

"50년이면 충분합니다. 현 황실도 다 잊고 추격조차 안 하지 않습니까. 연 있는 몇 분을 모시고 있으니 그곳에서 기거하시죠."

"화무천과 그 연인 말인가?"

"네. 속세를 떠나서 살고자 하는 분들이라도 기거할 집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적당한 곳을 수소문해 두었습니다."

"……"

군율휘는 갈등했다.

지하에서 황제를 모시고 살기를 50년.

죽은 이가 수십이고 떠난 이가 그 몇 배다.

세월의 먹먹함과 마모된 감정은 이미 빛바랜 지 오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미련은 있다.

죽기 전에 황제가 다시금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아직 신용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앞서 왔던 이들보다는 낫다.

자유니 복권이니 그럴듯한 말보다는 치료와 은거를 권하는 쪽이 와닿았으니까.

"시간이 필요하네."

"이해합니다. 하지만 오래는 어렵습니다. 처음 이곳을 찾아왔던 자들이 곧 다시금 들이닥칠 터. 그때는 상황이 복잡해질 겁니다."

"알겠네. 하루의 말미를 주게나."

명한이 짧은 포권을 하며 물러났다.

50년의 시간을 끊고 다음을 선택하는 길.

하루면 길지 않았다.

#

"들었어? 들었어?"

"응. 응."

호랑의 물음에 호릉이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듣기 싫어도 밝은 귀의 둘에게는 너무 큰 목소리였다.

"장군님은 황궁을 떠나려는 걸까?"

"모르겠어. 황상도 함께 저들을 따라갈지 고민하는 거 같아."

"왜? 황상은 황궁에 있어야 하잖아."

"나도 몰라. 그냥 손님이라서 데리고 왔는데 뭔가 이상해."

호랑이 부루퉁한 얼굴을 한 채 가부좌를 틀었다.

모든 게 평소와 달랐다.

낯선 손님도 그렇고 황제의 반응도 그랬다.

하물며 하나뿐인 장군은 어떤가.

난생처음 보는 얼굴과 목소리였다.

"혹시 황상을 해코지하려는 거 아닐까?"

"해코지? 왜?"

"그렇잖아. 저번에 왔던 손님들은 황상에게 자유를 주고 본래의 위치를 찾게 해 준다고 했는데. 이번에 온 손님은 그런 말이 없어. 황상을 어딘가 안 좋은 곳으로 끌고 가는 거 아니야?"

"……확실히. 은거촌이라고 했지? 촌이면 굉장히 변방의 안 좋은 곳이라고 배웠어. 황제가 그런 곳으로 가는 건 유폐밖에는 없잖아."

"설마, 황상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호들갑 떠는 호랑의 말에 호릉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생각해 보면 군율휘의 그런 얼굴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

그만큼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의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내버려 두면 황상께서 촌으로 유폐되게 생겼어."

"그럼 어떻게 해? 장군도 고민하는 거 보면 어려운 일 아니야?"

"도움을 받아야지. 먼저 왔던 손님들은 황상께 본래의 자리를 약속했잖아. 황상이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던 것이 분명해. 우리가 도우면 좌, 우 장군이 아닌 천하 대장군 자리에 오를지도 몰라."

"할래, 할래. 나도 천하 대장군 할래!"

"그래. 우리가 아니면 누가 황상을 지키겠어."

결심이 선 듯, 호릉이 주먹을 쥐며 일어났다.

"어? 어디가, 호릉?"

"어디 가긴. 이번에 온 이들이 황상께 해코지하기 전에 일전에 왔던 손님을 찾아야지."

"찾을 수 있어? 위는 위험하다고 장군께서 그랬는데."

"괜찮아. 내가 얼마 전에 샛길을 발견했거든. 그쪽으로 가면 전에 객들이 왔던 통로로 빨리 갈 수 있을 거야."

아직 군율휘에게는 말하지 않은.

호랑과 호릉만의 비밀이었다.

