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235)

지하의 황제

지하로 연결된 길은 멀고 복잡했다.

명한이라고 해도 순식간에 오고 갈 수는 없었다.

길에 산재한 마물과 죄인 등을 상대하며 최대한 걸음을 서둘렀다.

"호오. 이놈 몸에도 벌레가 잠들어 있군요."

그렇게 때려잡은 몇 놈의 몸에서 예의 벌레를 발견했다.

극천마인이라 부르던 인형 몸속에 있던 벌레였다.

"활성화된 상태인가?"

"아뇨.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몸 안에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배를 불리던 참이죠. 적당히 크고 나면 벌레의 주인이 술법을 사용해서 활성화했을 겁니다."

"이 지하 미로 안쪽에 미리 준비해 뒀다는 거네."

"상당히 솜씨가 좋습니다. 벌레. 고를 다룸에 있어 중요한 건 기생하는 대상과 벌레의 균형. 과하게 쓰면 숙주가 죽고 반대면 벌레가 죽는 법이죠. 벌레를 쓴 인물은 상당히 경험이 많고 실력이 좋습니다."

"역시 충사일까?"

"독곡이 무너진 이상 당장 떠오르는 건 그들밖에 없군요. 애초에 큰 기반 없이 살던 이들이니 혈교와 손을 잡았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벌레. 흔히 고라 불리는 물건은 알면 대응이 쉽지만, 모르면 까다롭다.

특히, 혈교처럼 술법을 주로 쓰는 이들과 엮이면 그 까다로움은 몇 배.

‘대전에서 휘말리는 이들이 다수 나오면 곤란한데.’

사십팔궁, 대전의 인원만 수백 명을 넘어선다.

누가 벌레에 당했는지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귀의, 벌레를 찾거나 죽일 방법. 해결할 수 있을까?"

"도련님께서 가진 만독비전이 필요합니다. 이런 존재는 독이나 약 하나만 가지고는 상대가 어렵거든요."

"필요하면 얼마든지 봐. 오독문은 독과 약의 경계가 없으니까."

"후후후. 역시 도련님을 따르기를 잘했다 싶습니다."

귀의가 만족한 얼굴로 웃었다.

백약문 출신으로 독을 탐구하다가 쫓겨났으니, 작금의 상황은 그에게는 최고였다.

마음껏 독을 연구하면서도 문파 자체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도련님을 평생 따라야지.’

생각은 더욱 단단해졌다.

"소백, 앞에 짐승의 기척이다."

"흠. 예전 쌍아의 수준인가. 수준이 올라가는 걸 보니 심처에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머리 위로 떠오르는 알림 따위는 보지 않아도 충분하다.

피부로 느껴지는 긴장감이 상층과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깊어지고 있다는 의미.

"자자, 다들 좀 더 힘내보자고."

"평생 휘두를 검을 여기서 다 휘두르는 기분이네."

"힘내요, 아가씨."

무기를 꺼내 들었다.

#

어느 정도 깊이 내려왔을 때.

명한은 주변 분위기가 달라짐을 느꼈다.

전까지가 야생의 동굴이었다면, 이곳은 그래도 정돈된 갱도였다.

사람 손길이 닿은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이거 누가 산 흔적이죠?"

"발자국도 여럿이고 중간중간 사람이 보수한 횃대도 있네. 숫자는 모르겠지만, 이 아래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건 확실해."

"하지만 누가요? 이곳은 신교에서도 거의 버려둔 장소 아닌가요?"

"글쎄. 이 아래는 워낙 상상치도 못할 사람들이 많은 터라."

명한도 전부를 알지는 못한다.

설정 자체도 천마에게 패한 무인이나, 각종 기인이사.

뭉뚱그려서 표현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꼽자면 역시 그 사람인가.’

역사서의 뒷이야기처럼 넣어 둔 설정.

짐작 가는 인물은 있다.

"……음. 잠깐, 다들 멈춰."

추론을 이어가던 명한이 걸음을 세웠다.

길게 뻗은 통로의 중앙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특별함은 없는 터라 은소소 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냄새인가?’

하지만 명한에게는 무언가 독특한 냄새가 느껴졌다.

"쉬익―!"

"크르릉!"

그리고 그와 동시에 쌍각사와 성성이가 크게 반응했다.

굉장히 역한 냄새를 맡은 듯 명한에게서 떨어져 물러났다.

