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235)

이름을 알리다

향아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차례를 기다렸다.

내각에서 각 소궁 물자를 분출하는 날.

몇 번이나 해 왔던 일이니 딱히 어려울 건 없지만, 오늘은 뒷사정이 있었다.

‘도련님께서 오늘이 적기라고 하셨어.’

명한을 견제하기 위한 군소 세력의 작당질이 벌어질 날.

괜히 실수해서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향아는 좀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은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다음. 소백 도련님의 궁에서 온 건가?"

그렇게 기다리기를 얼마.

향아의 차례가 왔다.

내각 2급 각원이 커다란 성자와 보따리를 수레에 담아서 내밀었다.

"그동안 소궁 관리를 안 했을 테니, 추가로 물품을 담았다. 부족하면 따로 요청서를 올려."

"네, 네. 감사합니다."

양식에 적힌 양보다 훨씬 많은 분량이었다.

추가 물품에 어떤 것이 있을까.

향아가 상자를 열어 안을 확인하려 했다.

"내각 앞에서 부산스럽게 굴지 말고 돌아가서 확인해라."

"안에만 좀 보고 가면 안 될까요?"

"일 바쁜 거 안 보여?"

"……"

바쁘다기에는 향아가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텅 빈 줄을 한 번 보고, 내각 각원을 다시 바라봤다.

그는 살짝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뒤에 사람이 더 올 거야! 가라는 소리 못 들었어!?"

"물품 분출 순서는 궁의 순번에 따라서 정해지지 않나요? 소백 도련님 궁이 가장 마지막으로 알고 있는데……"

"이익. 몸종 주제에 지금 내각 행사에 의문을 품는다는 거냐?"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수레나 끌고 썩 꺼져. 여긴 너 같은 계집이 까불어도 좋을 곳이 아니야."

"……"

향아가 입술을 꾹 깨물며 각원을 봤다.

예전 같았으면 내각 각원의 으름장에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것이 당연한 일.

신분도 그렇거니와 궁의 위치를 고려해도 당연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도련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셨어.’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단순한 몸종이 아닌 호위이자 대변하는 얼굴이라 했다.

"전 물품 확인을 끝내기 전까지는 갈 수 없어요."

"뭐?"

"양식보다 훨씬 많은 물품이 섞여 있잖아요. 뭐가 어떻게 들어왔을지도 모르는데, 이걸 그냥 도련님께 드릴 수는 없어요. 확인하고 이상이 없으면 그때 물러날게요."

"하. 이 계집이 정신 줄을 놨구나?"

발끈한 각원이 손을 뻗어 향아의 어깨를 잡았다.

내각의 행정업무를 하는 인물이지만 못해도 2류 고수급의 무공은 지녔다.

몸종 따위는 한 손으로 제압할 거라 자신했다.

"어? 뭐야?"

하지만 향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공을 끌어 올려 전력을 써도 뿌리라도 박힌 듯 미동도 없었다.

각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각이 우습게 보여!?"

"그럴 리가요. 저도 내각 출신으로 소궁에 배정된 입장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도련님을 모시는 입장이니 작은 것도 소홀히 할 수는 없어요."

"네가 이러는 게 네 주인에게 도움이 될 거 같아!?"

"도련님은 절대로 굽히지 말라고 하셨어요. 궁의 숫자가 말석이라고 남 눈치 보는 건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전 반드시 짐을 확인하고 가야겠어요."

"제정신이 아닌 계집이구나!"

각원이 제압이 아닌 타격용으로 무공을 꺼내 들었다.

쇳소리와 함께 주먹이 향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실린 힘이 적지 않았다.

"어억!"

하지만 쓰러진 건 되레 각원이었다.

향아의 명월심법은 이미 깊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타격을 흘려서 되돌려주는 것 정도는 우스웠다.

각원은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네, 네년이 주인을 믿고 아주 건방지게 나서는구나!"

"주먹을 휘두른 건 제가 아니에요."

"오냐, 오냐. 네년의 그 건방짐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한번 보자!"

이번에는 아예 작정하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웅크린 손가락은 전문적으로 단련한 용조수의 일종이었다.

무기를 쓰지 않는 이상, 가장 파괴적이고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윙. 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각원의 손가락이 향아의 가슴팍을 노렸다.

