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작업
한바탕 소란이 가라앉았다.
융광을 비롯한 군소 소궁의 수작질은 시작도 전에 끝나버렸다.
몸종인 향아에게 소궁의 후원자가 박살 난 이상, 이걸 믿고 따라갈 사람은 없었다.
결국, 이에 합류했던 소궁들은 판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그래서 이게 개정판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
천마궁 전역에 모종의 서신이 돌았다.
현, 천마궁 내의 각 소궁을 서열로 정리해둔 정보지였다.
"소문에 의하면 암각에서 배포한 자료라고 해."
"암각이라. 천마대전에 기름을 들이붓는군. 다들 반응은 어때?"
"반반. 순위라고 해봐야 까봐야 아는 게 태반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암각이면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 않을까 싶어 해."
명한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신을 쭉 펼쳤다.
1위부터 48위까지의 순위가 전부 매겨져 있었다.
"난 15위인가? 생각보다 높은데?"
48위 가장 말단이었던 과거와 비교하면 압도적인 성장이었다.
"아무래도 향아가 융광 등을 때려눕힌 이력이 있으니까. 몸종이 저 정도인데 주인도 강하지 않을까 싶은 거야. 사절 시기의 소문도 있고."
"흐음. 그럼 내 위에 있는 이들이 대전의 경쟁 상대인가? 소소, 넌 몇 위지?"
"8위."
"내려갔네?"
"그동안 활동한 게 없으니까. 몇 놈 잡아서 베어버리면 다시 올라가겠지."
"무서워라."
"나보다 한 수 위면서 엄살은."
은소소가 입술을 비죽였다.
8위라는 자신의 순위도 15위라는 명한의 순위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한 손에는 꼽힐 텐데.’
알아주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윗단 이름이나 제대로 기억해 둬. 대전 시작하면 이 중 몇은 직접 잡아야 할 테니까."
"기억하고 뭐고 윗선은 대부분 궁의 서열과 같은데 뭐. 1위에 강유. 2위에 파운. 3위에 적운. 4위에 백리향. 그리고 5위에……응?"
본래 은소소가 있던 자리에 낯선 이름이 들어와 있었다.
기존 6궁의 ‘천지유’ 대신 ‘나형’이라는 이름이.
"나형? 내가 알기로 이 이름은 45궁의 철부지 아니야?"
"기억하고 있네. 너랑 비슷하게 천마궁에서 내놓은 자식 취급하던 그 나형이 맞아. 최근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엄청난 공적을 올렸더라고."
"공적?"
"서역의 포탈랍궁하고 큰 마찰이 있었을 때, 그가 직접 평정했다고 해."
"불가능한 말이야."
"증인이 수백이야. 포탈랍궁의 대승 나승탑탑을 일대일 승부에서 제압했어. 추정 경지는 화경 중반 이상. 그동안 힘을 숨기고 있던 거라고 생각 중이야."
"……"
명한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나형이라는 인물은 습작 기준, 이름만 적고 넘어간 캐릭터다.
활약도 비중도 전혀 없다.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정보의 부재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 뒤로도 순위별로 여럿이 존재하지만, 내 생각에 크게 중요하진 않아. 이 다섯. 앞으로 대전의 결과를 좌우하는 건 이들이 될 거라고 생각해."
"8위에 너도 있는데?"
"농담은 넣어 둬. 난 대전에는 관심이 없어. 이미 말했다시피 내 검은 오로지 널 위해서만 존재할 거야. 지금도 앞으로도."
"……"
"그, 그러니까 무사로서 말이야. 무사."
어딘가 미묘한 말에 은소소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손사래 치는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붉었다.
"알아. 나도 네가 내 편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고."
"크, 크흠. 알면 다행이네. 나같이 대단한 검수가 뒤를 받쳐주고 있으니까, 이번 대전에서 확실하게 네 실력을 보이라고. 궁의 서열을 뒤집을 수 있다면 네가 후계자가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아, 그거 말인데."
"응?"
"대전에서는 활약할 거야. 우승자만이 얻을 수 있는 특전이 꼭 필요하거든. 하지만 후계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 없어."
