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235)

악불군

명한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가면 남자의 고개가 그 반대쪽으로 휙 돌아갔다.

명한이 이번에는 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찬가지로 가면 남자는 고개를 그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반항적인 시선 처리.

"차렷."

그제야 움찔하며 고개를 똑바로 했다.

"잔챙이도 이런 잔챙이가 없단 말이지. 혈교에 사람이 그렇게 없냐?"

"……"

"대답 안 해? 더 맞을래?"

바닥을 탁탁 치는 타구봉에 가면 남자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극천마인이 모두 죽고 난 뒤 ‘정신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한참을 두들겨 맞았다.

그 고통은 혈교의 고문보다 더 끔찍했다.

"저, 저도 나름대로 혈교의 본가 출신입니다. 정예라 이 말이에요……"

"네놈 하는 꼴은 전혀 아닌데?"

"진짜인데……"

우물쭈물 답하는 놈의 얼굴은 전형적인 소인배의 그것이었다.

이런 중차대한 일을 맡길 만한 재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본가 출신이라고 했지? 혈교도 혈통주의로 굴러가는 건가?’

그렇다면 무능력한 놈이 요직에 앉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럼 뭐 그건 됐고. 여기서 무슨 작당질인지나 말해."

"그, 그건 답할 수 없습니다!"

"뒈지게 맞고 나서 답할래? 아니면 그냥 순순히 말하고 편해질래?"

"크, 크윽! 비겁한……"

"비겁? 사람을 저렇게 인형으로 만들어서 이용한 새끼가 어디서 비겁 타령이야. 네놈도 사지 혈맥을 끊어서 인형처럼 매달아 줘?"

"다, 답할게요! 답하면 되잖아요."

땅을 파고드는 타구봉의 놈의 입이 술술 열렸다.

완벽하게 상세 계획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대략적인 그림은 그려졌다.

앞서 명한이 추측한 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경쟁 상대를 먼저 제거하려 했다. 그걸 너희 혈교가 돕고, 대가로 극천마인의 재료를 수급했다 이건가?"

"네, 네. 맞습니다, 맞아요. 천마대전은 명분과는 다르게 내전 가깝게 과열되고 있으니까요. 이를 잘 부추겨서 전력을 갉아먹으며 극천마인을 양성하면 안에서부터 고꾸라뜨리는 것도 가능하리라 보고 있었습니다."

"하여튼 혈교 새끼들이란."

"……"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한결같은 비열함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면이 적잖아 있다.

표면으로 대두하는 신교와는 다르게 이들은 언제나 뒤에서 암약하니까.

"저기 저 가운데에 묶여 있는 악불군은 뭐야? 그들도 너희가 잡아 온 건가?"

"그는 아닙니다. 본래부터 이곳에 감금되어 있었어요. 발견했을 때는 거의 폐인에 가까웠죠. 이를 교주께서 구해서 저만큼 회복시켜 놓은 겁니다."

"모든 경맥이 끊어져서 망가진 인간을 회복시켰다?"

"교주께서는 신과 같은 능력을 가졌거든요. 그분께 불가능이란 없어요. 한때 천마와도 자웅을 겨루던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있잖아요."

"그래. 그건 좀 대단하다."

극천마인이 소총이라면 악불군은 핵무기다.

고나 강시 등 기괴한 것들은 그저 일시적인 두려움의 대상일 뿐, 절대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과는 비교가 안 된다.

중요한 건 여전히 악불군이었다.

"이곳에 묶인 다른 죄인들은 악불군을 제어하기 위한 제물로 봐도 되는 건가?"

"……어? 그걸 어떻게?"

"술과 법에 대해서는 나도 좀 알아. 벌레로 진원진기를 태워서 그 기운을 악불군 쪽으로 모으고 있잖아. 혈교의 술법인가?"

"혹시 모산파 출신입니까?"

"헛소리는 하지 말고."

"아니, 그럼 어떻게 술법에 대해서 그리 잘 아십니까? 중원의 무인들은 힘만 믿고 날뛰는 무지렁이들 아닙니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하셨는데……"

"네 교주가?"

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도 확신했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전체 내용을 아니까 짐작하는 거지. 진짜로 여기 사람이었다면 몰랐을 거야.’

술법은 무인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이단.

배우는 것도 쓰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현실이다.

"술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나?"

"아, 아뇨. 이건 진짜 몰라요. 악불군 그자를 묶어 둔 술법은 교주께서 친히 설치하신 거라 감히 엿볼 수도 없었어요."

