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235)

혈교

혈교는 작금의 사파가 시정잡배로 인식되기 전.

한때, 중원을 거의 지배했던 거대 세력의 이름이다.

이들은 무공과 주술을 혼합하여 종교적인 색채로 그 몸집을 불렸고, 당시 왕조의 주인이었던 황제마저 꼭두각시로 이용했었다.

후에 이를 타도하기 위한 연합체가 결성.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뒤로 혈교는 무너졌다.

하지만 거대 세력의 말미가 그렇듯,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혈교가 개입되어 있다면 보통 일이 아니야. 놈들의 수법은 음험해서 보통은 알아차리기가 힘들거든."

"그럼 교의 장로나 팔반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건가?"

"글쎄. 그들 역시 엮여있지 않는다고 장담은 못 하니까."

"끄응. 대전을 앞으로 이게 무슨 일인지."

"천마대전."

시기를 고려해 보면 혈교가 노리는 건 뻔하다.

신교의 모든 주력 인사들이 모이는 대형 행사.

그 안에서 무언가를 획책하는 것이다.

‘하지만 습작에서는 없던 일. 아무리 내용이 바뀌었어도 이 정도 큰 변화가 생길까?’

명한으로서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소백.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하지?"

"……직접 확인해봐야지. 혈교 놈들이 뭘 노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내 목표에 방해가 된다면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어."

"휴우. 어째 너랑 다니면 편할 날이 없네."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어."

"흥. 후회가 뭔데. 먹는 거냐?"

두렵다고 돌아갈 수는 없다.

흥흥대는 은소소의 어깨를 두드리며 명한이 앞으로 나섰다.

[혈교(血敎)의 비밀을 파헤쳐라]

[의뢰 등급 : 70]

[제한 시간 : 일주일]

[완료 보상 : 천상급 영약, ???]

때맞춰 떠오르는 공략 알람.

‘없던 건데. 제멋대로 나오는군.’

어쨌든 공략 시작이었다.

#

무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들쑤셔 보는 것이 최고다.

나오는 반응으로 그 역학 관계를 알아보기 쉬우니까.

해서, 명한은 악불군이 묶인 종유석 주변의 다른 괴인들을 사냥했다.

"하! 저건 청성파의 명안 도인이잖아! 예전에 실종됐다고 하더니만 여기 있었네."

"이쪽은 해사방의 묵암 방주다. 사라진 지 10년도 훌쩍 지난 사람이 이곳에 버젓이 살아있었어."

만나는 괴인 면면도 범상치 않았다.

대부분이 유명 방파에서 실종된 인물.

정마대전 당시 지하 미로로 끌려온 이들이 태반이었지만, 확실치 않은 경우도 꽤 많았다.

"확실하네. 모두 벌레에 의해서 진원진기를 태우고 있어."

"그렇게 불태운 생명력이 혈교의 수법에 의해서 이용되고 있다는 건가?"

"이 수법에 대해서는 나도 확실하게 모르겠어. 다만, 기의 흐름이나 땅에 박힌 종유석의 배치를 볼 때……일종의 진법인 건 맞아."

"진법? 뭘 막는 거야?"

"아니. 그런 종류의 진이 아니야. 이건 말하자면……"

"흡수. 진을 통해서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어요."

뒷말은 향아의 것이었다.

"보이는 거냐?"

"네. 굉장히 복잡하고 난해하지만, 불타버린 생명력은 마치 불씨처럼 흩어져서 중앙의 종유석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어요."

"악불군을 향해서 말이지?"

"네."

한때 천마와 자웅을 가리던 전설적인 고수.

그런 인물에게 혈교의 수법으로 기운을 주입한다.

누가 봐도 평화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건……"

"거기 누구냐!?"

이어지는 추측을 입으로 정리하려는 순간.

일행이 움직이는 방향 반대쪽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장포에 무늬 없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인물이었다.

"쯧. 시끄럽게 굴기 전에 제압해."

"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인물에게 접근하는 향아.

손에 내기를 담아 옆구리를 찔렀다.

절정의 보법과 절정의 장법이었다.

"악―!"

"향아!"

하지만 그 손이 옆구리를 후려치기 전.

어디선가 그림자가 튀어나와 향아의 어깨를 때렸다.