은소소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 자신이야 혈통이 천마의 것이 아니니, 한 걸음 멀어졌다고는 하지만 나머지는 아니다.
천마궁에 머물면서 천마의 후계자에 관심이 없다?
맞지 않는 말이었다.
"중원을 정벌한 신교와 절대 강자 천마. 분명, 매력적인 배경이지만 난 이 천하가 영원토록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건 네가 가진 무언가를 아는 능력으로 말하는 거야?"
"비슷해. 천마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얼마나 지났지? 벌써 꽤 오랜 시간, 팔반과 안주인들이 대리첨정을 하고 있어. 균열이 생기는 건 시간문제야."
"설마 천마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명한이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이건 아직 언급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습작의 흐름이 변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라면 더더욱.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신교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거야. 우린 이미 중원에 기반을 닦아 뒀어. 기회는 이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으음. 뭔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알았어. 난 어차피 네 검이 되기로 맹세한 몸. 신교를 떠나서 새로운 기틀을 세우고자 한다면 그것도 좋아. 언제나 너와 함께할 테니까."
"언제나?"
"……윽. 그래, 언제나!"
"하하. 바라 마지않는 일이야."
괜히 발끈하는 은소소의 모습에 명한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든……
적어도 변치 않을 내 편은 있다.
그거면 충분했다.
#
그르르르릉.
거친 마찰음을 내며 통로가 열렸다.
과거, 이용한 적 있는 지하미로의 입구였다.
당시에는 가진바 재주가 워낙 적어서 제대로 탐색하지 못하고, 쌍각사만 겨우 건져 왔었다.
"하. 소궁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었단 말이야?"
"개미굴처럼 엮인 곳이라 실력이 있어도 쓰기 쉬운 곳은 아니지. 윗선에서도 반쯤은 내버려 두고 있을 거야."
"넌 괜찮고?"
"언제나처럼."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대전이 열리기 전까지 무공을 갈고 닦기에는 최고의 장소.
일이 바빠 빠진 귀의를 제외하고는 모두를 데려왔다.
"쉬이익―!"
가장 격하게 반응한 건 아무래도 쌍각사.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이 있었다.
냅다 달려가서 자신의 구역부터 찾았다.
쉬익? 쉬익!
이내, 쌍각사를 닮은 작은 뱀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예전에 먹인 약이 잘 통한 건지 다들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향아와 은소소는 조금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찌 됐든 행복한 가족 해후였다.
"크릉. 크릉."
"쉬이익."
"크응!"
그리고 그 모습을 어딘가 흐뭇하게 보던 성성이.
짐승만의 언어로 무언가를 나누더니, 명한의 소매를 쿡쿡 당겼다.
멀지 않은 장소에 찾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의미였다.
"영물이라고 느낌이 오는가 보네."
"뭔데? 이 아래에 뭐가 있는 거야?"
"지하미로에는 숱한 영물이 구획을 나눠서 살고 있지. 성성이와 비슷한 놈들도 제법 있어. 아마 그 기운을 느낀 걸 거야."
"원숭이가 이런 지하에?"
"여긴 단순한 지하가 아니거든."
명한이 작은 돌멩이 하나를 쥐고 통로 저편으로 던졌다.
바닥에 닿아 ‘탁’ 소리를 내야 할 돌멩이가 어둠 속에서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뭐야, 그거?"
"자연적인 진법. 천산의 영기와 수많은 기운이 엮이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진을 구축하고 있어. 그 탓에 길을 잃으면 평생 동안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가 되기도 해."
"파훼법은?"
"일반적인 궤를 읽는 방식으로는 어려워. 향아의 눈이나 내 반야. 아니면 네 혼원일기 정도는 돼야 그나마 가능하지."
"진짜 무시무시한 곳이네."
쌍각사 수준의 영물이 득실거리는 곳이 지하미로다.
인세의 마굴이 있다면 바로 이곳을 일컫는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단련에 좋은 곳도 없지. 대전 시작 전까지 무공을 가다듬을 거야. 힘들겠다 싶으면 미리 말해."
"전 도련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어요."
