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흐름
명한은 가만히 악불군을 바라봤다.
그는 이미 죽어 이곳에 남은 건 육체뿐.
조각조각 갈라진 혼은 흐름 속에 녹아든 채,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명한은 무언가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
그건 일획(一劃).
가죽만 남은 악불군의 마지막 한 수였다.
어쩌면 무너지는 시체의 우연한 동작일지도 모르겠으나, 명한은 다르게 봤다.
잔존한 사념의 마지막 집념.
자신이 쌓아 올린 업적에 대한 열망이었다.
[자하진경(紫霞眞經)을 획득했습니다]
알림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명한은 눈을 감고 악불군이 남긴 마지막 획을 되새김질했다.
이치는 아직 미진하나 그 깊이는 어렴풋하게 이해가 됐다.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 그런 경지였다.
호흡 속에서 자하의 기운이 침잠했다.
"축하해, 소백."
감았던 눈을 반개하자 은소소가 웃음으로 반겼다.
"티끌을 겨우 건졌을 뿐이야."
"그래도 그게 어디야. 지고의 경지에 다다랐던 무인의 심득이라고. 그 일부라도 얻을 수 있다면 모두가 발 벗고 뛰어올걸?"
"그런가. 혼자서 얻은 건 좀 미안한데?"
"무리는 언제나 연이 닿는 자에게 전해지는 법이지. 악불군이 전하고자 한 사람은 내가 아닌 너야. 그러니 미안해할 것도 없지."
은소소의 말대로.
악불군은 자신의 혼기를 느낄 수 있었던 명한에게 유지를 남겼다.
부서진 채 농락만 당하던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해 준 보상이기도 했다.
"도련님 그럼 그 교주라는 자는 완전히 사라진 건가요?"
"여기서는. 술법으로 악불군을 조종하던 사념만 축출한 거야. 타격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제거한 것도 아니지. 대전을 노리고 있다면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어."
"그런 사람하고 또 싸우는 건 무서운데……"
"너무 그렇게 두려워할 것 없어. 술과 법이 낯설어 두려움을 느끼는 건 알지만, 무의 극치에 닿으면 결국 모든 건 같아져.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모자라지도 않지. 일월을 갈고 닦으면 다음엔 네가 이길 수도 있다."
반은 덕담이고 반은 진담이다.
향아는 몇 가지 계기만 있으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다.
‘그건 은소소도 마찬가지. 하지만 마냥 기다릴 여유는 없겠지.’
당겨지는 사건 속에서 여유는 사치였다.
"둘 다 잠시만 자리를 비켜주겠어?"
혼의 기운이 모두 사라지기 전.
명한이 묵혼을 위해 가부좌를 틀었다.
#
"……빌어먹을."
어둡고 좁은 방 안.
흑색 가면의 남자가 흘러나온 피를 소매로 닦아내고 있다.
악불군을 통해 술법을 완성하고자 했던 혈교의 교주였다.
"실패한 건가?"
그 너머로 나타나는 백색의 가면을 쓴 남자.
어딘가 불길한 기도를 품고 있었다.
"방해가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방해. 설마, 천산의 지하에 술과 법을 그렇게 이해하는 존재가 있을 줄이야."
"너무 신교를 무시했군. 그래도 중원 제일의 세력이다. 네 술법을 꿰뚫어 볼 사람이라면 하나둘 정도는 있다고 예상했어야지."
"흥. 알려진 고수는 모두 예상했다. 그들이라면 이렇게 당할 이유도 없겠지. 날 방해한 건 계획에 전혀 들어있지 않던 인물이다."
교주가 손끝에 묻은 피로 ‘소백’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사십팔궁의 그 남자인가?"
"알고 있나?"
"이래저래 인연이 있어서. 내가 키우는 씨앗의 터전을 그 아이가 앗아갔다고 하더군. 덕분에 계획도 상당 부분 밀렸어."
"너도? 설마 의도하고 우리 계획을 방해하는 건가?"
"글쎄. 무당산의 일은 어디까지나 예상의 범주 밖이었으니까. 그가 신기자 수준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에야 우연이라고 봐야겠지."
"우연과 우연이라."
교주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번은 어렵다.
계획이라면 빼어난 능력.
하지만 그조차 아니라면 이건 천리에 가깝다.
"비고를 확인해야겠다."
"비고를? 어째서?"
