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미로
명한 일행은 지하 미로를 직선으로 가로질렀다.
되다만 영물이나 뒤틀린 마물 따위를 사냥하며 계속 움직였다.
처치한 수가 수백이고, 먹어치운 독과 영기도 그와 비슷했다.
누적된 피로만큼 경험과 보상은 차곡차곡 쌓였다.
"여기서 숨 좀 돌리자."
그렇게 움직이기를 반나절.
명한은 통로의 교차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벽면을 가득 채운 이끼와 틈 사이로 흐르는 물 덕에 그나마 호흡이 편한 곳이었다.
"이 지하 미로. 대체 얼마나 넓은 거야? 이만큼 움직였는데도 아직 끝이 안 보여."
"모르지. 천산의 전역으로 뻗어있는 거니까. 중간중간 자연 동굴과 맞물리면서 영역이 확장됐을 테니까, 아마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이러니 궁에서도 이곳을 배제하고 있는 거네."
"실제로 이 아래에 갇힌 이들이 여럿이지."
챙겨온 짐을 펼치며 야영지를 구축했다.
지하 미로의 넓이를 고려할 때 야숙은 필수적인 요소.
침낭 비슷한 깔개와 간이용 식기가 향아의 손에서 펼쳐졌다.
짐을 풀어 뚝딱 매만지니 그럴싸한 음식이 준비됐다.
몸종 경력은 허투루 쌓은 것이 아니었다.
"후우. 몸이 풀리는 느낌."
"마시면서 이거 단약을 하나씩 곁들여."
"뭐야? 영단?"
"영단은 싫다며. 이건 칠채향으로 만든 단약이야. 독에 대한 내성을 올려줄 거야."
명한이 손톱만 한 단약을 향아와 은소소에게 건넸다.
칠채향은 독과 약을 조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지금의 명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독에 대한 내성은 필요했다.
"으……써."
"소소, 아가씨. 당과 드세요."
"오, 고마워 향아."
미리 준비해 둔 다과도 펼쳐 놓는 향아.
당과를 포함, 각종 과자나 말린 과일도 섞여 있었다.
지하 미로.
목숨 걸고 도전하는 공포의 지역치고는 꽤 나들이스러운 준비였다.
"그보다, 소백. 앞으로도 계속 저런 짐승들하고만 싸우는 거야?"
당과를 쪽쪽 빨아먹으며 은소소가 물었다.
"일정 구역까지는."
"일정 구역?"
"이곳 지하 미로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거든. 우리가 지나온 곳은 어디까지나 통로의 역할로 배정된 구역이야. 영물들도 오랜 세월 영기에 노출되면서 자연스럽게 진화한 놈들뿐이고."
"그럼 그 아래는?"
"과거 신교에 도전했던 놈들의 감옥. 유폐된 죄인. 도망친 악인…… 온갖 괴물들이 모여 있지."
"그걸 그냥 이렇게 지하에 방치했다고?"
"설마. 지하 미로 전역에 구축된 자연 진법과는 별개로, 이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어. 신교 대대로 이를 담당하는 이들도 존재하지."
"만마당(滿魔黨)."
"맞아. 지금은 만마당의 당주 묵호주, 묵 선생이 맡고 있지."
신교의 여러 부서 중 가장 독특한 곳이 바로 만마당.
대부분의 곳이 각으로 이루어진 것에 반해, 이곳은 당으로 구별되고 있다.
당주인 묵호주는 팔반의 지시조차 무시할 수 있는 개별적인 권한을 가졌다.
천마 직속, 독립 기구로 존재하는 것이다.
"괜찮겠어? 만마당 관리 구역이면 위험할 텐데."
"위험하지. 하지만 위험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도 있어. 마물과의 싸움도 분명 좋은 경험이지만, 고수와의 싸움에 비할 바는 아니지. 너나 나. 그리고 향아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목숨을 건 대결이야."
"……네 각오가 그렇다면."
"저, 저도 도련님을 위해서 힘낼 거에요."
대전이 시작되면 천마궁의 모든 내규는 일시적으로 마비된다.
암살도, 독살도, 생사투도 모두 허용되는 아비규환의 시기.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방주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아래에서 찾을 사람도 있고.’
차를 홀짝이는 명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일행은 이틀에 걸쳐서 지하 미로를 종주했다.
