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235)

50년의 연극

화려하긴 화려하지만, 어딘가 모자란 방.

명한이 안쪽으로 들어가며 처음으로 받은 감상이었다.

분명, 금색 장식품과 멋들어진 그림 따위가 걸려있긴 한데 어딘가 조악했다.

솜씨 없는 자가 마음대로 방치한 모습이었다.

"그대들이 짐의 객을 자청한 자들인가?"

그리고 그 가운데, 화려한 옥좌에 몸을 기대고 있는 한 남자.

길게 기른 수염은 하얗게 새, 바닥까지 닿아 있었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된 분위기를 풍겼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상. 소인 소백이라 하옵니다."

"호오. 예의를 아는 자로고. 잘 왔다. 짐은 관대하여 객을 소홀히 대접하지 않지. 좌우 장군들은 뭐 하고 있는가. 객에게 먹고 마실 것을 내오도록 하여라."

"네, 황상!"

"준비할게요!"

장군이라 불린 호릉과 호랑이 바삐 움직였다.

금색의 쟁반 위로 대충 구운 고기와 늘어진 풀떼기가 담겨 나왔다.

그래도 찻물을 담은 잔은 오색 빛의 아름다운 것이었다.

어느 하나 일관된 것이 없었다.

"먼저 목을 축이게나."

"감사합니다, 황상."

명한은 망설임 없이 차를 쭉 넘겼다.

쓰고 떫은. 잡초를 물에 섞어 우려낸 듯한 엉망인 차였다.

따라서 잔을 들었던 은소소와 향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맛이 어떤가?"

"역시 황궁의 물건답게 풍미가 대단하군요."

"하하하. 들었나, 좌우 장군. 이번 객은 이전의 그 무례한 자들보다 훨씬 더 예의를 아는 친구야. 마음에 드는군."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황상."

명한은 시종일관 예의 바른 모습을 취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라 은소소와 향아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일단은 분위기를 읽고 침묵을 유지했다.

명한이 이러는 거라면 필시 생각이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그럼 묻지. 황궁까지 짐을 만나러 온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황상의 존안을 뵙고 삼생의 복을 누리는 것이옵니다."

"허허허. 그럼 두 번째는 무엇인가?"

"황상께서 평소 술을 즐겨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잔을 바치고자 왔습니다. 배옥잔에 술을 따르면 싸구려 술도 명주가 된다 하지요."

"오, 오오오. 천하의 명기로구나. 이걸 짐에게 선물한다 이건가?"

"네, 황상."

명한은 배옥잔을 노인에게 건넸다.

대단한 보물이기는 하지만, 명한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혹시 세 번째도 있는가?"

"송구스럽습니다만, 황상의 명경을 한 번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호오. 짐의 일월배심경(日月倍心鏡) 말인가?"

"네. 소인의 일평생 하나 있는 소원입니다."

명한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일월배심경.

당시 황제였던 도력제가 몸을 피하며 유일하게 챙긴 물건이다.

고작 거울 따위가?

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이 거울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신교의 전신, 일월교의 교주였던 한 인물이 당시 황제에게 선물했던 보물.

즉, 일월교를 상징하는 신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상징성만이 다는 아니지.’

실제 가치는 거울에 숨겨진 문구.

일월교의 비전무학, 무월(無月)과 무일(無日)의 구결이었다.

"이거 재미있는 일이로구나. 전에 방문했던 객들도 짐의 명경을 탐하더니. 짐의 거울이 그리도 훌륭하다고 소문이 난 겐가?"

"황상의 거울이 천하의 보물임은 뭇 사람이 다 아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소인, 그 보물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겁니다."

"흐음. 흠. 좋다, 좋아. 객의 바람을 외면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 자……"

"아니 되옵니다, 황상!"

노인이 허락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노호와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솜털이 곤두설 것 같은 맹렬한 기세였다.

"어찌 이런 외인에게 황궁의 보물을 내어줄 수 있습니까!"

큰 발걸음으로 들어오는 풍채 좋은 노인이었다.

황금색 갑옷을 전신에 두르고 손에는 팔척의 언월도를 쥐었다.

삼국지의 관우를 연상시키는 인물이었다.

"으음. 군 장군이 왔군."

