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235)

구했더니

혈교의 능력은 피를 통한 주술로 귀결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마법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무공에 문외한인 건 아니다.

극단으로 갈수록 균형이 중요해지듯, 핵심 인사들은 모두 수준급의 무공이 가능하다.

눈앞의 종주 역시 마찬가지.

"파산권이라. 무공을 업신여기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군."

"흥. 하찮은 중원의 무공 따위. 도구로 쓸 뿐이다."

바닥 긁히는 소리와 함께 종주가 접근했다.

갈지자로 꺾이며 들어오는 타법은 상당히 빠르고 강했다.

명한은 이를 따라가지 않고 되레 손을 뻗어 힘을 하나로 모았다.

퉁. 어깨와 허리로 전해지는 충격.

허나, 명한의 반탄진기는 타격에 뚫릴 만큼 가볍지 않았다.

손목을 부여잡으며 되레 물러났다.

"도구도 쓰기 나름이지."

이번에는 명한의 차례.

물러난 거리를 빠르게 따라잡으며 주먹에 극천일무기를 담았다.

절의 기교를 손으로 풀어낼 수준은 아니나, 단순 위력으로도 충분했다.

주먹 주변의 공간이 기에 짓눌려서 으깨졌다.

종주는 그 위력에 깜짝 놀라며 손을 엇갈려 막았다.

붉은 안개가 장막처럼 일어나더니 극천일무기의 힘과 정면에서 충돌했다.

우박 떨어지는 소리.

수십, 수백의 불꽃이 그 앞에서 튀었다.

"쯧. 혈사주법. 까다롭네."

명한은 손을 거두고 극천일무기를 풀었다.

혈사주법은 일반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기 때문에 찍어 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술법의 묘리는 무공과는 반대.

‘나’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향하는 무공과는 달리 술법은 ‘밖’에서 시작해서 ‘나’로 이어진다.

눈앞의 붉은 벽은 술법으로 엮인 수많은 이의 생명력이었다.

"네놈이 정말로 혈사주법을 알고 있군.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궁금하면 무릎 꿇고 빌어보든가."

"건방진 무림인!"

피의 장벽이 바닥으로 무너진 뒤, 붉은색 창으로 변모했다.

어딘가 혈염마녀가 사용하는 능력과도 비슷했다.

홍련에서 능력을 따왔든지, 홍련이 이들에 의해서 배양됐든지.

어느 쪽이든 관계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혈사주법의 동력도 비슷한 개념이겠군.’

홍련이 뿌리 내린 식물을 통해 생명을 공유했던 것과 같은 방식.

지금 상황에서라면 하나밖에는 없다.

"네놈과 나머지가 혈사주법으로 묶여 있군."

"……넌 반드시 죽어야겠다!"

창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왔다.

그야말로 절정의 찌르기.

‘하지만……’

악불군의 기검보다는 느리다.

명한이 몸을 살짝 비틀며 창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큭!"

붉은 기운 속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감정의 고동.

명한이 저도 모르게 손을 털고 물러났다.

순간적이지만 고통, 분노, 슬픔, 좌절 등 엄청난 감정의 격류를 겪어야 했다.

힘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다.

"네놈들은 정말 용서받지 못할 쓰레기군.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닥쳐라, 무림인. 대업을 위해 사용된 제물 하나둘 따위. 그들의 죽음은 혈교의 피가 되어 앞으로 영생을 누릴 것이다."

"제일 짜증 나는 부류로군. 비틀린 신념에 잘난 줄 아는 아가리."

"혈교의 위대함을 너같이 하찮은 놈이 어떻게 알까. 순순히 죽어서 반석이 되거라."

붉은색 너울이 종주의 몸 주변으로 돌았다.

명한은 이제 그 너울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죽은 자들의 절규. 그것이 피에 묶여서 힘으로 사역당하고 있어.’

제물이나 극천마인이라 불리는 이들도 다 비슷했다.

혈교는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인간을 쥐어짜서 그 영혼의 단말마를 빨아먹고 있었다.

묵혼공과 극천일무기를 익힌 명한이기에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잘 안다.

"계열 종사자로서 네놈들은 용서하면 안 되겠다."

명한도 극성의 극천일무기를 끌어 올렸다.

집어삼킨 파괴의 단말마가 전신을 난도질하며 지나갔다.

광기, 분노, 파괴…… 온갖 부정적인 사념의 집합체였다.

혈교의 수법처럼 영혼 자체를 찢어서 삼키는 것은 아니나, 죽음의 순간에서 배출된 그 강렬함은 못지않다.

아니, 순수한 파괴력은 훨씬 강하다.

"……네놈은 대체 뭐냐?"

검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린 명한.

그 모습은 인간이 아닌 괴물에 가까웠다.