지역이 넓은 만큼 갈림길도 여럿이었다.
그중 일부는 명한조차 알 수 없는 길이었다.
최대한 안전한 지역 위주로 탐사를 이어갔다.
그러기를 삼 일째.
"찾았다. 여기가 진법의 입구이자 출구야."
붉은색 비석이 좌우로 서 있는 커다란 통로였다.
비석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데. 이걸 만마당에서 세운 거라고?"
"이건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사어야. 만마당이 옛 왕조의 술법을 사용한다고 하니, 그중 일부겠지."
"옛 왕조의 언어라. 읽을 수는 있겠어?"
"내가 아무리 똑똑해도 그건 무리야. 하지만 대충 의미만 알고 싶다면……경고. 들어가면 죽음. 살아서 나올 수 없음. 뭐, 이렇겠지."
"크게 도움은 안 되네."
한술 더해지는 으스스함에 은소소가 팔뚝을 매만졌다.
평소 두려워하는 것 없는 그녀임에도 비석은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도련님, 이 비석 말이에요. 연결되어 있지 않아요?"
그때, 향아가 두 비석 사이의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네 눈에는 보이는가 보네."
"보여? 뭐가?"
"만마당이 지하 미로의 영역을 단절한 진법. 쇄혼금진(鎖魂禁陣)이라고 알려져 있긴 한데, 사실상 이름은 크게 의미가 없어. 이를 쓴 사람의 역량이 중요한 거라서."
"오래전에 친 진법이면 지금 만마당의 당주는 아닐 거잖아. 누군데?"
"천기자."
"천기자? 그 천기자? 천기를 읽고 만물에 통달하여 우화등선했다고 알려진 그 기인?"
은소소의 놀란 말투에 명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도 없이 별호만 존재하는 천기자는 중원 역사를 다 털어도 비교할 대상이 없는 기인이었다.
하지만 역사 어디에도 그가 신교에 몸담았다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기자는 본래 일월교의 교주였던 사람이야. 말하자면 신교의 선조 격이지."
"……정말이야?"
"비사지. 일월교에서 신교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역사의 뒷장과 같은 일이거든."
천기자가 일월교를 때려치우고 신교를 세웠다.
이런 간단한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그랬다면 현재의 신교에서 일월교를 없는 것처럼 취급할 이유가 없다.
"어쨌든, 그 덕에 우리는 편하게 됐지. 향아야 선이 닿는 곳을 얘기해 봐."
"네, 네."
향아가 눈으로 보이는 선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한 줄 한 줄이 진법의 묘리를 담고 있는 터라, 억지로 해제하다가는 되레 무너질 위험이 있다.
기운을 차근차근 되짚어서 그 형태를 재구축했다.
‘흐음. 확실히 묵혼공이 깊어져서 그런지 기운을 다루는 게 훨씬 편해.’
엇갈려 엮여있던 기운이 실오라기처럼 풀렸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짧은 파장과 함께 비석의 색이 옅어졌다.
"오. 방금 저거. 반짝이지 않았어?"
"기운의 흐름을 정렬했거든. 그걸 눈으로 볼 정도라면 너도 곧 한 단계 오르겠어."
"안 그래도 요즘 혼원일기가 어떤 건지 감이 좀 잡히는 기분이거든."
"좋아, 좋아. 혼원일기는 중원을 다 털어도 몇 없는 최상승의 무공이지. 차근차근 연마해."
"누가 보면 네가 혼원일기를 만들 줄 알겠다."
명한이 답 대신 가볍게 웃었다.
이 중원 땅의 모든 무공 중 그가 만들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남에게는 말하지 못할 그만의 비밀이었다.
"가자."
비석 너머로 걸음을 내디뎠다.
#
열기.
비석을 건너 통로에 진입한 명한이 처음으로 느낀 점이었다.
서늘하던 지하미로와는 다르게 이곳은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다.
"지하에 화굴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글쎄. 천산 아래에 용암이 흐르고 있다 해도, 이것보다는 훨씬 깊이 들어갔어야 해. 이건 이 안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열기야."
"불을 뿜는 용이라도?"
"쉬익?"
"쌍아, 넌 말고."