"좋아! 우리가 황상을 구하자."

"응."

금세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

호릉과 호랑의 부재는 이내, 명한 등에게 발견됐다.

두 사람은 좌, 우 장군을 자처하며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갑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황궁 밖으로 나간 것 같네요. 흔적이 뒤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건 샛길인데. 두 녀석이 이 길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

"어느 쪽으로 이어집니까?"

"지하의 남쪽. 천산을 사분했을 때, 남서쪽에 해당하는 방향이네."

"우리가 내려온 방향 바로 옆이군요. 이쪽과 이쪽이 이어져 있는 겁니까?"

명한은 지하를 가로지르며 기억해둔 정보로 지도를 그렸다.

공란이 많았지만, 대략적인 방위 정도는 충분히 지적이 가능했다.

군율휘는 현재 위치와 명한 등이 온 방향 등을 고려하여 선을 그었다.

혈교와 거래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소궁의 통로 쪽이었다.

"소백, 이거 위험하다."

"응. 교주가 후속을 보냈다면 중간에 만날 가능성이 높아. 무슨 일 생기기 전에 먼저 가서 찾자."

"자네가 대신 가주는 건가?"

"장군은 황상을 지켜야 하니 움직이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두 아이를 내버려 둘 수도 없고. 두 아이는 저희가 구해오겠습니다."

호릉과 호랑은 서복에 대한 정보 때문이라도 내버려 둘 수 없다.

명한이 바닥 흔적을 되짚었다.

"보폭으로 보건에 그리 멀리까지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나는 그대들을 외인이라 욕했는데, 우릴 위해 움직여 준다는 건가?"

"지하에서 50년 묵은 장군의 한 소리에 욱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사라진 건 아이들 아닙니까. 아이들 목숨으로 셈하는 습성은 없어요."

"……그런가."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대충 방향을 잡은 명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는 전력으로 달릴 터라 내공부터 끌어 올렸다.

"혹시 모르니 이걸 가지고 가게."

그렇게 떠나기 직전, 군율휘가 작은 피리 하나를 명한에게 건넸다.

무늬 없는 평범한 모양의 피리였다.

"상황이 버겁다고 생각되면 피리를 불게. 도움이 될 걸세."

"이 피리가 말입니까?"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맞네."

"……뭐. 쓸 상황이 생긴다면 의지해 보죠."

의아하지만 일단은 받아 두었다.

"두 녀석을 부탁하지."

답 없이 명한이 달렸다.

#

"그러니까 그 노인……아니, 황상께 손님이 찾아왔다?"

지하 미로 어딘가.

호릉과 호랑은 일단의 무리와 만났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서 있는 건 붉은색 가면의 남자.

"응. 응. 장군께서 말한 배옥잔을 가지고 왔었어."

"같은 손님인 줄 알았는데, 황상께 해코지할 것 같아."

"너희는 황상을 돕는다고 했지?"

"황상을 좀 도와줘."

번갈아 쏟는 이야기에 남자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두서없는 말이라 처음에는 의아해했는데, 조금 더 들어보니 이해가 됐다.

배옥잔을 가지고 간 손님이라면 종주를 습격한 사십팔궁의 소백.

그렇다면 눈앞의 두 아이가 말하는 ‘도움’이라는 건 소백의 반대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봐. 황상께 무슨 문제가 생긴 거지?"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이번에 온 이들은 황상을 유폐 보내려고 해."

"유폐? 황궁이 아닌 곳으로?"

"응. 응. 은거촌이라는 곳으로 황상을 옮긴다고 했어. 장군도 그걸 고민하고. 분명 황상을 내쫓으려는 못된 계획일 거야."

"저런. 황상께서는 본래의 고귀하신 신분을 되찾으셔야 하는데. 촌구석으로 가실 분이 아니지."

"그러니까!"

반색해서 소리치는 호릉과 호랑.