과거, 화무천이 정도 무림을 학살했을 때와 거의 비슷했다.

중원제일악.

마인(魔人)이라 불린 모습이었다.

"오성(五成)이 한계인가. 그 이상은 버겁겠네."

묵혼공을 통해 극천일무기를 제어하는 한계.

손끝에서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감각에 명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왜 화무천이 극천일무기의 전수를 꺼렸는지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만큼 파괴적이라는 거지.’

순수하게 적을 파괴하기 위한 수단으로.

"죽자, 이 빌어먹을 놈아."

검붉은 유성이 되어 달려나갔다.

#

명한이 전력을 끌어내고 있을 무렵.

은소소와 향아도 남은 혈교 무리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종주의 그것만큼은 아니었으나, 이들 역시 비슷한 능력을 사용했다.

향아의 항룡이십팔장도 은소소의 천마검도 능수능란하게 받아냈다.

"날 풀어라! 날 풀어주면 이 빌어먹을 놈들을 싹 다 도륙해 주마!"

그 와중에 한수호는 버럭버럭 외쳤다.

쇠사슬만 풀고 나가면 상대가 몇 명이든 다 잘라버릴 자신이 있었다.

"소소 아가씨."

"흥. 알았다."

못 미더운 건 맞지만, 그래도 화경급의 고수.

한 손 보태서 나쁠 건 없었다.

향아가 장력을 강하게 뿌리는 사이, 은소소가 한수호에게 접근했다.

쇠사슬은 단단하게 엮여 있지만, 은소소의 검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검에 모든 쇠사슬을 잘라냈다.

"하하하! 자유의 몸이다, 자유의 몸이야! 이 빌어먹을 놈들! 이 삼절검 한수호 님을 가둔 벌을 달게 받아라!"

한수호는 냅다 달려가서 혈교 무리의 검을 뺏어 들었다.

삼절검이라는 별호가 농담은 아닌 듯, 휘두르는 검격이 매우 날카로웠다.

순식간에 수 명을 몰아붙여서 승기를 잡았다.

"향아야, 넌 이 틈에 남은 사람들을 풀어 줘."

"네, 아가씨."

날뛰는 한수호 덕분에 시간이 생겼다.

향아가 전장에서 벗어나 끌려온 이들의 포박을 하나하나 풀었다.

‘다들 물러나 계세요. 이 안은 위험하니 너무 멀어지진 말고요.’ 한마디 덧붙이며 안전한 곳으로 유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하! 두 소저께서 의협심이 뛰어나시구려. 어느 문파에서 오신 분들이오? 날 구하러 온 거면 역시 무림맹에서 보낸 건가?"

"눈앞의 적에나 집중하시지?"

"이 몸, 삼절검 한수호에게 걸리면 이런 시정잡배들은 아무것도 아니오. 두 소저께서는 뒤에서 편히 쉬시구려. 이 몸이 전부 처단하고 그네들 동료까지 구해줄 테니."

풀린 건 한수호의 몸만이 아니었다.

검을 휘두르는 횟수만큼 계속해서 입을 털었다.

자신감 하나만큼은 대단했다.

"자, 누가 이 삼절검에 베이고 싶은 거냐?"

"……저자를 굳이 살려둘 필요는 없다. 고수는 충분해."

하지만 그건 혈교 무리가 한수호를 살려두려 했기 때문.

갑자기 기세가 일변하며 붉은 기운이 파도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삼절검의 검기도 점창의 무공도 쉽사리 이 파도를 베지는 못했다.

"이익! 이 더러운 사파 놈들! 사특한 술법을 쓰는구나!"

"후후후. 잘난 정파 무림인의 한계는 그것뿐인가?"

"감히! 점창의 검을 무시하다니! 네놈의 목을 베어 점창산에 올리겠다!"

도발에 한수호의 기세가 거칠어졌다.

매서운 검격은 폭풍우와 같았으나, 이건 혈교가 유도한 상황.

바닥에서 붉은 선들이 일어나 한수호의 발목을 낚아챘다.

검으로도 잘 베이지 않는 단단하고 질긴 선이었다.

"이, 이거 놔라!"

"미련한 놈. 검만 믿고 날뛰는 무림인 따위는 이래서 우리의 상대가 아니라는 거다."

"이런 버러지 따위가!"

선은 금세 엉키고 달라붙어 굵은 동아줄이 되었다.

한수호의 발목을 넘어 허벅지와 허리까지 단단히 묶었다.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강한 구속이었다.

혼자서 날뛰다가 제 발에 걸린 격.

"쯧. 미련한 인간 같으니."

마음 같아서야 버려두고 싶지만, 그래도 한 손이 아쉽다.

은소소가 허공을 밟으며 날아가 검을 휘둘러서 선을 잘라냈다.

삼절검으로도 잘리지 않던 선임에도 일격으로 해낸 것이다.