"무언가를 느꼈다. 그자가 비고에서 언급한 인물이 아닐지 확인해야겠어."
"진심인가?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계획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어."
"그러니 확인해야 한다는 말이야."
계획 하나가 어그러지는 건 있을 수 있는 일.
하지만 대업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가정은 미리 제거를 해야 한다.
‘아닐 거야. 그럴 리는 없어.’
전 중원을 대상으로 수십 년에 걸쳐 진행한 계획이다.
갑자기 불쑥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튀어나오는 건 있을 수 없다.
"나머지를 불러와. 비고를 연다."
교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
명한은 오래지 않아 지하 미로의 다른 통로를 발견했다.
혈교의 무리가 사용한 통로였다.
그 방향을 통해서 사용한 소궁의 위치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쪽은 상위 궁의 방향이 아니네."
"파운이나 혼재, 적운 같은 이들은 아니라는 거지?"
"응. 애초에 상위 궁의 사람들은 기반이 튼튼하거든. 굳이 이런 짓을 벌일 이유가 없지."
혈교와 내통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득보다 실이 많다.
명한이 아는 한도 내에서 상위 궁의 이들 중 이런 수를 낼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상위궁이 아니며 일군 강유를 견제할 사람.’
떠오르는 건 한 사람밖에는 없었다.
"나형. 암각 자료에 5위로 등록된 나형이 유력하다."
"사십오궁에 속해있는 나형 말이지?"
"응. 본래는 나와 처지와 비슷했는데, 최근에 엄청난 전과를 올려서 평가가 올라갔지. 토대는 약하지만, 상위권을 노릴 정도로 재능이 있는 사람. 혈교와 손을 잡을 사람은 나형밖에는 떠오르지 않아."
"어쩌면 그 순위도 혈교가 바탕이 됐을지도 모르지."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신교의 소궁 순위는 나이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실적을 쌓고 평가가 오르면 그걸 바탕으로 연 단위로 궁이 배치된다.
몇 년이나 사십궁 후반에 위치했던 나형이 갑자기 상위 단계로 뛰어오르는 건 보통은 있을 수 없다.
"나형이 혈교와 손을 잡았다는 증거를 찾아야 하나. 향아야, 죽은 이들에게서 수거한 물건은?"
"전부 챙겨 뒀어요. 도련님이 가져가신 황제진경이라는 양피지 말고는 이게 가장 특별해 보였어요."
"옥잔이로군."
향아가 배낭에서 꺼낸 건 옥으로 만든 잔이었다.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것이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이건 배옥잔이네."
"배옥잔?"
"응. 황실에서 사용하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물건이야. 오래전 천마궁 안쪽에서 우연히 본 게 전부야. 이런 물건은 사용하는 사람도 적고 실제 수량 자체도 적어."
"그걸 혈교의 무리가 가지고 있었다. 받은 걸까, 주려는 걸까?"
"글쎄. 어느 쪽이든 가능은 하지. 근데, 좀 이상한 일이네. 이런 물건을 굳이 이런 방식으로 옮겨야 하나?"
"……확실히 이런 보물을 옮기는 것 치고는 종주 무리의 행색이 너무 가벼웠어."
수색이나 정찰이면 모를까 보물을 옮기는 행색은 아니었다.
명한이 반짝이는 배옥잔을 손끝으로 굴리며 생각했다.
‘진상 목적이 아니라면 쓰기 위해서?’
악불군은 묶여 있으니 제외.
"아, 그런 건가."
명한이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떠오르는 거라도 있어?"
"응. 안 그래도 지하 미로에서 찾고 있던 사람이 있거든. 어쩌면 이 배옥잔이 그 사람을 위한 물건이었을지도 몰라."
"지하 미로에?"
"확실한 건 좀 더 조사를 해 봐야겠지. 일단은 지금 상황부터 정리하고 움직이자."
명한이 한 호흡 고르기로 정했다.
혈교에 의해서 제물로 사용된 죄인들 문제도 있고,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귀의가 지하를 좋아해야 할 텐데."
사람도 추가하고.
왔던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
"이, 이건 황제진경 아닙니까!?"
지하로 함께 내려온 귀의는 환자보다 명한이 보여준 물건에 더 놀랐다.
붉은색, 낡은 양피지.
"역시 알아보네. 혈교의 종주라는 놈이 술법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더라."
"허허. 이 귀한 물건을 어찌. 돼지 목에 진주를 건 격이군요."
