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235)

격퇴

종주의 마지막 발악은 뻔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제물을 대체한 것이다.

혈교 무리의 생명과 한수호의 심장으로.

부족한 술법을 완성하여 악불군을 깨웠다.

"……빌어먹을. 완성된 건가?"

명한은 반야의 눈으로 악불군을 관찰했다.

쇠사슬은 전부 무너졌지만, 아직 움직임은 없었다.

어쩌면 술법의 실패.

그렇게 희망찬 사고를 돌리는 순간.

"도련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기검이 날아왔다.

반응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였다.

다행이라면 관찰을 위해 반야를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여 기검을 휘감아 방향을 틀었다.

"크윽……!"

완전무결에 가까운 반야의 반격기가 중간에서 무너졌다.

기검은 힘의 와류를 끊고 명한의 옆구리를 스쳤다.

손가락 마디 깊이로 푹 파이는 살점.

단단한 육체도 극강의 반탄지기도 모조리 무시당했다.

악불군의 기검은 방어무시에 가까운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도망쳐라."

순간, 악불군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뭐? 당신 의식이 있는 건가?"

"술법을 심검(心劍)으로 찔러서 겨우 틈을 만들었을 뿐이다.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도망쳐라."

"그 심검으로 아예 술법을 찔러버려!"

"무리다. 내 의식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 잔류사념에 가까운 형태로 움직이고 있을 뿐. 이대로는 술법에 침식당해 쓰기 좋은 인형이 되고 말겠지. 그 전에 도망가라."

악불군 정도의 고수라면 애초에 술법이 잘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실려 왔을 당시는 이미 천마에게 당해서 폐인에 가까웠던 상태.

술법은 그의 의식을 죽이고 몸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건 극천마인이라는 인형과는 달라.’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는 인형이면 무서울 건 없다.

경지가 올라갈수록 중요한 것은 결국 심기체의 균형.

이 정도의 공을 들인 술법이라면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했음이 분명하다.

"소백, 어떻게 할 거냐?"

"……"

도망가야 한다.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악불군 정도의 고수는 이기지 못한다.

그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왜지……’

명한은 묘한 망설임을 지우지 못했다.

"어서 도망쳐라.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그건 판단이라기보다는 어떤 감각.

악불군의 표정, 몸짓, 말투, 흐르는 땀과 떠다니는 먼지까지.

이 공간의 모든 것들이 어떤 결과를 속삭이고 있었다.

이해는 하지 못하나, 흐름은 피부로 와닿았다.

‘혼의 속삭임. 자연의 울림. 이건…… 술법의 잔재인가?’

하나의 결정을 맺지 못한 파편이었다.

이 파편과 파편이 작은 울림을 반사하여 희미하게 무언가를 이루고 있었다.

향아의 눈으로도 꿰뚫지 못한 아주 작고 미약한 흐름.

"……아."

이게 진정한 반야(般若)로구나.

명한은 순식간에 그 이치를 깨달았다.

그리고 이 이해의 바탕에 묵혼과 극천일무기가 있다는 것도 동시에 깨달았다.

‘사람이 눈밭에서 발자국을 남기듯, 혼은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그건 천지의 기운이나 내공의 흐름과도 다르지 않아.’

주변에 흐드러진 파편은 술법에 희생된 생명과 그 중심에 선 악불군의 것이었다.

"넌, 악불군이 아니구나."

그렇기에 명한은 이를 꿰뚫어 봤다.

조각조각 난 악불군의 의지는 파편으로 주변을 떠돌고 있다.

심검으로 술법을 파고들어 의사를 형성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영안(靈眼)을 가진 건가. 놀랍군. 본교의 밖에서 이 정도 재주를 지닌 자를 보다니."

악불군의 말투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네가 술법의 주인인가? 술법으로 악불군의 몸을 움직이는 건가?"

"본래라면 그의 의지를 무너뜨리고 교의 종복으로 삼았어야 옳다. 하지만 방해를 받아 술법을 다급히 완성시키니, 쓰다 버리고 말 인형이 되고 말았지. 안타까운 일이야."

"그래서 우리를 물러나게 할 생각이었구나. 부서진 파편을 모아서 네 종복으로 삼으려고."

"후후. 그나마 그편이 나으니까. 내가 영속의 재주로 악불군의 몸을 움직여봐야 쓰기 좋은 인형에 불과하지 않은가. 절대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는 절대로 되지 못하지."

"대체 네놈은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자네는 길가의 개를 보며 어찌 생각하지?"

