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진경
반복적인 작업이었다.
명한 일행은 종유석에 묶인 죄수들을 격퇴.
이들을 술법의 구속에서 풀어주어 악불군을 약화시켰다.
그 진행이 매우 더뎠지만, 멈추지 않으면 효과는 확실했다.
"하아. 하아. 이렇게 해도 어려운 건가."
그렇게 도전한 열한 번째 시도.
이번에는 악불군의 반 족장 안까지 파고들 수 있었다.
엄청난 강기 세례에 도망쳐야 했지만, 장족의 발전이었다.
"소백, 팔다리가 끊어질 거 같아."
"저, 저도요 도련님. 힘들어서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
하지만 일행이 지쳐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힘에 부치는 상대 아닌가.
그 아슬아슬한 경계 속에서 몇 번이나 몸을 갈아 넣었으니 멀쩡한 게 되레 이상할 지경이었다.
악불군을 시야에 둔 장소에서 숨을 골랐다.
"우리가 몇 명이나 해방했지?"
"대충 세도 쉰은 넘을걸? 다들 상태가 엉망이긴 하지만 숨은 붙어 있으니."
"쉰이라. 이 혈교의 술법이라는 것이 어지간히도 규모가 큰가 보네. 이 정도 숫자를 떼어 냈으면 무너질 만도 한데."
"효과가 없어?"
"아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야. 슬슬 악불군 자체에서도 균열이 보여. 다만, 이 술법을 구축한 혈교의 교주에 대해서는 걱정이 되네. 이런 대규모 술법을 구축할 정도의 실력이면…… 다른 것도 충분히 가능하거든."
명한이 바닥에 숫자를 새겼다.
지하 미로로 들어와서 흐른 시간이었다.
천마 대전까지는 앞으로 스무날 정도.
‘악불군 하나가 아닐 거 같단 말이지.’
그게 걱정되는 점이었다.
"뭐, 그건 저 괴물을 정리하고 난 뒤에 생각해 보자고."
"그래요, 도련님. 모든 걸 도련님이 상대할 수는 없잖아요. 우린 우리 앞가림에 최선을 다해요."
"무리하는 거로 보였나? 이 정도는 괜찮아."
"괜찮기는. 그러다가 또 불쑥 혼자 앞서 나가다가 다치려고."
"내가 또 언제 그랬다고."
"아니냐? 너……"
은소소가 이어지는 말을 황급히 주워 담았다.
대기 중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기운이 있었다.
일행이나 종유석에 묶인 죄인의 것은 아니었다.
‘쉿.’ 명한도 눈치를 챈 건지 입을 손가락으로 막고 야숙의 흔적을 발로 치웠다.
몸을 가리고 구석으로 숨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곳에서 소식이 끊겼다는 건가?"
그리고 이내, 가면을 쓴 무리가 지척으로 다가왔다.
그 숫자가 아홉이었다.
"네, 종주. 백종(百種)께서 홀로 처리하신다고 한 터라……"
"쯧. 무능한 새끼. 혈통만 믿고 나대는 놈에게 백종은 무슨."
"종주. 교주께서 아시면 경을 칠 일입니다."
"닥쳐라. 그딴 버러지 따위에게 위(位)를 내리는 건 해악한 짓임을 왜 모르는 것이냐. 과거에도 그런 오만으로 대업을 그르쳤으면서 같은 짓을 반복하다니."
종주라 불린 남자는 흰 가면 바탕에 붉은 줄 여섯 개를 달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무리 중 가장 지위가 높여 보였다.
"교주께서 다 혜안이 있을 겁니다."
"흥. 능력은 믿지만, 안목은 아니다. 봐라. 이 마굴이 우리 대업에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를 알면서 제대로 지키는 놈들조차 파견을 안 하지 않았느냐."
"그건 다……"
"교주의 생각이라고? 그래서 백종 놈이 사라진 것도 혜안이냐?"
"……"
부하의 입이 닫히자 그제야 종주의 말도 멈췄다.
교주의 방침을 꽤나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크게 콧방귀를 끼고는 명한 일행이 있는 곳을 지나쳐 악불군 쪽으로 걸어갔다.
"외인의 흔적이 여럿이군. 역시 진법을 맹신하는 건 바른 방법이 아니야."