"아마 이 물건의 진짜 가치는 모르고 있었을 거야. 일부를 겨우 해독해서 쓰고 있던 거겠지."
황제진경은 비유하자면 현대의 백과사전과 비슷하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담고 있기에, 모든 물음에 대한 답도 가능하다.
다만, 이건 설정에 따른 표면적인 설명.
실제로 명한이 구현한 건 딱 하나밖에는 없다.
"불사종법. 영생을 살고자 했던 황제의 염원이 낳은 비틀어진 술법이지. 혈교 놈들이 악불군에게 하고자 했던 것도 이 불사종법의 일부일 거야."
"불사라. 그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믿었던 걸까요?"
"실제로 육체는 쇠하고 망가져도 혼은 유지할 수 있으니까. 육체를 갈아타는 방식으로 불사를 추구했다는 기록은 있어."
"허어. 천리를 벗어나는 행위로군요."
"그렇지. 그러니 당연히 부작용도 강해. 육체를 갈아탈 때마다 혼이 깎여 나가서 결국에는 미쳐버리고 말거든. 무인들이 심기체의 균형을 괜히 강조하는 게 아니야. 육체에는 그 사람의 혼과 정신이 깃들어. 삼위는 일체고, 완전히 분리는 불가능한 거지."
실제로 악불군의 술법이 성공했어도 이건 영속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당시 명한이 느꼈던 혼의 파편만 해도 엄청난 양.
육체는 움직여도 결국 혼은 상처를 입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보다 이 혈교라는 무리는 황제진경을 어디에서 얻은 걸까요?"
"그러니까. 내가 가장 궁금한 것도 바로 그 점이야. 황제진경은 전설로만 전해지던 보물. 혈교가 아무리 세가 강해도 덜컥 쥐고 나타난 건 의문스럽단 말이지."
"설마, 이들이 황가와 관련이 있을까요?"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명한이 양피지를 둘둘 말아 품 안에 넣었다.
두 쪽으로 찢어졌던 양피지는 살아있는 생명처럼 순식간에 붙었다.
보물을 넘어서 기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건 단순히 황가 언저리 따위로는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설정에만 잡아둔 보물.
그러니 얻을 수 있는 곳도 얻는 방법도 없다.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설정 자체.
"모르면 물어봐야지."
"네?"
서복. 황제의 명령을 받아 황제진경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사람.
하지만 실체는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는 한 가문을 일컫는다.
이 지하미로 깊은 곳에는 그 가문의 일원이 갇혀있다.
"술은 챙겨 왔지?"
술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
"……이게 어찌 된 일이냐?"
한때, 악불군이 묶여 있던 종유석 앞.
한 남자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 채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상황을 파악 중에 있지만 아무래도……"
"아무래도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당한 거 같습니다. 곳곳에서 전투 흔적이 역력하고 일부는 혈교의 그것으로 판명됐습니다."
"누가? 대체 누가 우리 일을 방해했다는 거냐? 이 아래는 신경 쓰는 자가 없다면서!"
버럭 외치는 소리에 부하의 고개가 깊이 내려갔다.
"주요 소궁에는 모두 눈을 붙여 두었습니다. 이 아래까지 내려온 사람은 단연코 없었습니다."
"그럼 대체 누가 이랬다는 건데? 교에서 사람이라도 움직였다는 건가?"
"아닙니다. 교는 대전의 준비로 한창 바쁜 상황. 이곳까지 사람을 파견한 움직임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희가 예상하지 못한 제3의 인물이 개입한 것은 아닐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남자의 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사람을 찍어누르는 듯한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이제 대전이 코앞이다. 내 위업이 눈앞까지 다가왔는데,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세력이 또 있다는 것이 말이 되냔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정체를 밝혀내겠습니다."
"찾아. 찾아서 내 앞으로 끌고 와. 하늘로 도망치든 땅으로 숨든 어떻게든 찾아서 내 앞으로 대령해라. 그게 아니면 네놈들이 대신 찢겨 죽을 테니까."
"……"
점차 붉게 물드는 남자의 눈빛.
부하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만 깊이 숙일 뿐이었다.
‘대체 누구지? 1궁? 2궁? 아니면 설마 다른 궁에서 우리를 견제를?’
머리를 끊임없이 굴리면서.
하지만 끝끝내 명한은 의심하지 못했다.
사십팔궁 끝자락의 망나니.
여전히 눈 밖에 있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