"어, 어엇―!?"

향아는 물러나지도 크게 공력을 쓰지도 않았다.

항룡이십팔장의 한 수를 응용.

응조수를 엇갈려서 맞은 뒤, 그 힘을 틀어서 각원을 무너뜨렸다.

그는 자신이 왜 넘어졌는지도 이해를 못 했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기예였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더 강해요."

"모, 몸종 따위가 나보다 강하다고?"

"몸종이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도련님을 모시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몇 번이건 싸워서 당신을 쓰러뜨릴 수 있어요."

"……"

그제야 각원은 눈앞의 작은 소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깨달았다.

몇몇 상위 소궁에서는 비밀 호위를 겸해서 고수를 몸종으로 부리기는 하지만, 소백은 고작 사십팔궁이다.

가장 말석이며 망나니라는 이명을 가진 소궁의 몸종.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사절로 천마궁을 떠난 소백이 사실을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소문.

"그럼 이제 짐을 확인해 봐도 되겠죠?"

말문이 막힌 각원을 무시하고 향아가 수레로 손을 뻗었다.

"네년의 방자함이 그 주인보다 더하구나."

하지만 이번에도 확인은 하지 못했다.

우르르 몰려온 무리, 그리고 그 선두에서 날카롭게 말하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소백을 노리던 융광과 그 무리였다.

"……도련님 말씀이 맞았네."

"뭐?"

"날 파리가 꼬이겠지만, 그래 봐야 날 파리일 뿐이다. 손으로 쳐서 잡아라."

그때는 단순히 비유인가 싶었는데, 눈으로 보니 아니다.

신분이 높든 수가 많든 이제 그런 건 크게 대수롭지 않았다.

이들은 무당의 검귀도 아니고, 곤륜의 미친 도사도 아니며, 독곡의 마녀 역시 아니다.

그저 욍욍거리며 날아다니는 날 파리.

"누가 감히 소백 도련님의 일을 방해하는 겁니까?"

향아의 목소리가 낭랑했다.

#

명한이 읽은 것은 다른 사람도 읽었다는 말이 된다.

사절로 떠났던 사십팔궁의 소궁주.

그의 귀환과 함께 천마대전을 앞둔 사전작업이 시작되리라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미 몇몇 궁에서 사람을 보내 동향을 읽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광검."

그건 은소소도 마찬가지.

소궁을 수습하고 내각 활동에 맞춰서 동향을 살피러 나와 있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광검에 시선이 모였다.

"뭐야, 넌? 날 아냐?"

"하, 하하……이십일궁의 백혜선이다. 설마 날 잊었다고 말할 건 아니겠지?"

"백혜선? 기억에 없는 이름인데."

"……너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오만방자하네."

백혜선은 이를 갈았지만, 은소소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애초에 궁 내 다툼이나 인맥 따위에는 관심이 없던 그녀.

소림사로 가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 성정은 변한 바 없다.

"흥. 됐어. 어차피 망망대해 위의 조각배 하나가 대세를 좌우할 수는 없지. 넌 계속 그렇게 혈혈단신으로 움직이라고."

"갑자기 찾아와서는 혼자서 뭐라고 떠드는 거냐? 향아가 싸울 거 같으니까 조용히 해 봐."

"뭐? 저건 고작 몸종이잖아. 이 몸과의 대화보다 고작 몸종의 싸움이 더 중요하다는 거냐?"

"그러니까 그쪽이 누군지 모르겠으니, 귀찮게 굴지 말고 가.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향아가 전력을 다하는 걸 보기 힘들다고."

은소소는 아예 등을 지고 내각 앞이 내려다보이는 지붕 위로 올라갔다.

얼떨결에 버려진 백혜선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런 굴욕은 참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엥? 뭐야, 저건 또 누구람?"

하지만 그 분을 분출하기도 전.

새롭게 한 무리가 내각 앞으로 난입했다.

일부는 백혜선의 눈에도 익은 자들이었다.

"융광?"

특히, 어딘가 궁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는 익히 알았다.

군소 궁들의 연합을 제안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 맞아 결별하기는 했으나, 제법 셈에는 빠른 인물이라고 각인되어 있었다.

‘오호라. 이 일 배후에 융광이 있었구나.’

이 정도 정황이면 뒷이야기를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다.