"다른 무리가 진법을 해체하고 들어왔다는 건가요?"
"우리 쪽의 것에는 변화가 없으니 다른 방향이었겠지. 핵심 소궁주는 모두 눈여겨보고 있는데 대체 누구 짓이지?"
"혹, 신교에서 눈치챈 것은 아닐까요?"
"아니다. 이건 안에서 우리와 동조하는 눈과 귀가 확인해 준 일이야. 신교는 우리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그들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거든."
단정적인 말투였다.
‘신교 내부에 첩자가 있나 보군.’
단순 내통자를 넘어서 고위급 눈과 귀가 있는 눈치였다.
"……이것 봐라?"
"왜 그러십니까, 종주?"
"흔적이 이 주변에 치중되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생각 없이 이자에게 접근했다가는 그냥 목이 잘리고 말 터였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시체가 없군요."
"그래. 이자의 거리까지 접근해도 죽지 않고 버틸 정도의 실력자. 게다가……"
무언가를 눈으로 훑던 종주가 한쪽으로 손을 뻗었다.
"너흰 가서 다른 기둥을 확인해라. 제물에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술법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종주를 따라온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서 달리기 시작했다.
"조, 종주님 제물의 구속이 모두 풀려 있습니다!"
"이곳도 마찬가지입니다!"
"혈사충(血事蟲)이 모조리 제거되어 있습니다!"
달려갔던 이들은 그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명한 일행이 풀어준 죄인들을 확인하고 온 것이다.
종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멍청한 것들. 고작 진법 하나만 믿고 이런 중요한 장소를 방치하니 이런 사달이 나는 것 아니냐!?"
"그럼 백종께서는……?"
"흥. 어디선가 침입자에게 죽었겠지. 그 모자란 놈에게 악불군의 공세를 버틸 정도의 실력자를 상대할 재간은 없으니까."
"이, 이 소식이 교주께 들어가면 경을 치실 겁니다."
"시끄럽다! 대업을 하는데 고작 불호령이 무섭다는 거냐!? 그러고도 네놈이 우리 혈교의 일익이라 할 수 있겠느냐!?"
불같은 호통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혈교라는 엄청난 이름값에 비해서는 어딘가 정제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시기의 혈교는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았던 건가?’
명한에게도 의외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부족분을 채워야 한다. 준비된 제물들을 가져와라."
"종주! 우리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시끄러워. 술법의 중심이 되는 제물이 무너졌는데, 기일을 맞출 수 있다고 보나? 억지로라도 제물을 보충해야 한다."
"그럼 교주께 먼저 연락이라도 드림이 어떻습니까?"
"넌 나를 무어라 보는 거냐? 내가 교주의 재가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 하는 머저리로 보이는가? 당장 제물을 가져와. 아니면 네놈을 기둥에 묶어서 제물로 써주마."
"아, 알겠습니다."
스산해지는 목소리에 상황은 정리됐다.
기둥을 확인하고 온 이들은 다시금 어디론 가로 뛰어갔다.
종주가 말 한 ‘제물’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소백, 어떻게 할 거냐?"
"기다려. 제물이 내가 생각하는 그 제물이 맞는다면, 한 번에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명한 일행에게는 다른 기회로.
동상이몽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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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지 않아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왔다.
손과 발은 굵은 노끈으로 묶여 있고, 몸은 겨우 천 조각으로 가려 두었다.
노예. 그렇게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빨리 걸어!"
"흐, 흐으윽……"
"우,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겁니까?"
대부분이 겁에 질려 입조차 떼지 못했다.
혈교 무리의 채찍질에 간신히 방향만 맞춰 비틀비틀 걸었다.
참혹한 모습에 은소소가 검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참아.’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명한은 이를 제지하며 무리의 끝을 눈으로 살폈다.
"네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쇠사슬에 묶여 끌려오는 한 남자.
복색 또한 굉장히 고급진 것이었다.
"감히 나 점창의 한수호를 이리 대하다니! 네놈들이 겁을 상실했구나!"
"……한수호. 삼절검, 한수호라니."
스스로 외친 이름을 명한은 알아봤다.
삼절검 한수호라면 점창이 낳은 검수 중에서는 상당히 독보적인 존재.
