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괴물들
명한 일행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악불군 근처를 지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어떤 반응이 올지는 예단이 어려웠다.
한 걸음씩 종유석에 묶인 악불군에게로 다가갔다.
"반응이 없는데?"
"……잠들어 있는 건가?"
세 걸음 안까지 다가갔음에도 반응은 없었다.
모종의 수법으로 잠들어 있다.
단순한 생각이 머리에 주력으로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위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검(氣劍)이었다.
검에 내기를 싣는 것을 넘어 순수하게 기로 만들어진 검의 경지였다.
재빨리 물러난 명한의 옷자락이 날카롭게 베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턱째로 머리가 조각날 뻔했다.
"깨어난 건가!?"
"젠장, 준비해!"
무기를 꺼내고 주먹에 내공을 둘렀다.
"……"
"뭐지?"
하지만 추가적인 행동은 없었다.
악불군은 여전히 종유석에 메여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앞서 날린 기검이 착각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혹시 그런 건가?"
명한이 확인차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쉬이익―!!
기다렸다는 듯 날아오는 기검.
재빨리 뒤로 물러나 기검을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옷자락만 베이고 피할 수 있었다.
"위험하잖아. 뭐 하는 거야, 소백."
"확인. 눈앞의 악불군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어."
"그걸 굳이 몸으로 해야 했나. 그래서 뭐 어떤 상태인데?"
"무의식. 본능에 의한 반응만 남은 상태라고 봐야겠지."
명한이 악불군 주위 두 걸음 거리로 원을 그렸다.
이게 악불군이 반응하는 공간이었다.
"무의식으로 그런 공격이라니.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이 사람?"
"내가 알기로 악불군은 화산에서 나타난 불세출의 기재였어. 한때, 천마와도 자웅을 겨루었던 인물이라고 하지."
"천마와?"
"현경의 끝자락. 아니, 어쩌면 그 너머에 닿았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만전 상태라면 우리가 천명이 있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대체 그건 뭐 하는 괴물이람. 그럼 어째? 앞서 속삭이던 놈들이 이 괴물을 손에 넣으면 천마대전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잖아."
명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해도 천마 수준에 근접한 괴물과는 싸울 수 없다.
적어도 지금은 이 괴물을 전력에서 배제해야 한다.
‘문제는 그 방법인데.’
희미하게 느껴지는 약향.
그리고 주변을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는 영기.
흔적은 읽을 수 있지만, 자세한 방법까지는 명한도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주변을 좀 조사해 보자. 이 정도 되는 괴물을 쇠사슬 따위로 묶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분명, 무언가 있을 거야."
독초가 있는 주변에 해독초도 산다고 하던가.
명한은 그런 예감을 받았다.
#
해답.
아니, 해답 비슷한 것을 이내 발견했다.
명한 일행이 악불군을 떠나 안쪽으로 탐색을 떠난 지 반각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감옥? 아니, 사육장이라고 해야 하나?"
"지독한 꼴이네. 이들이 선인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커다란 종유석에 쇠사슬을 달아 원형으로 수 명의 사람이 묶여 있었다.
물론, 단순히 이것만이면 잔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쇠사슬에 묶인 이들의 상태가 끔찍했다.
살갗이 벗겨져 근육이 드러나고 섞어서 구더기가 들끓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살아있는 게 용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화산의 악불군과 같은 거겠지?"
"응. 지하 미로의 죄인들로 뭔가를 실험한 모양이야. 차이가 있다면 아마도 무공의 고하겠지. 악불군은 견디지만, 이들은 견디지 못하는."
"신교에 온갖 잡학이 즐비해 있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런 식의 실험이 자행되고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어. 정말로 신교의 사람이 주도하는 일일까?"
"그때, 무언가를 요구하던 목소리는 동남동녀와 심장 따위를 달라고 했어. 이런 방식은 현재의 신교와는 어울리지 않아."
"그럼 다른 세력이 천마궁 아래에서 암약하고 있다고?"
"……이건 좀 더 확인을 해봐야겠다."
이것만으로는 명한도 확답이 어렵다.
"그럼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증상도 확인해야 하니, 몇 사람 잡아가자. 귀의가 확인하면 뭐라도 알아내겠지."
"순순히 잡혀줄 것 같진 않은데?"