피하기에는 늦은 터라, 향아는 급히 몸을 말아서 충격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둔탁한 충격을 받으며 수 걸음을 날아가 겨우 바닥에 착지했다.

"괜찮아!?"

"으, 으윽. 죄송해요, 도련님. 예상하지 못했어요."

"됐고, 몸부터 추슬러."

입가로 흘러내리는 핏줄기 한가락.

적지 않은 내상의 증거였다.

"감히 어디서 온 잡것들이 대업을 방해하려 하느냐."

그리고 그 모습에 가면 쓴 인물이 득의한 목소리로 말했다.

"향아를 다치게 해?"

"향아? 아. 그러고 보니 네 얼굴 낯이 익다. 사십팔궁의 소백이라는 자로구나."

"날 알아?"

"알다마다. 신교의 무지렁이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꿰고 있다."

"지하에서 이 짓거리를 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말이네."

"후후후. 자기 발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무지렁이들. 너희 신교라는 것들은 어차피 그 수준밖에는 되지 않는다."

남자는 굉장히 자신감에 차 있었다.

향아의 기습을 막고 상처입힌 것에서 자신의 우위를 확신한 것이다.

앞서 향아를 공격했던 그림자가 그 주변에 무려 다섯.

아예 근거 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게 혈교의 자신감인가?"

"……뭐? 네놈이 그걸 어떻게?"

"맞네, 혈교."

"큭. 감히 장난질을!"

부풀어 오른 자신감에 명한이 미끼를 던지자 덥석 물었다.

확실히 혈교.

그리고 남자 역시 혈교의 소속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패퇴한 세력 주제에 또 무슨 장난질을 치려고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지?"

"패퇴? 헛소리. 우리 혈교는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신교라 지칭하는 너희 마교도 중원의 머저리들도 전부 착각하고 있을 뿐."

"자신감이 아주 머리끝까지 차 있나 보네."

"하하하. 너희 무지렁이들은 우리의 힘을 모른다. 몇 수 익힌 무공 따위. 우리의 위대한 술법과 비교하면 하찮을 뿐이지."

"네 애완동물도 전부 그 술법의 소산인가?"

"쿡쿡. 떠보는 걸 좋아하는군. 뭐, 좋아. 어차피 상관없겠지. 이곳을 본 이상 네놈은 죽은 목숨이니까."

참 말하기 좋아하는 놈이다.

명한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주변을 끊임없이 관찰했다.

다행히 추가적인 적의 증원은 없어 보였다.

"이 아이들은 혈교의 위대한 수법으로 만든, 극천마인(克天魔人)이다."

"……이름하고는. 아주 그냥 자의식이 넘쳐 흐르네?"

"하하하. 이 위대한 작품의 위력을 모르는 네놈이 어찌 이해할까. 혈교의 위대함은 이미 천리마저 극복했다. 삶과 죽음의 너머.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들을 발아래에 두기 시작했다."

"그 인형이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라고?"

"너희 무지렁이들의 화경이니 현경이니 하는 구분 따위. 이들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는데? 향아야, 네 눈에는 어떻게 보이니?"

내상을 다스리던 향아가 눈을 반개했다.

"죽었어야 할 사람을 억지로 잡아서 육체의 틀에 붙잡아 두고 있어요. 그 비명과 고통이 전부 느껴져요. 이건 무언가를 초월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비틀어서 장난을 치고 있을 뿐."

"그래. 나도 같다."

명한의 눈에도 그림자의 모습이 꿰뚫려서 보였다.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보이나, 그 안에는 부서지고 뭉개진 영혼뿐이었다.

이미 죽어 내세로 떠났어야 마땅한 혼이 그릇에 갇힌 채 비명만 내지르고 있는 형태.

조악하고, 악독한 장난질에 불과했다.

"이들은 이미 죽은 몸이야. 그릇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돕는 일이겠지."

"마음에 안 들어. 무인의 삶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타구봉을 뽑아 든 채 앞으로 나서는 명한.

그 옆으로 은소소가 살벌한 기세를 감추지 않고 어깨를 맞댔다.

"……흥. 너희 같은 무지렁이들 눈에는 고작 그런 편린만 보이겠지. 상관없다. 어차피 죽고 나면 너희의 몸도 같은 방식으로 써주면 그만이니까."

가면의 남자가 앞으로 손짓했다.