"……"

"그래. 같은 이치라네. 나 정도 되는 술사에게 보통의 인간이란 하등한 생명체에 불과하거든. 쓰거나 버리거나. 혹은 귀여워해 주거나. 악불군 정도라면 꽤 좋은 애완동물이 됐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군."

악불군. 아니, 악불군의 몸을 빌린 교주의 말투에는 고저가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에 어떤 감정적 흐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점이 명한을 더욱 화나게 했다.

"혈교든 뭐든 크게 신경 쓸 생각은 없었는데, 달리해야겠다. 너 같은 쓰레기를 그냥 내버려 두면 이 중원이 썩어버릴 것 같아."

"사소한 것에 발끈하는 것을 보니 아직 멀었군. 그래도 자네라면 보다 상위의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보는데. 차라리 저런 하등한 것들은 버리고 내게 오는 건 어떤가? 혈교의 부교주 자리를 내어주겠네."

"부교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네."

"천마가 들으면 네놈 목을 따러 갈 텐데?"

"천마라. 혈교의 부재를 틈타 작은 영광을 누린 소인배에 불과하다. 대업이 완성되면 그자 역시 내 앞에 무릎을 꿇겠지."

"자신감 하나는 천하제일이네."

"그래서 오겠나?"

"지랄하지 마."

명한이 타구봉을 들어 교주를 가리켰다.

"천마건 혈교든 내 위를 허락할 생각 따위는 없어. 날 부리고 싶다면 출판사 사장 정도는 되고 나서 와라."

"음?"

"못 알아먹으니 넌 안 된다는 거다."

다시 한번 극천일무기를 끌어올렸다.

한계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필요했다.

"시체 내려놔."

교주. 악불군의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

부딪치는 건 순간이었다.

명한의 타구봉이 교주의 머리, 허리, 다리를 순차적으로 타격했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종소리가 울렸다.

충분한 타격? 아니, 그건 아니었다.

교주는 타격을 그냥 받으며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기로 만들어진 망.

명한의 몸이 삽시간에 빨려 들어갔다.

"돕겠다, 소백!"

이 망은 은소소의 혼원일기가 잘랐다.

힘이 파편처럼 부서져 주변을 갉아먹었다.

마치 산성 액체가 땅을 부식시키는 것 같았다.

은소소는 연격을 잇지 못하고 검을 수습하며 물러났다.

"하찮을 뿐이다."

교주의 손이 아래에서 위로 선을 만들었다.

바닥을 갉아먹던 파편들이 순식간에 모여서는 강기의 검을 만들었다.

길이는 족히 오 장.

멀어진 은소소를 포함해서 모두를 자르고도 남을 길이었다.

웅―, 하는 묵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공간이 대각선으로 잘렸다.

"터무니없는 내공이군."

명한은 정면에서 은소소와 향아는 구석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일격을 피했다.

지하 미로의 공간 일부분이 통째로 잘려나가서 커다란 계단을 만들었다.

아득한 수준의 내공이었다.

"사역할 뿐인 인형으로는 지고의 경지에 닿지 못한다. 허나, 그 정도로도 너희는 충분하다. 10갑자 이상의 내공과 금강불괴의 육체. 승산은 없다."

"자랑은 일절만 해라."

명한이 이죽거리며 타구봉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공간을 격하는 매우 강력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교주는 피하지도 받아치지도 않았다.

쩌엉.

붉어지는 가슴팍의 피부.

그게 초절한 일격의 결과였다.

교주가 사역하는 악불군의 육체는 정말로 금강불괴였다.

"10갑자의 내공을 지닌 금강불괴의 고수라."

"도망가는 편이 나았겠는데, 소백?"

"웃으면서 그런 말 하지 마."

명한의 등 뒤에서 은소소가 날아올랐다.

그녀의 검은 순식간에 수백 갈래로 나뉘어 교주의 몸을 후려쳤다.

난도질당하는 주변 공간.

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르고 마찰열에 주변이 후끈해졌다.

화아악―!

그 틈에 쑤셔 넣는 것은 향아의 항룡이십팔장.

황색의 용이 허공을 날아가서 교주를 휩쓸었다.

"소용없다."

하지만 교주는 휩쓸려 물러났을 뿐, 상처조차 없었다.

넝마가 된 옷을 손으로 뜯어내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 하나를 쥐었다.

수 장의 강기가 끝에 맺히더니 수백 갈래로 늘어났다.

은소소가 검기로 선보였던 것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내 뒤로."

이걸 막을 수 있는 건 명한밖에는 없다.