"겸사겸사."
명한이 사람을 묶고 있던 종유석을 타구봉으로 후려쳤다.
종유석이 단번에 으깨지자 쇠사슬이 사방으로 튀며, 괴인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악불군보다는 둔한 반응이었다.
"악불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모두 한가락 하던 고수들이다. 방심하지 마."
"그걸 죽이지 말고 제압하라는 거지?"
"어려워?"
"흥. 내 검이 베지 못하는 건 없어!"
일행도 괴인들의 움직임에 맞춰서 수를 나눴다.
명한이 개중 셋을 맡고 향아와 은소소가 각각 한 명씩 담당했다.
"이건 팽가의 도법이잖아?"
"조심해요! 이 사람들 내공은 그대로예요!"
육체는 쇠했어도 고강한 내공과 기술은 그대로였다.
순식간에 명한 일행을 압박해 들어왔다.
"이놈들 모조리 진원진기를 태우고 있어."
명한은 삽시간에 수 합을 나누며 상대 괴인들의 상태를 꿰뚫어 봤다.
심기체의 핵심 요소 중 체가 무너졌음에도 괴인들이 고강한 무공을 발휘할 수 있던 건 생명을 연료로 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묵혼공을 통한 반야의 눈이 타들어 가는 괴인들의 심지를 확인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혼백을 짓이겨서 인형처럼 만들어 뒀어.’
마치 백치와 같은 상황.
몇몇 본능에 남은 행동만이 생명을 원료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그……아아아아아!!"
강맹한 일격을 날리는 괴인.
응집된 기운과 매서운 권격은 소림사의 그것이었다.
무너진 권의 형을 생명을 불태운 힘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이건 애초에 오래 쓸 방식이 아니야.’
아무리 고수라도 생명을 태우며 장기간 싸울 수는 없다.
이 방식은 단기간에 써먹기 위한 편법에 불과했다.
"불쾌하군."
명한이 괴인의 손을 엇잡아 균형을 비틀었다.
머리가 아래로 다리가 하늘로 향했다.
텅 빈 것은 가슴부터 골반까지의 영역.
짧게 잡은 타구봉이 그 영역을 후벼팠다.
비명조차 없이 괴인의 몸이 벽으로 날아가서 처박혔다.
"……사로잡는다고 하지 않았어?"
"안 죽어, 저 정도로는."
짧게 답하며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어깨로 쇠사슬이 스치고 볼 앞으로 발끝이 지나갔다.
공간에 대한 감각이 날카로운 명한에게 어설픈 협공은 그저 조각 맞추기에 불과했다.
무릎을 봉으로 걸어서 넘어뜨리고, 쇠사슬의 끝은 발로 직접 밟았다.
즉―하는 마찰과 함께 괴인 둘이 앞쪽으로 고꾸라졌다.
"누워있어라."
쿠웅―!!
그 위로 떨어지는 무형의 기운.
극천일무기의 힘이 실린 암격이었다.
바닥이 한 족장 깊이로 푹 파이고, 괴인은 짓눌린 물고기마냥 퍼덕거렸다.
‘아, 안 죽는 거 맞지?’ 살짝 당황한 목소리에 명한은 그저 끄덕이기만 했다.
"도와줄까?"
"아니.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하는 편이 나을 거 같아."
"저희가 상대할게요, 도련님!"
넘겼다는 죽일 거 같아서.
은소소와 향아가 열심히 싸웠다.
#
오래지 않아 괴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부상은 꽤 심했지만, 죽은 이는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튼튼하네. 이 정도로 맞으면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진원진기를 태우고 있으니까. 몸 전체가 공기로 가득 찬 풍선과 같아."
"풍선?"
"그러니까 큰 가죽에 바람을 집어넣는다고 생각해 봐. 두들겨 패는 것으로는 크게 망가지지 않아. 찢어서 그 안의 바람을 모두 빼면 모를까."
"자의로 하는 건 아니겠지?"
"생명을 갈아가며 이런 곳에 묶여 있을 사람은 없겠지. 누군가 이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어."
명한이 쪼그려 앉아 괴인의 상태를 살폈다.
기력이 가라앉은 탓에 생명을 태우는 촛불이 위태로웠다.