주인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사역수치고는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칠채향도 반응하네. 이건 일종의 독인가?’

다만, 사람에게는 유해하지 않은 종류.

영물을 포함. 짐승에게 불쾌감을 주는 향이었다.

"쏴! 지금이다!"

"한 번에 잡아들여!"

순간, 기다렸다는 듯 좌우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한과 향아조차 파악하지 못한 절묘한 기습이었다.

어부의 어망과 닮은 굵은 망이 통로 전체를 꽉 채우며 일행을 뒤덮었다.

‘이따위 그물 따위!’ 은소소가 바로 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챙―!

"뭐?"

하지만 바위도 무처럼 베는 그녀의 검이 그물에 막혔다.

놀란 얼굴도 잠시, 그물은 삽시간에 일행을 덮고 손발에 착 달라붙었다.

단순히 끈을 묶어 만든 물건은 아니었다.

"하하하! 잡았다, 잡았어!"

"보라고! 내가 말했잖아. 이렇게 묶어 두면 쉽다고."

"역시, 호릉은 똑똑해!"

그물에 묶인 일행을 보며 기뻐하는 목소리의 주인.

‘어린애?’ 그건 고작해 봐야 10대 중반이나 됐을까 싶은 소년 소녀였다.

엉성하게 짠 의복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사아아아!!"

"크르릉!!"

"이크! 너희는 다가오지 마!"

뒤늦게 쌍각사와 성성이가 화를 냈지만, 두 사람이 손을 휘두르자 다시 물러났다.

둘에게만 작용하는 독한 냄새가 접근 자체를 불허하고 있었다.

이런 대응에 굉장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너흰 이곳의 주민인가?"

명한은 상황에 침착하게 대응하고자 했다.

희희낙락 웃고 있는 소년과 소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 아직 멀쩡하잖아?"

"이상하네. 그물에 걸리면 말도 못 하고 시름시름 앓아야 하는데."

두 사람은 그런 명한이 신기한 듯 앞으로 다가왔다.

까만 눈동자에 옥빛의 투명한 피부.

지하의 먼지를 제외하면 어딘가 신기할 정도로 맑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우릴 왜 습격한 거지?"

"와. 정말로 아직 멀쩡해. 신기하다, 신기해."

"답은 안 할 셈인가? 우리가 무슨 죄라도 지었나? 갑자기 공격한 이유를 알고 싶다."

"그건 말이지…… 뭐였지, 호릉?"

"바보야. 뭐긴 뭐야. 이곳을 넘는 사람은 누구든 제압하라는 황상의 명령이 있었으니까 그렇지. 우리는 무려 금의위라고."

"아, 맞다! 우린 금의위라고! 에헴!"

황상과 금의위.

밖에서 언급했다가는 3족이 멸하고도 남을 위험한 단어였다.

‘그럼 역시 이곳에 그 사람이 있는 건가.‘

하지만 명한에게는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상정한 여러 상황 중에서는 납득이 되는 쪽이었다.

"이곳에 황상께서 기거하시는 건가?"

"……어? 너, 황상을 알아?"

"중원 전역을 지배하시는 황상을 어떻게 모를까. 그 용안을 한번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이렇게 찾아온 거였다."

"그럼 너 황상의 손님이야?"

"보다시피 황상께서 찾아 헤매는 배옥잔도 가지고 왔는걸."

명한이 품 안의 잔을 꺼내서 슬쩍 보여 줬다.

소년과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풀쩍풀쩍 날뛰었다.

"어떻게! 큰일 났어, 호릉! 우리 황상의 손님을 잡았나 봐!"

"바보야, 내가 그러니까 신중하자고 그랬잖아!"

"호릉이 언제!? 나한테만 역정이야! 바보, 바보!"

"에잇! 시끄러워! 어서 이 그물이나 끌러 봐!"

두 사람은 연신 펄쩍이며 일행을 묶은 그물을 풀어냈다.

안에서 밖으로 푸는 건 어려워도 밖에서 안으로 푸는 건 쉬운 구조였다.

이내, 일행은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 소백, 검을 휘두르고 싶은데."

"참아. 저들하고 싸우면 일이 복잡해져."

"쯧."

묶인 것에 화가 풀리지 않은 은소소를 뒤로 명한이 나섰다.

"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소백. 뒤에는 은소소, 향아, 귀의라고 한다. 너희 이름은 뭐지?"

"난 호랑."