백혜선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은소소가 올라선 지붕으로 따라가 말을 붙였다.

"이봐, 광검. 넌 저기 향아라는 몸종과 친분이 있는 사이지?"

"또 귀찮게 말 거네. 맞아. 근데 왜?"

"보아하니 뭔가 일이 터질 거 같은데……가만히 지켜보기보다는 내기를 하는 게 어때?"

"내기?"

"응. 저 몸종과 새로 나타난 무리. 어느 쪽이 이기는지. 서로 가진 걸 걸고 내기해 보자고."

은소소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백혜선의 속셈이 뭔지는 안 봐도 훤했다.

아무리 정치와 계략에 관심 없는 은소소라도 너무 얕은 수였다.

"뭐, 좋아. 난 향아가 이기는 쪽에 걸지. 넌 반대?"

"후후, 그렇게 하지. 내기 상품은 무엇으로 할까? 조만간 있을 천마대전에서 협력을 보장하는 건 어때?"

"흐응. 뭐, 좋아. 만약 네가 이긴다면 내 검을 얼마든지 빌려주도록 할게."

"하하. 잘 선택했어."

"다만, 네 조건은 좀 바꾸자. 네 도움은 딱히 필요 없거든."

"……그래. 넌 뭘 원하는데?"

"음. 아. 남자에게 줄 만한 선물……적당한 게 있을까?"

"남자에게 줄 선물?"

백혜선의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광검 은소소가 검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

‘설마 소백에게?’

모종의 이유로 사절로 함께 떠났던 사십 팔궁의 망나니.

‘에이 그건 아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내게 빼어난 미동들이 많아. 그들에게서 원하는 걸 물어서 네가 찾아다가 주지. 그럼 어때?"

"오. 그건 나쁘지 않겠네. 좋아, 좋아. 그럼 누가 이기는지 지켜나 보자고."

"……그래."

설마.

백혜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옮겼다.

막, 융광과 향아가 주먹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

융광의 사고는 간단했다.

향아는 어차피 몸종.

억지든 뭐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그걸 주인에게 물으면 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면 모르겠지만, 사십 팔궁은 천마궁 내에서도 연줄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

다소 무리해서 움직여도 문제는 없었다.

"이, 이 계집이!?"

첫 단추를 끼울 수 있다면.

"저 수레에 든 물건은 내각에서 방금 받은 것들입니다. 억지는 그만 쓰세요."

"감히 몸종 따위가 이 몸의 행사를 막아!?"

수레를 수색하겠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행동부터 덜컥 막혔다.

우격다짐이든 뭐든 구색부터 갖추려 했는데, 몸종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몇 사람이나 덤벼들었음에도 전부 고꾸라졌다.

"내각 각원은 분출 물자 확인을 막더니, 이젠 다른 궁의 분께서 도난 물품을 찾겠다며 억지를 부리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인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까요."

"이이익!! 비키지 않으면 크게 경을 칠 줄 알아라!"

"안 비킵니다. 제가 가진 목록과 내각의 분출 물자의 확인이 먼저예요. 엄한 물건 가지고 도난이다 뭐다 할 거면 저도 가만히 있을 거예요."

"가만히 안 있으면!? 감히 네깟 계집이 이 몸과 다투기라도 할 셈이냐!?"

"도련님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해야 한다면 기꺼이."

향아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을 머금었다.

올곧게 뻗은 자세는 태풍 속에 선 소나무.

쉬이 범접하기 힘든 기세를 풍겼다.

‘이, 이 계집이!? 정말로 몸종이 맞는 거냐?’

융광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하하하. 사내가 그따위로 겁먹은 개새끼 시늉을 할 거면 아래 두 쪽이나 떼어 버려라!"

"……!"

그때 들려온 목소리는 지붕 위에서 보던 은소소의 것.

지지부진한 대치에 냅다 돌을 던진 격이었다.

융광은 그래도 소궁의 후견인 입장.

고작 몸종에 쫄아서 수그리면 천마궁에서 얼굴을 들고는 못 산다.

이를 악물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이 계집! 이 어르신께서 궁의 지엄한 법도를 알려주마!!"

노호성을 터뜨리며 달려드는 융광.

그리고 그것이……

"어, 어어 날아간다!?"

융광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