"……천마검?"

그리고 그 검격에서 한수호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주 오래전, 스물이 겨우 되던 해에 우연히 봤던 천마의 검기였다.

머리가 핑 돌며 상황을 깨달았다.

"네년들은 마교인이구나!"

대뜸 은소소 쪽으로 검을 휘두르는 한수호.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은소소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어깨부터 손목까지를 검에 허용하며 피를 흩뿌렸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팔이 그대로 잘릴 뻔한 공격이었다.

"아가씨!!"

"네년도 마교의 계집이렸다! 이것들이 날 속였구나!"

황급히 다가오는 향아를 향해서도 검을 휘둘렀다.

삼절검이라는 별호에 맞는 날카로운 검격이었다.

하지만 기습이 아니라면 정면에서 이를 맞아 줄 향아가 아니었다.

월보로 검격을 벗어나 부상당한 은소소를 부축했다.

"감히 피해!?"

"이익! 이 미친 인간아, 우린 널 구해줬다고!"

"닥쳐! 마교의 도움 따위는 받지 않는다! 이 삼절검 한수호의 검으로 네놈들을 모조리 도륙하겠다!"

극도로 흥분한 놈은 아예 혈교를 등한시한 채 은소소와 향아 쪽으로 검을 돌렸다.

구해준 은인에서 철천지원수로 바뀐 형국이었다.

"검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고?"

"……!"

순간, 한수호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하나.

그는 섬뜩함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 검이 그 검인가?"

하지만 검은 목소리의 주인에게 닿기도 전, 손아귀에 잡혔다.

삼절검이라는 별호가 부족하지 않은 검이었음에도 상대는 마치 아이 다루는 듯했다.

"소백!"

"고생했어. 지금부터는 내가 맡을게. 이 인간이나 잘 감시해 줘."

그 상대는 다름 아닌 소백이었다.

검을 쥔 반대쪽 손으로 무언가를 은소소와 향아 쪽으로 던졌다.

넝마에 가깝게 두드려 맞은 종주였다.

"자, 다시 묻자. 이 검으로 뭘 어쩌겠다고?"

한수호의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

한수호는 수많은 무림 명사를 만나봤다.

개중에는 일대 종사도 더러 섞여 있었다.

인간의 극의에 다다른 괴물들.

눈앞에 있는 이 검붉은 인간은 분명 그 괴물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어딘가 궤가 다른 이질감이 있었다.

‘이 내가. 삼절검 한수호가 겁을 먹었다고?’

그 바탕에 두려움이 있다는 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졌다.

"기껏 구해줬더니 검을 돌려? 점창의 도리라는 건가, 그게?"

"크, 크으윽!! 놔라! 검을 놔, 이 마교의 악마야!"

"악마라니. 사람을 앞에 두고 못 하는 소리가 없군."

명한이 검을 움켜쥐어 부러뜨리고는 한수호를 후려쳤다.

다른 무언가를 하기에는 솔직히 그도 한계였다.

종주를 때려잡는 데 꽤 많은 힘을 사용한 터였다.

"이, 이이……이런 곳에서 마교가 악마를 기르고 있었구나!"

"끝까지? 네놈을 구해준 사람이 누구인지도 잊은 거냐?"

"닥쳐라, 마교의 악마! 내가 이곳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만큼은 반드시 처단하겠다!"

지독하게 뒤틀려 있는 심보.

명한은 한가득 올라온 짜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죽일까?’

몸 안 가득 찬 파괴적 욕구가 속삭였다.

"……뭐? 악불군!?"

그 순간이었다.

한수호가 귓속말이라도 들은 듯 고개를 흔들더니 한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악불군이 묶여 있는 종유석이었다.

"전음? 종주를 죽여, 은소소!"

무력화시켰다고 생각했던 종주였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치며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후벼팠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와 펄떡이는 심장.

그리고 이를 뒤따라 다른 혈교의 무리들도 자신들의 심장을 손으로 뽑았다.

기괴하고 기괴하여 잠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모습.

"이이익!!"

이 틈을 한수호는 놓치지 않았다.

빠르게 악불군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서 손을 뻗었다.

"안 돼! 멈춰, 이 멍청아!"

명한이 뒤늦게 따라붙었지만, 늦었다.

이미 한수호는 악불군의 거리 안으로 들어간 상황.

번개와 같이 기검이 움직이고……

"컥!? 어, 어째서!?"

한수호의 심장을 꿰뚫었다.

"육시랄."

흘러넘치는 피와 생명으로 바치는 제물.

명한은 종주가 마지막에 외친 주문이 어떤 의미인지를 단번에 깨달았다.

쿵. 쿠쿵. 쿵.

"다들 내 쪽으로 모여."

악불군의 쇠사슬이 하나씩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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