그 동작에 맞춰 앞으로 나서는 다섯의 극천마인.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죽여."

불이 붙듯 전투가 시작되었다.

#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존재한다.

이건 육체가 ‘정상적’으로 구동하기 위한 제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극천마인이라는 놈들에게는 그런 한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뼈와 관절이 부러지는 한계 이상의 타격을 고집하고, 근육과 신경의 제한점을 넘어서 몸을 움직였다.

그만큼 강하고 빨랐지만, 몸은 차근차근 망가졌다.

"……약으로 절여 놓았군."

아니, 그랬어야 한다.

부서졌던 몸이 단번에 회복되는 걸 보기 전까지는.

"하하하. 네놈들 같은 무지렁이는 알 수 없는 고등의 기술이다."

"고등은 기술은 무슨. 홍련을 써서 신체 일부를 대신하고 있구만."

"……"

그리고 그것은 혈염마녀에게서 보았던 홍련의 구조와 정확하게 같았다.

즉, 그녀에게 홍련을 건넸던 이들 역시 눈앞의 혈교와 관계가 있다는 의미.

‘진원지기를 불태우고 뼈와 근육은 홍련으로 대체한다.’

오래 쓸 방법은 아니지만, 파괴력만큼은 확실했다.

"그래. 같은 방식으로 악불군 역시 마인으로 삼을 셈이로군."

"……너, 너!? 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홍련이 마물이기는 하지만 뿌리 없이 자랄 수는 없어. 그렇다고 뿌리를 내리고 키우자면 제어가 안 되고. 적당히 양분을 공급하며 제어할 방법이 필요했겠지. 벌레를 통해서 사람의 진원진기를 태우는 건 고를 양성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이미 오래전에 오독문에서 실험했던 방법이기도 하다.

양분을 지속적으로 주입해서 인간의 내공이나 생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기운을 얻는 것.

혈교의 방법은 고를 통한 홍련의 통제였다.

‘그래서 동남동녀의 피와 고수의 심장이 필요했던 거로군.’

상급의 고를 배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이익!! 당장 저놈을 죽여라! 너무 많을 걸 알고 있다!"

"태반은 네놈이 떠든 거다, 머저리."

명한의 타구봉이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달려들던 마인의 공세를 축으로 흘려내는 방식이었다.

둘이 미끄러지고 하나가 딸려 들어왔다.

‘강해. 확실히 능력 자체는 강해. 하지만……’

웅. 하는 소리와 함께 떨기 시작하는 타구봉.

딸려온 마인의 손아귀를 밀어내고 낭의 요령으로 중심을 눌렀다.

홍련의 강도와 유연성은 이를 충분히 버티고도 남지만, 요령은 따라올 수 없다.

터엉―!

누르던 힘을 거꾸로 튕겨 올렸다.

만세를 부르며 큰 걸음째로 밀려나는 마인.

명한이 극천일무기의 힘을 타구봉에 실어서 강하게 찔렀다.

"소용없다! 극천마인의 몸은 강철보다도 단단……"

퍼석.

마인의 가슴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다.

홍련이 강해봐야 극천일무기의 파괴적인 힘은 견딜 수 없다.

놈의 얼굴이 당황으로 뒤범벅이 됐다.

"그러니까 견적을 잘 봤어야지."

서걱―!

이번에는 은소소의 혼원일기.

양손을 들어서 막던 마인의 몸통으로 통째로 잘라버렸다.

가면 쓴 혈교의 인물은 입까지 떡 벌리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어, 어떻게!? 광검의 검기로는 극천마인의 강도를 뚫어낼 수 없다!"

"흥. 대체 언제 적 자료로 날 평가하는 거지? 천마의 검기만이 내 전부라고 생각했나?"

"이럴 수는 없어. 우리의 평가에 네놈들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상을 좀 보라고. 대체 혈교가 언제 적 혈교냐."

남은 마인도 마찬가지였다.

명한의 봉과 은소소의 검은 이들의 강함을 무색하게 만들며 압도했다.

힘과 속도에서는 분명 화경급 이상의 능력을 자랑했지만, 그건 단순한 수치에 불과했다.

무공을 사용하는 무인이라는 건……

"심(心), 기(氣), 체(體). 무인이라면 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법."

"균형을 갖추지 않은 인형 따위는 우스울 뿐이다."

모든 마인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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