"나는 호릉이다. 우리가 너흴 공격해서 묶어 두었던 건 비밀로 해 줬으면 해."

"비밀로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건가?"

"황상께서는 손님을 좋아하거든! 손님을 다치게 하면 큰 벌을 받을지도 몰라!"

"조용히 해, 호랑!"

호랑과 호릉.

비슷한 이름과는 다르게 꽤 대비되는 성격이었다.

명한이 짧게 주억거리며 배옥잔을 꺼내서 앞으로 내밀었다.

"잔에 어울리는 술도 가지고 왔어. 괜찮다면 우리를 황상께 안내해 주지 않을래?"

"우리 잘못은 얘기 안 하는 거지?"

"다친 사람도 없으니까."

"히히히. 이 사람 꽤 괜찮은 거 같다. 그치, 호릉?"

"에잇. 조용히 하라고. 크흠. 우린 금의위니까 조용히 따라와야 해. 소란 피우지 말고. 알았지?"

"물론이지. 황궁에서는 금의위를 따라야 하는 법이니까."

"흐, 흐흥. 뭘 좀 아네."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살짝 콧대 세운 호릉의 뒤를 따라 일행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쌍각사와 성성이가 뒤늦게 따라붙었다.

#

호랑과 호릉을 따라가기를 잠시.

통로의 분위기도 다시 한번 바뀌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사람 손길이 닿은 모습이었다.

벽마다 달린 조명과 어설프게나마 그려진 그림.

구석구석 보이는 조각이나 장식품 따위는 이 안쪽을 꾸민 사람이 있다는 걸 증명했다.

"화려하게 꾸며 두었네. 황실이라 그런가?"

"히히히. 뭘 좀 아는군! 여기는 황상께서 머무는 황궁이라고. 번쩍번쩍하게 꾸며 두었지."

"이 모두를 너희 둘이서 다 한 건가?"

"우린 금의위니까. 황상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어."

황상이라 불리는 사람을 제외하면 다른 인원은 거의 없다는 말.

’그럼 이 아래에서 몇 명만 살았다는 건가.‘

명한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다 왔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황상께 알현을 허락받아야 하니까."

"음. 여기서 기다리지."

이내, 너른 공터에 일행이 멈추고 호릉과 호랑이 안으로 들어갔다.

"소백, 이게 무슨 일이야? 저 꼬맹이들이 누군지 알고 있어?"

"저 둘이 누구인지는 나도 정확하게는 몰라. 대신, 황상이라 불린 남자는 누군지 알 것 같아."

"진짜 황상은 아니지?"

"진짜야."

"……뭐?"

"예전에는. 광증이 도져서 폐위된 도력제에 대한 이야기. 들어봤지?"

은소소가 입만 벙긋거렸다.

무림이 아닌 관의 일은 관심이 없지만, 도력제는 워낙 유명했다.

대략 50여 년 전, 황위에 오른 황제가 광증에 도져서 수많은 이를 도륙한 사건.

후에 반란이 일어나 황제는 폐위.

결국, 지금의 황제가 보위에 올랐다.

"저 꼬맹이 둘이 말한 황제가 그 도력제라고?"

"응. 당시 황제는 광증이 도져서 모든 이를 적으로 돌렸지만, 한 사람만큼은 그를 보호했어. 당시 금의위 수장이었던 군율휘. 천하제일에 가까운 무력을 가지고 있던 무인이기도 했지. 사방의 창과 칼을 피해서 황제를 숨긴 거야."

"이곳, 천산 아래에?"

"응. 당시 신교는 한창 세를 늘리던 시기거든. 관과 무림의 관계 때문이라도 여기는 건들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거지. 당시의 천마 화무천의 도움을 받아서 지하에 터를 잡았어."

"맙소사. 신교 아래에 폐위된 황제가 살고 있었다니. 이걸 아무도 몰랐어?"

"천마는 알지. 극소수의 사람도. 다만, 이를 드러낼 이유가 없으니 다들 쉬쉬했을 뿐."

비사 중의 비사.

많은 이들의 이해가 일치하여 침묵으로 묻혀 있던 일이다.

’하지만 그걸 누군가 들추고 있어.‘

배옥잔은 분명 황제를 위한 물건.

"황상께서 허락하셨어! 너희 모두 들어와!"

순간, 명한의 상념을 끊으며 호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엿보이는 몇 사람의 음영.

’자세한 내막은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겠지.‘

명한이 손님의 얼굴을 한 채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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