"잠시 궁을 비웠을 뿐인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호릉, 호랑. 황상을 지키지는 못할 망정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게냐!?"

"히익! 죄, 죄송해요."

"죄, 죄송합니다."

언월도로 바닥을 쿵, 찍으며 쏟아내는 노호성.

호랑과 호릉마저 움츠러들며 감히 기를 펴지 못했다.

"군 장군. 너무 그리하지 말게. 좌우 장군이 짐을 생각해서 객을 모셔온 것 아닌가. 이들도 나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네. 보게나. 짐을 위해 이렇게 선물까지 챙겨왔다네."

"어허, 황상!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객이라 칭하는 이들은 모조리 도둑이라고. 어떻게 하면 황상의 금은보화를 훔칠 수 있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놈들입니다!"

"끄응. 군 장군……"

"황상!"

"아, 알겠네. 안 받으면 되지 않나. 뭘 또 그리 역정을 부리는지."

거듭되는 호통에 노인마저 고집을 꺾었다.

호칭은 황상이지만, 실질적 우위는 군 장군이 위에 있는 모습이었다.

‘흠―!’ 하고 짧게 콧방귀를 뀐 군 장군이 이제는 명한을 돌아봤다.

"가져온 짐은 모두 챙겨서 썩 황궁을 떠나라."

"……"

"내 말이 안 들리는가? 황상의 체면이 있으니 내 그네들을 헤치지는 않겠다. 어서 짐을 챙겨서 물러나라."

"군율휘. 금의위 수장, 군 장군이십니까?"

"……!"

처음으로 군 장군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하니 아직도 살아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네놈은 누구냐? 설마 그자가 황상을 노리고 사람을 보낸 것인가?"

"그자?"

"우협 말이다, 우협!"

우협. 현, 황제의 어릴 적 이름이다.

즉, 전대 황제 도력제를 죽이기 위해 보낸 사람이라 착각한 것이다.

명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오래전에 잊힌 일입니다. 이런 지하 깊숙한 곳까지 목숨을 노리며 찾아올 사람은 없지요."

"그럼 대체 뭘 원하는 거냐!? 네놈도 그자들처럼 복권 따위를 운운하는가!?"

"……복권이라. 앞서 찾은 객이라는 자들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흥. 어설픈 꾐에 불과하다. 궁중 암투의 더러운 시궁창으로 다시금 걸어갈 것 같은가?"

"그것이 싫어 이리 숨어 살고 계신 겁니까?"

"숨어 살기는 누……"

"군 장군. 지금 저게 무슨 말인가? 지하라니? 숨어 살다니?"

"화, 황상."

노인의 상태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말투와 행동은 이상해도 이지는 분명했던 인물.

눈동자가 흐려지더니 넋 빠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 아바마마는 어디에 있는가? 누이는? 왜 금의위들은 없지!?"

"황상! 정신 차리십시오! 황상!"

"누구냐!? 거기 누구야!? 누가 날 노리고 있는 거지!? 너희는 대체 누구냐!? 나는 이 나리의 황제니라! 감히 누가 짐을 노리는 거냐!? 오지 마라! 오지 마!!"

"화, 황상!!"

사방을 휘젓고 알 수 없는 말을 쉼 없이 뱉었다.

그 모습은 이견 없는 광인의 그것이었다.

‘광증이 도져 폐위된 도력제.’ 그 설명이 지금의 모습 하나로 설명이 되었다.

"제가 돕게 해 주십시오."

지켜보던 명한이 한 걸음 나섰다.

"뭐!? 네놈이 찾아온 탓에 황상께서 저렇게 되신 것 아닌가!? 감히 어디서!"

"광증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면 임시적인 조치가 가능합니다. 여기 있는 귀의는 천하를 다 털어도 몇 없는 신의. 광증을 억누를 수 있습니다."

"……저, 정말인가?"

"악의가 있었다면 장군께서 오시기 전에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황상께 있으니, 의도는 모두 순수합니다."

"……"

군 장군. 군율휘가 잠시 고민했다.

낯선 이들에게 황제를 맡겨도 되는 것일까.

"반드시 치료해야 할 걸세."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노인의 앞에서 비켜서며 으름장을 놓았다.