고개 내미는 쌍각사는 다시 품 안에 넣으며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갈 때마다 피부에 닿는 열기가 강해졌다.
처음에는 살짝 후끈한 정도에서 지금은 땀이 주룩주룩 흐를 지경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타죽겠는데. 이 길이 맞는 거야?"
"길은 맞을 거야. 문제가 있다면 이곳을 흐르는 오행의 기운이겠지."
명한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쿡 찔러서 몸 안쪽으로 당겼다.
일정 경지에 이른 묵혼공은 자연지기에 대한 감각도 날카롭게 만들었다.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할 오행의 기운 중 화기(火氣)가 도드라지게 강해져 있었다.
‘정말로 용암이라도 밀려 올라왔나?’
평범한 현상은 아니었다.
"……도련님."
순간, 향아가 무언가를 눈치채고 일행을 저지했다.
열기에 섞인 다른 무언가였다.
"자하?"
그리고 이내 명한도 그 기운을 눈치챘다.
화산의 무공 자하신공의 편린이었다.
천산과 화산의 거리는 만리도 부족할 정도.
이곳에서 자하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도련님, 저 너머에 누군가 있어요."
"선객이라니."
게다가 명한도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먼저 와 있었다.
지하 미로의 정체는 아는 자가 제법 있으니, 이 마굴을 탐할 자는 거의 없다.
아니, 명한은 지금까지 없다고 단정했었다.
‘이것도 내용이 변한 건가.’
슬그머니 긴장감이 올라왔다.
"……헛소리로 치부했는데, 정말 천마궁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군."
"후후. 입으로 독설을 뱉을지언정 거짓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 태도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군."
바람을 타고 대화도 전해졌다.
명한은 몸을 벽 뒤에 숨기고 청력에 집중했다.
"그래, 이자가 화산에서 유폐됐던 자하마인이라는 건가?"
"네. 자하신공에 심취하여 심마에 빠진 인물입니다. 광기로 천마에게 도전했다가 그대로 전신 경맥이 끊어진 채 이곳으로 버려졌지요."
"경맥이 끊어진 상태라면 그냥 폐인 아닌가?"
"후후. 단순히 폐인이 된 인간을 도련님께 소개해 드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분명, 폐인이 된 건 맞지만, 저희 고유의 방식으로 일정 부분 치료에 성공했습니다."
"흐음. 치료라."
절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
커다란 종유석에 누군가 묶여 있었다.
"이번 일에 쓸 수 있겠느냐?"
"약속만 이행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요."
"음침한 놈들. 동남동녀 이백. 그리고 소와 돼지의 심장 각각 100근. 맞느냐?"
"후후후후. 하나가 빠지지 않았습니까."
"쯧. 화경 고수의 심장."
"네. 모든 조건이 만족되면 여기 이 자하마인은 도련님의 것이 됩니다."
순간, 낮아지는 말소리.
속삭임에 가까운 대화였다.
‘……일군? 강유?’
경우 알아들은 건 ‘일군’이라는 단어 하나.
천마궁의 제 1서열, 강유의 별호였다.
"한때 이 자하마인은 중원 제일검으로 유명했던 인물입니다. 삼왕 오제? 이자와 비교하면 풋내나는 이들일 뿐이지요. 도련님이 바라는 일, 반드시 이룰 수 있습니다."
"오제 이상의 고수라."
"그만 사라진다면 모든 것은 도련님의 뜻대로. 이 노괴(老怪) 역시 영광을 한 움큼 베어 물 따름입니다."
"흥. 아첨 따위는 됐다. 모든 것은 약속대로 진행될 테니, 네놈은 준비만 하도록 해라. 화산파의 낡은 검이 그 인간의 심장을 찌른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겠지."
"모든 것은 도련님의 뜻대로."
마지막 말 이후로 대화는 끊어졌다.
발걸음과 기척이 반대쪽으로 멀어지고 이내 주변은 침묵으로 휩싸였다.
명한은 기댔던 벽에서 몸을 틀며 자신이 들었던 내용을 되짚었다.
"자하마인이라니."
자하검제, 악불군.
현, 화산파의 장문인인 악무군의 부친.
그리고 한때, 천마와 자웅을 겨루던 정파 제일의 고수다.
‘저런 괴물이 이곳에 있었다고?’
시작부터 쉽지 않은 전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