가면의 남자는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황상을 찾은 손님이 전부 몇 명인지. 어떤 복장을 하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럼 황상을 도와줄 수 있어?"

"물론이지. 나는 황상께 충성을 바치는 좋은 신하거든."

"응. 응. 그럼 우리가 보고 들은 거 전부 말해줄게."

"후후, 착하네."

남자는 허리를 펴며 호릉과 호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꽤 부드러웠으나 가면 속 미소는 더없이 차가웠다.

이런 흐름이라면 애초 계획보다 일을 수월하게 집도할 수 있어 보였다.

"나는 종주와는 다르다. 적면귀(赤面鬼), 마골의 이름으로 네놈들을 처리해 주마."

종주와 함께 파견된 혈교의 주력.

적면의 수장이었다.

#

명한은 곰곰이 생각했다.

확실히 지하 미로에 혈교가 개입한 건 습작에 없던 일이다.

이 시기라면 아직 주인공 소백이 큰 활약을 하기 전.

대전이 끝나고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중원에서 혈교와 엮여 든다.

습작을 기준으로 하자면 이때의 혈교가 어땠는지는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하지."

"응? 뭐라고 했어?"

"추측. 호릉과 호랑을 쫓았을 때 우리가 만날 적의 가능성."

혈교는 기본적으로 교주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종교 집단과 같다.

대사제 격인 종주가 존재하고 그 아래 여러 사제가 분포하지만, 실질적인 무력 분파는 아니다.

일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하는 무력 집단은 크게 셋.

붉은 가면의 적면, 푸른 가면의 청면, 검은 가면의 흑면이 있다.

각기 다른 성격에 제각각의 능력을 지녔다.

‘셋 중 이번 일에 엮일 이들이라면…… 적면인가.’

청면은 지나치게 행사가 요란하고 흑면은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습작의 묘사를 따르자면 ‘은밀을 기함에 있어서는 적면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만약 이들이 호랑과 호릉을 이미 만났다면."

고작 십 대 중반밖에 안 된 이들이다.

어떤 생각으로 처소를 벗어났든, 세 치 혀로 현혹하는 건 쉽다.

그게 적면이라면 더더욱.

‘적면의 특성상 현지 전력을 이용해서 기습하는 걸 즐겨하지.’

이른바 자원충당에 능한 부대.

현지에서 혈교 추종자를 뽑고 이를 이용해서 공작을 벌이는 걸 즐겨한다.

호릉과 호랑이 찾아왔다면 분명 이용하려고 들 터.

"소소, 네가 성성이를 맡고 향아 네가 쌍아를 맡아라."

"응? 나랑 저 원숭이랑 같이 가라고?"

"우리가 만나게 될 적은 아마도 적면이라는 혈교 무리일 거야. 호릉과 호랑을 앞세워서 우리를 기습하려고 하겠지. 방향과 시간을 보자면 조우 지점은 대충 이 정도."

툭툭. 바닥을 긁어 지도를 만들었다.

"승기는 우리에게 있지만, 쟁점은 그게 아니야.

"호랑과 호릉을 무사히 구하는 거."

"흥. 둘은 아마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야. 싸움이 격렬해지면 이래저래 버림패로 쓰일 가능성이 높지."

"위험하겠네."

"그러니 가능성을 줄여야지."

바닥에 다시 몇 개의 선을 그었다.

"주력을 이렇게 분리해서 독대할 공간을 만들어 줘. 그사이에 제압을 하든 설득을 하든 할 테니까."

"적의 대장도 함께 오는 거 아닌가?"

"예상대로라면 놈은 선두에 있지 않아."

적면은 그런 부대다.

명한은 자신의 설정을 믿기로 했다.

"놈들은 사람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인간말종이야. 손속에 자비를 두지 마."

"흥. 처음부터 내 검에 자비 따위는 없었어."

"도련님, 말씀을 명심할게요."

툭툭. 다시금 바닥을 두드리는 명한.

계획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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