어린 나이에 절정 끝자락을 밟고, 서른에 화경에 들어선 천재였다.
성정이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라 평은 좋지 않으나, 그 무를 괄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 정도 고수를 잡아 왔다는 건가?’
생각보다 혈교의 수완이 대단했다.
"닥쳐라, 이 무능한 놈. 너희 같은 중원의 버러지들은 대업의 한 축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
"네놈이 이 일의 주동자인가? 감히 점창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것 같나? 독이 아니었다면 감히 나 한수호를 건드릴 용기도 없는 쓰레기가!"
"흥. 무예가 아니면 명예가 없다. 어디 떠들고 싶으면 얼마든지 떠들어라. 너희의 그 아집이 발목을 잡아서 파멸로 이끌 테니까."
"이, 이이……! 이 쇠사슬을 풀어! 네놈의 목을 단번에 따줄 테니까!"
"싸구려 도발이군. 힘을 아껴라. 네놈의 그 열의는 대업을 위한 생명이 돼 줘야 하니까."
"네놈!!"
발버둥 쳐도 종주는 반응하지 않았다.
손짓으로 끌고 온 사람들을 악불군 주변에 배치하고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검붉은색의 양피지였다.
"……!"
명한은 그 양피지를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황제진경(皇帝眞經)!?’
전설 속 황제가 남겼다고 알려진 경전.
그 안에는 세상의 모든 법과 진실이 담겨 있다고 전해진다.
명한이 습작에 설정으로만 남긴 절세의 기보였다.
"향아, 소소. 너희 둘은 잔당과 인질을 맡아!"
하지만 그렇기에 황제진경의 능력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 하나.
불사종법(不死種法)을 제외하면.
"누구냐!? 감히 이 신성한 곳을 침범하다니!"
"그 양피지를 내어놓아라!"
빠르게 거리를 좁혀 종주에게 손을 뻗는 명한.
검붉은 양피지의 끝쪽이 손끝에 걸려서는 북―, 소리를 내며 찢겼다.
반은 명한에게 반은 종주의 손에 걸렸다.
"네놈이 감히! 신기를 능멸하다니!"
"쯧! 남은 반쪽도 받아가겠다!"
반으로는 부족하다.
명한이 찢긴 양피지를 둘둘 말아 품 안에 쑤셔 넣으며 타구봉을 휘둘렀다.
바람이 공간을 반으로 쪼개며 종주의 어깨를 후려쳤다.
들려야 할 소리는 둔탁한 파열음.
"하찮은 무림인 따위가."
하지만 그 대신 소리 없는 압력만이 전해졌다.
타구봉의 끝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거칠게 떨었다.
무형의 힘이 그 끝을 쥐고 버티고 있었다.
‘혈사주법. 젠장, 엄청 귀찮은 힘으로 설정해 뒀는데.’
배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거의 마법에 가까운 힘.
피를 매개체로 다양한 능력을 구사할 수 있었다.
"네놈들의 죄는 피로 받아내겠다."
타구봉의 끝이 거칠게 돌아갔다.
명한은 이를 계속 잡을 수 없어 손을 풀고 힘껏 후려쳤다.
탱, 소리와 함께 타구봉이 허공에서 공회전을 했다.
그리고 그 틈.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붉은 기운이 칼날처럼 솟구쳤다.
"봉이 없다고 내가 만만해 보였나?"
명한은 되레 앞으로 나서며 손뼉을 강하게 쳤다.
내공과 내공이 충돌하며 강한 충격파를 내뿜었다.
붉은 칼날은 충격파에 휩싸여 허공에서 사라졌다.
마법에 가까운 힘이라도 강한 기공이면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누군데 이곳을 침범하고 우리의 능력을 알고 있지?"
"글쎄. 그걸 알려주면 지금껏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없지."
"……상관없다. 어차피 무림의 버러지 중 하나. 제법 실력이 있는 듯 보이니, 네놈의 피와 심장도 대업을 위해 사용해 주마."
"그래. 그런 태도가 딱 좋아."
명한이 극천일무기를 끌어 올리며 자세를 취했다.
"나는 아직도 예전 습성이 조금 남아 있어서. 사람을 제물로 삼고, 피와 심장을 대가로 바치는 짓거리는……용납이 안 되거든."
현대인의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