걱정과 떨림은 전혀 감추지 못한 채.

"귀의."

"충분합니다."

귀의가 소매를 걷고 나섰다.

#

귀의가 치료에 전념하고 있을 때.

명한은 일행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잠깐, 이야기를 좀 하세."

그리고 그 뒤를 군율휘가 뒤따랐다.

"군 장군께서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 건가요?"

"휴우. 우리끼리 있으니 그런 호칭은 넣어 두게나."

"흐음. 그럼 군 선배라 칭하겠습니다."

명한은 짧은 포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호칭을 뗀다는 것의 의미는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보게나. 이곳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었지?"

"적어도 현 황실에게서 들은 건 아닙니다. 그쪽과 관계도 없고요."

"정말인가? 아직도 황상을 노리는 무리가 있는 건 아니고?"

"벌써 50년도 지난 일입니다. 관계된 이들도 죽거나 떠나 없고, 있다 해도 다 잊었습니다. 이런 지하 깊숙한 곳에서 사시면서 아직도 두려우신 겁니까?"

"두렵지. 평생을 그렇게 두려워했네. 저분을 지키지 못할까 봐. 후에 황후마마를 볼 면목이 없을까 봐."

깊은 한숨을 토해내는 군율휘.

가득 새겨진 주름과 마른 피부에서 그의 진심이 처음으로 엿보였다.

"황상께서는 그날 이후로 계속 광증에 시달리는 겁니까?"

"……50년이네. 50년 동안이나 지속된 병이지. 천산 아래 영맥을 찾아 그 기운을 붙들어 두지 않았다면 이것마저도 어려웠을 거네."

"그럼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

"당시 화무천이 안내해 준 장소네. 처음에는 황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지만, 후에는 이곳에 황상의 병증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아차렸지. 한 해 두 해 그렇게 피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흐르고 말았다네."

"이 안을 황궁으로 착각하며 말이군요."

군율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착각이고 환상에 의거한 놀이임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유지하는 건 그것이 유일한 해법이었기 때문.

자신이 모시는 황제의 안정을 위한 평생에 걸친 연극이었다.

"호릉과 호랑은 누구입니까?"

"당시 이곳으로 함께 도망쳐 나왔던 이들의 후손이네.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이 이곳 생활을 견디지 못해서 도망치거나 죽었지만, 이 아이들만큼은 남았지."

"후손? 황족이라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네.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남몰래 황가를 따르던 가문이 있었지. 서복이라고. 지금에야 기억하는 이도 없지만."

"……"

기억하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

"후우. 그럼 자잘한 이야기는 이제 됐네. 본론으로 들어가지. 지하 깊은 곳까지 이유 없이 찾아오지는 않았을 터. 목적이 무엇인가?"

한 호흡 고르고 군율휘가 화제를 전환했다.

본론이었다.

"황상의 명경을 보는 것…… 하나로는 납득이 안 되는 겁니까?"

"자네 말고 앞서 찾아온 자들이 있었네. 50년에 걸쳐 나를 찾은 건 화무천이 전부였지. 우연하게도 두 무리가 한 번에 우리를 찾았다고는 믿을 수 없네."

"앞서 찾은 무리. 그들은 뭘 원했습니까?"

"자유. 우리에서 자유를 줄 테니 따르라 하더군."

"거절하신 겁니까?"

"냄새가 고약했으니까."

"냄새?"

"짙은 피 냄새였네. 황실의 금의위로 수천수만의 죽음을 엿봤지만, 그렇게 짙은 피 냄새는 처음이었네. 황상께서 배옥잔을 원한다는 이유로 일단 돌려보냈었지."

"그렇게 됐던 거군요."

어째서 종주가 배옥잔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럼 앞서 찾아왔다는 건 혈교의 교주인가?’

한때 중원 제일에 거론되던 군율휘를 긴장시켰다면 보통 사람은 아닐 터.

떠오르는 사람은 소수였다.

"자, 이야기는 그만 돌리고 말해보게. 자네가 원하는 건 뭐지?"

"……"

일월배심경의 무공.

답은 있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명한이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마음에 드는 답을 찾아냈다.

"은거촌. 들어오시겠습니까?"

50년이면 충분하다.

명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