"흠. 그럼 술법이 완성된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지?"

"그건……"

"이것도 모른다고 거짓말하면 머리를 깨주겠다."

"아, 알아요! 이건 나도 알아요. 술법이 완성되면 악불군은 철저하게 교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생령(生靈)이 된다고 했어요."

"생령?"

"살아있지만 죽은 영체…… 저는 그렇게만 알아요."

명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혈교에 대한 건 여러 설정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생령 같은 건 없었다.

‘뜻만 보자면 생강시 같은 건가?’

짐작 가는 건 있지만, 역시 확실하지는 않았다.

잠시 생각을 이어가다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정리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낸 것 같다."

"그, 그럼 전 살려주시는 거죠?"

"설마."

명한이 타구봉을 뽑아 놈의 턱 끝에 댔다.

"야, 얌전히 협조하지 않았습니까!?"

"응. 그건 수고했어. 근데, 봐봐. 저기 저 죽은 무인들은 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죽지도 못하고 육체에 갇혀서 저런 고통을 받았을까."

"그, 그건 내 잘못이 아닙니다! 내 죄가 아니에요!"

"개소리."

우드득―!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타구봉을 휘둘러 목을 부러뜨리는 명한.

아무리 생과 사를 가지고 노는 무림인이라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힘을 다하여 죽으면 그 뒤는 영면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

"네 시체를 도구로 부리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겨라."

단죄는 순리였다.

#

명한은 한참을 고민했다.

악불군에게 걸려있는 술법을 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그 답을 알기 위한 사색이었다.

"다른 종유석의 죄인들이 힘을 전달하는 원천이라면 이를 끊어서 악불군을 약화시킬 수 있어. 본래는 폐인이었던 인간이니 이를 유지하기 위한 기운도 만만치 않을 거야."

"기운의 전달이 이미 다 끝난 거면? 동남동녀와 고수의 심장을 원했잖아.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라면 죄인을 다 처리해도 소용없는 거 아닐까?"

"효과가 있는지는 알아낼 방법이 있어."

"어떻게?"

명한이 손가락으로 악불군이 묶여 있는 종유석을 가리켰다.

"직접 맞아보면 돼. 힘이 약해지는 거라면 체감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야. 만약, 소용없는 짓이라면 때려치우고 도망쳐야지. 저 인간이 깨어나면 우리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될 테니까."

"끄응. 천마와 자웅을 겨루던 인간이라고. 까딱하면 죽을지도 몰라."

"그만큼 경험은 확실하지. 아니면 겁나기라도 해?"

"흥. 누구한테 하는 말이냐? 너나 저 인간 손에 모가지 날아가지 않게 조심해."

이렇게 다음 행동은 정해졌다.

벌레를 뽑은 죄인은 대충 봉합해서 모셔두고 악불군으로 향했다.

같은 모습 같은 자세로 종유석에 묶여 있었다.

"최대한 안전하게. 잡힐 거 같으면 도망쳐."

경고는 확실하게 못 박고 명한이 먼저 움직였다.

처음부터 극천일무기였다.

강대한 내공에 타구봉이 부러질 듯 진동하며 태산과 같은 일격을 선보였다.

극천일무기, 절의 요령이었다.

"쯧. 같이 움직이자, 향아."

"네, 아가씨!"

하지만 그 엄청난 절기마저도 악불군에게는 닿지 못했다.

무형의 막이 타구봉의 떨림을 좌우에서 조인 뒤, 이를 강제로 당겨서 명한을 눌렀다.

하늘이 떨어지는 것 같은 압력이었다.

무릎이 저절로 굽혀지고 전신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떨렸다.

은소소가 지켜보지 못하고 바로 검을 꺼내 들고 끼어들었다.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혼원일기였다.

"……막아!?"

악불군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엇이라도 벨 수 있다, 자신하던 혼원일기를 맨손으로 잡아낸 것이다.

손아귀에서 일그러지는 기운에 은소소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아가씨!’ 이때, 향아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은소소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강룡파천의 초식으로 허공을 쳤다.

그물처럼 퍼지던 강기의 막이 힘에 밀려서 잠시 떴다.

"젠장, 약해진 거 맞아!?"

두 사람으로 힘이 쏠린 덕분에 명한이 풀렸다.

바닥을 타구봉으로 쓸고 탄력으로 거리를 벌렸다.