쏟아지는 강기 다발을 향해서 타구봉을 돌리며 전진했다.

한 발 한 발이 강철을 찢어버리고도 남을 묵직한 공격.

명한은 이를 전부 하나하나 걷어내며 앞으로 걸었다.

반야의 눈을 극천일무기가 반응하는 격이었다.

걸음마다 바닥이 푹푹 파이고 튕겨난 강기가 주변 벽을 박살 냈다.

"쿨럭―!"

"도련님!"

내구성의 차이.

금강불괴의 교주와 그렇지 않은 명한은 차이가 분명했다.

이미 극천일무기를 한계까지 운용했던 명한은 내상이 쌓여 있었다.

흐르는 피는 검붉은색이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도망가라고. 그 말을 따랐으면 죽지는 않았을 텐데."

"후우. 새끼, 진짜 말이 많네."

명한이 입가를 훔치며 숨을 골랐다.

허세와는 다르게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강해. 순수 무력은 현경 초입 부근이라고 해도……’

내공과 육체의 내구성이 압도적이었다.

"소백, 방법은 있겠지?"

"……어쩌면."

호흡으로 돌아온 힘으로 타구봉을 힘껏 쥐었다.

극천일무기는 이미 아슬아슬한 수준의 한계.

길어봐야 1, 2분 정도가 한계였다.

‘교주가 센 게 아니야. 악불군의 육체가 강한 거지. 그럼 가능성은 있다.’

셈으로 하자면 1할?

그 정도면 충분했다.

"둘 다 죽지 말고 잘 버텨."

"맡겨만 줘."

"네, 도련님."

두 사람을 정면에서 지켜주는 건 어렵다.

당부를 남기고 단독으로 달려나갔다.

교주는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강기 다발을 날렸다.

단순한 힘의 사역이 효과적이라는 걸 앞서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펑. 펑.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후욱―!"

바닥을 쭉 미끄러진 명한이 몸을 뒤집으며 가루를 뿌렸다.

교주의 몸을 다 뒤덮고 순식간에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칠채향으로 조제한 독이었다.

"이 몸에 독은 통하지 않는다."

"독이라면 그렇겠지."

정정하자.

독이 아닌 약이었다.

기운을 들뜨게 하여 명소보다 몸을 가볍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보통이라면 도움이 되는 것으로 끝이겠지만, 교주의 육체인 악불군은 술법으로 보정을 받고 있다.

육체의 변화에서 괴리가 발생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로봇이 단단하며 파일럿을 패는 거지."

"무슨 소리냐?"

명한은 답을 아끼고 타구봉을 벼락처럼 휘둘렀다.

바람이 찢어지고 교주의 몸이 들썩였다.

다만, 금강불괴를 깨트릴 정도의 위력은 절대로 아니었다.

필요한 건 여유.

"간다, 향아야!"

"네, 아가씨!"

좌우에서 튀어나와 교주를 협공하는 은소소와 향아.

혼원일기와 항룡이십팔장의 절기가 동시에 교주의 육체를 강타했다.

교주 역시 이번은 위험하다 판단했는지 강기의 벽을 둘러서 이를 쳐냈다.

압도적인 힘의 사역이었다.

"……너. 뭐 하려는 거지?"

하지만 그 상황 자체가 명한이 의도했던바.

명한은 추가 공격을 이어가지 않고 가만히 주변을 훑고 있었다.

호흡과 손짓 사이로 흐르는 기운을 교주는 단번에 알아봤다.

이건 죽은 이들의 혼기.

그 파편이었다.

"말했잖아. 안에 있는 사람을 공격한다고."

"내 술법은 너 따위가 깰 수 없다."

"깰 생각은 없어. 흔들기만 하면 충분해."

이미 알고 있다.

악불군은 죽어 가루가 되었음에도 그 의지를 혼에 남겨 두었다는 걸.

고통과 분노. 좌절과 괴로움은 육체에 갇힌 그의 혼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작은 틈 하나면 충분했다.

‘모든 것을 담아서 꿰뚫는다.’

묵혼공과 극천일무기로 이어지는 혼의 흐름.

반야로 꿰뚫어 보는 악불군 내부의 흔들림.

조각난 퍼즐이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하나의 선이 이어졌다.

"설마!? 네놈이 그 비문 속의……!?"

모았던 기운을 한 번에 쏟아냈다.

육체를 꿰뚫는 것이 아닌, 혼을 관통하는 일격이었다.

이름 붙이지만 극천일무기, 관혼격(貫魂擊).

"사라져."

악불군의 육체에서 교주의 혼을 쫓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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