마치, 멈춰 서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오래된 마차와 같았다.
‘이대로 두면 올라가기 전에 죽겠어.’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었다.
"향아야, 청명단을 꺼내."
"청명단? 그 귀한 약을 쓰려고?"
"다 죽으면 상황파악이 불가능해. 일단 살리고 봐야지."
상급의 영약, 청명단을 꺼내서 쓰러진 괴인의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사그라들던 불꽃이 잠시 기운을 받아서 일렁거렸다.
‘청명단은 원기를 회복시키는 영약. 하지만 진원진기까지는 무리겠지.’
예상대로 불꽃은 잠시의 회복세를 뒤로 다시금 잦아들었다.
"……이곳인가."
하지만 그 잠시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명한이 손을 날카롭게 벼려서 괴인의 복부로 쑤셔 넣었다.
북 찢어지는 소리에 은소소가 살짝 움찔했지만, 명한은 멈추지 않았다.
몸 안 어딘가 찰나의 순간에 원기를 나눠 받은 존재가 있었다.
‘처음부터 고려했어야 해. 지속적으로 진원진기를 태우는 건 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
무언가 이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잡았다."
이내, 무언가를 손으로 잡아서 밖으로 꺼냈다.
피와 내장이 줄줄 딸려오고 그 뒤를 이어 손바닥 정도의 크기의 벌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기에 수십 개의 날을 꽂아 넣은 채 바동거리고 있었다.
지독하게 역겨운 모습이었다.
"으, 으아아악! 이, 이게 뭐야!?"
"벌레. 이게 이놈들 몸속에서 진원진기를 태우게끔 강제하고 있었다."
"우욱. 욱. 일단 그것부터 좀 치워 봐."
명한은 벌레를 장기에서 떼어낸 뒤 들어 올렸다.
피로 범벅이 된 놈은 전신을 뒤흔들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이놈 봐라?’
그리고 이내, 명한의 손을 먹이로 삼아 발을 꽂아 넣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명한은 그러지 않았다.
생리를 알아야 대처할 수 있었다.
"양귀비. 패환초. 지네독. 엄청난 양이 섞여 있군."
"그, 그거 괜찮은 거냐?"
"괜찮아. 나한테는 칠채향이 있어. 제아무리 대단한 독이라고 해도 내 몸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지."
말 그대로였다.
명한의 몸은 세상 모든 독의 총아.
벌레에게서 감지된 독성은 그 즉시 분석.
배합과 약점 등이 실시간으로 명한에게 전달되었다.
"후."
그러기를 수십여 초.
명한은 벌레를 손에서 떼어낸 뒤 손끝으로 눌러서 죽였다.
"도련님, 몸은 괜찮으세요?"
"별거 아니야. 배합과 방식이 독특해서 당황했을 뿐, 그렇게 위협적인 건 아니니까."
"위협적이지 않다고? 악불군이 기둥에 묶여 있는 걸 봤잖아."
"그를 묶어둔 건 독이 아니야.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도구에 불과해."
"도구?"
명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눌러 죽인 벌레의 사체를 가죽 주머니로 포장했다.
다 해석하지 못한 독성을 이해하고 귀의에게 연구를 지시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악독한 수법이라도 배울 건 있었다.
"이 벌레는 남만의 충사(蟲士)들이 사용하는 도구야. 오독문에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실제로 이 벌레를 사용하는 고독은 오독문의 장기 중 하나였어."
"남만의 충사라고? 그들이 왜 이런 곳까지 온 거지?"
"이유는 모르겠어. 하지만 이 상황에 개입된 건 그들만이 아니야. 내가 악불군을 묶어둔 게 벌레가 아니라고 했지?"
명한이 벌레를 빼고 쓰러진 괴인의 피를 한 움큼 뿌렸다.
두서없이 그려진 붉은색 점들이었다.
"뭐야!?"
"세상에."
하지만 이 점들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한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경사를 통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마치 피가 살아있는 것처럼 한 방위를 쫓았다.
그리고 그 방위는 일행이 악불군을 보았던 바로 그쪽이었다.
"혈교(血敎). 과거에 뿌리 뽑았던 그 빌어먹을 놈들이 다시 나타난 거야."
아직은 만나서는 안 될.
습작 속 소백의 최대 적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