"흥. 안 그래도 검에 묻힐 피가 필요했다고."
"좋은 각오."
명한이 허리춤에서 타구봉을 뽑아 들었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경험치뿐이었다.
#
"왼쪽에서!"
다급한 외침에 명한이 왼손을 뻗었다.
회백색의 구체 하나가 손아귀에서 뭉개져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군가 뱉은 토사물이었다.
"으윽."
"젠장. 별 이상한 놈이 다 있네."
잇소리를 내며 명한이 타구봉을 휘둘렀다.
압력에 물컹거리던 점액질이 통째로 뭉개졌다.
바닥으로 퍼지는 냄새가 매우 고약했다.
"이것도 영물이야!?"
"이건 영물이라기보다는 마물이지. 천산의 영기와 여러 독기가 뒤섞인 놈들이야."
"차라리 홍련이 더 그리울 판이네."
은소소는 아예 코를 손으로 막았다.
지하 미로 일정 영역부터 등장한 이 개구리를 닮은 괴생명체에 후각이 다 마비될 판이었다.
수라도 적으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쉴 틈 없이 몰려나왔다.
"으악. 도련님, 더 몰려와요."
점입가경이라.
향아의 손끝 방향에서 괴생명체가 다수로 몰려왔다.
하나하나는 그리 대수로울 것 없는 놈들이지만,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무래도 이 주변에 이놈들 우두머리가 사는 모양이다."
"차라리 두목 놈을 잡으라고 해. 이렇게 싸우다가는 코가 남아나질 않겠어."
"어쩔 수 없네. 이건 내가 처리할 테니 물러나 있어."
명한이 나머지 둘을 뒤로 물리고 양손을 합장했다.
약황비전과 만독비전의 기운이 동시에 밀려와 칠색의 구체로 맺혔다.
오독문의 비전, 칠채향이었다.
‘놈들의 기운을 고려하면……’
명한의 의지대로 칠채향에 섞여드는 독성들.
먹고 마신 독과 약의 모든 성분을 자유자재로 배합하여 쓸 수 있는 것이 칠채향의 강점이었다.
사람이나 생물에 따라 각자 내성과 반응이 다른 법.
칠채향은 이를 향과 냄새로 파악하여 가장 적합한 배합을 찾을 수 있었다.
"사용하는 독의 향과 색도 자유자재."
무색무취의 바람이 명한의 앞으로 불었다.
그와 다른 생명에는 크게 해가 없지만, 개구리를 닮은 생명체에는 치명적인 바람이었다.
선두에 선 놈부터 하나씩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칠공에서 피를 쏟고 거품을 물었다.
어찌 보면 잔혹한 장면이었다.
"……그게 칠채향?"
"응. 수련은 하고 있지만 쓰기 무서울 정도네. 아직 삼성에 불과한데."
"후우. 괜히 오독문이 아닌 거네. 절대 고수에게도 통할 거 같아?"
"내성에 따라 다르겠지. 충분히 파악하고 재료가 준비되어 있다면 마비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간단하게 말했지만, 이건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무림에서 화경 이상 고수에게 독은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
독곡이나 당문 같은 독가에서도 내가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암기나 다른 무기술을 배우는 걸 기본으로 한다.
명한이 말한 칠채향의 평가는 이 상식을 뒤집을 만한 것이었다.
"하아."
"갑자기 왜 한숨이야? 독이 너무 잔인해 보여?"
"아니. 이 칠채향의 가장 큰 단점이 생각나서."
"단점? 뭔데?"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명한.
혹시 부작용이라도 있는 걸까 싶어, 은소소가 다급하게 물었다.
"새로운 독이나 약이 있으면 반드시 섭취해야 하거든. 그래야 칠채향의 경지가 깊어지고 다양한 배합이 가능해져."
"섭……취?"
"응."
살짝 머뭇거리는 질문에 죽은 생명체의 시체를 가리키는 명한.
고약한 냄새 가득한 시체 더미, 그 안 어딘가의 부위였다.
은소소가 막강한 칠채향의 위력을 뒤로한 채 고개를 흔들었다.
"우욱."
이걸 견디며 독을 키운다는 건 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