살아있는 생명처럼 강기 다발이 그가 있던 위치를 난도질했다.

바위가 두부처럼 으깨졌다.

"이건 우리끼리……으악!"

"조심해요, 아가씨!"

아가리를 벌린 악마처럼 허공을 집어삼키며 떨어지는 강기의 검.

기로 만들어진 검 수준이 아니었다.

이기어검, 허공섭물, 심검합일.

무슨 말을 붙여도 이 괴물 같은 검격에는 비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거의 구르다시피 악불군의 거리에서 도망쳤다.

다행히 옷자락이 뜯기는 것으로 피할 수 있었다.

"후우. 후우. 이건 진짜로 천마 수준이잖아! 내가 천마검을 배웠을 때, 그 인간에게서 느꼈던 압박감이 이런 거였다고!"

"도, 도무지 틈이 안 보여요. 무의식으로 움직이고 있는데도 모든 방위를 기로 막고 있어요.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면 몸통째로 잘려나갈 거에요."

은소소와 향아는 질겁을 했다.

나름 강자들과 대전을 겪어온 둘이지만, 악불군은 차원이 달랐다.

의식이 없고 완벽한 상태가 아님에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염병. 현경을 넘어서면 작은 한 걸음이 차원이 다른 격차라고 하더니……"

습작의 설정으로 적어둔 강함과 몸으로 느낀 강함은 전혀 달랐다.

화경과 현경의 한 계단이 전혀 아니었다.

종유석에 몸이 구속되어 있지 않고, 힘이 약해진 것이 아니었다면 일행은 몇 초식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소백, 어떻게 해? 정말 이 괴물을 상대로 실험할 수 있겠어?"

"……후우."

벌벌 떨리는 손을 명한이 움켜쥐었다.

솔직히 자신 있게 긍정을 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건 둘도 없는 기회야.’

현경의 극치에 다른 고수.

억만금을 줘도 이런 천운은 오지 않는다.

"일단 다른 죄수부터 처리하고 보자."

위험은 감수하기로 했다.

#

죄수 한 무리를 처리할 때마다 악불군을 찾았다.

그가 약화되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사실 싸움이라기보다는 간신히 버티는 수준.

몇 번이나 덤벼 봤지만 제대로 된 공격을 성공시킨 적은 없었다.

"허억. 허억. 이 괴물은 정말로 약해지긴 하는 거야?"

강자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은소소마저 약한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 어떤 무공, 그 어떤 기술을 사용해서 악불군은 태산이었다.

꿈쩍도 하지 않고 모든 걸 받아냈다.

일행의 상처만 늘어났을 뿐이다.

"도련님, 이건 무의미한 싸움 같아요. 차라리 벌레를 뜯어낸 죄수를 데리고 귀의를 찾아가죠."

명한이라면 끔뻑 죽는 향아도 이번에는 다른 의견을 냈다.

진실을 꿰뚫는 그녀의 눈으로도 악불군은 한계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죄수를 처리해도 그 힘의 불꽃은 약해질 기미가 없었다.

"……아니. 아주 조금이지만 효과가 나타나고 있어."

"정말? 대체 어디가? 처음이나 지금이나 방어에 급급한 건 변함없는데?"

"내공이나 경지에 대한 판단이 아니야."

명한이 타구봉을 들어 악불군 앞을 가볍게 그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선이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수십 수백의 복잡한 기운 중 일부였다.

‘언젠가부터 묵혼공이 반응하기 시작했어.’

태어나기를 영통했던 천재의 무공.

힘의 쇠락은 느껴지지 않으나 대신 다른 것이 피부로 와 닿았다.

"악불군은 천마와 자웅을 겨룬 절세 검호. 드높은 검의 경지만큼이나 그 고고한 성품은 세상에 견줄 이가 없다고 했지. 그런 사람이 이런 모습으로 타의에 농락당하는 걸 반길 리가 없어."

"……악불군의 혼이 느껴진 거냐?"

"그의 괴로움. 그의 고통. 그의 분노. 그의 슬픔. 거대한 힘에 가로막혀 있던 그 감정들이 조금씩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어. 이를 해방할 수 있다면, 지독한 주박도 깨뜨릴 수 있을 거야."

그 어떤 술법으로도 사라진 혼을 대체할 수는 없다.

"풀어주자. 그는 이런 취급을 받아도 좋을 사람이 아니야."

다시금 타구봉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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