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아 출두
명한이 천을 걷고 창밖을 바라봤다.
천산 중턱에 지상과 선계를 잇듯 웅장하게 자리 잡은 문이 보였다.
소림사로 떠난 지 거의 1년.
감회가 새로웠다.
"도련님, 돌아오셨군요."
문 옆으로 슥 나타나며 일행을 반긴 건 귀의.
예상 못 한 환영 인사에 명한이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오랜만이다, 귀의. 우리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나?"
"서신을 받았습니다. 그날부터 매일같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습죠."
"우리가 그렇게 애달픈 사이였나?"
"제게는 천 번의 밤낮이라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귀의가, 도련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귀의는 오체투지의 예의를 보였다.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이었다.
"서신을 통해서 백약문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위 장문인……아니, 이제는 위 장로가 되신 분께서 제 복문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귀의, 평생에 걸쳐 단 하나 있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하찮은 목숨 다하는 날까지 도련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위 장로가 한발 빠르게 일을 처리했군. 조만간 정식으로 네 명패와 신분에 대한 서신도 날아올 거다. 계속, 믿고 써도 되는 거겠지?"
"지당하신 말씀. 저, 귀의. 견마지로의 자세로 도련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래.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귀의."
"네, 도련님."
귀의의 신분은 천마궁 내에서도 꽤 영향력 있는 위치.
그를 완전한 심복으로 얻었다는 건 상당한 이점이었다.
명한이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어깨를 다독였다.
"아, 그러고 보니 약황비전 후반부를 찾는다고 했지?"
그리고는 슬쩍 약황비전의 사본을 품 안으로 쑤셔 넣었다.
이미 약황비전과 만독비전을 동시에 익힌 명한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귀의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익혀. 앞으로 쓸 일이 많을 테니까. 그리고 독공이 필요하면 얘기해. 만독비전도 있으니까."
"허, 허어어……"
"그럼 들어가서 밀린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이 복마전의 상황도 궁금하니까."
툭툭, 가볍게 두드리며 걸음을 옮기는 명한.
귀의는 그 모습을 눈으로 좇다, 무언가를 깨달았다.
‘1년이라는 시간. 이렇게나 길었구나.’
눈앞의 있는 인물은 1년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몇 가지로 추려 두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
명한이 신교로 귀환했다는 소식은 이내 퍼졌다.
한때 실종됐다고 알려진 사절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임무 완수.
소림사 쪽에서도 무연의 일을 덮으며 제안을 수긍하여 탈 없이 진행되었다.
결론적으로는 성공적인 귀환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소백 도련님."
내각에서 윤 총관이 직접 명한을 찾아왔다.
사절로 보낸 책임자이니, 이에 대한 보상도 그의 몫이었다.
비단과 금은보화로 가득 찬 상자 여럿을 마차째로 끌고 왔다.
"이거 윤 총관이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보낼 때처럼 내각 고수 하나면 되는 거 아닌가?"
"하, 하하. 어찌 소백 도련님이 복귀하셨는데, 성의 없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간의 노고를 위로할 겸 직접 왔습니다."
"뭐, 사양은 안 하겠네."
마차는 명한의 소궁으로 차례대로 들어갔다.
문전성시라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그리고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호오. 청환단이로군. 아무렇게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과거의 문제는 덮어두고 앞으로 친분을 쌓자는 의미로 이렇게 준비해 봤습니다."
"윤 총관은 나름의 길이 있지 않았나?"
"하. 하하. 그게 뭐 길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혈염마녀가 죽었다는 소식도 천마궁에 닿았다.
완벽한 내막이 드러난 건 아니더라도, 죽음 자체는 사실이었다.
궁곡에 이어서 혈염마녀까지.
그쪽 노선을 타던 이들은 똥줄이 탈 수밖에 없었다.
갈아타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뭐, 선물은 선물이니 잘 받겠네."
"그럼 저와 도련님도 이제……"
"그건 좀 지켜볼 일이지. 세상일이 그렇게 손바닥처럼 쉬이 뒤집히겠나. 앞으로 하는 걸 보고 판단하겠네."
"끄응. 알겠습니다, 도련님."
청환단 하나만 날린 격이지만, 윤 총관은 방법이 없었다.
혈염마녀 노선을 타며 여러 세력과 척을 져 둔 상황이라 기댈 곳이 적었다.
그래도 명한은 세가 약하니, 잘 비벼보면 되지 않을까.
궁하니 나온 수였을 뿐이다.
"저 간사한 인간을 믿을 셈이야?"
그렇게 윤 총관이 물러나고 난 뒤, 은소소가 은근히 물었다.
"미쳤어? 저런 인간은 틈만 나면 배신할 상이야. 받아먹을 건 다 받아먹고 버려야지."
"잘 생각했어. 천마궁 안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지만, 내각 인간들은 특히 더 그래.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사람을 가장 조심하라고."
"내가 믿는 건 이 방에 있는 사람으로 충분해."
"……나도?"
"당연하지. 내가 너 아니면 또 누굴 믿겠어?"
은소소가 고개를 휙 돌렸다.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그때, 낙반 이후로 자꾸 이래.’
쿵쿵 뛰는 심장만큼이나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나, 나는 내 궁을 관리하러 가볼게. 그동안 방치되어 있던 터라, 엉망일 거야."
"가고 나면 다섯 번째 궁의 주인, 은소소가 되는 건가?"
"……됐어. 궁의 순위 같은 건."
전에는 조금 집착했던 것이나, 이젠 대수롭지 않다.
지금은 더 신경 쓰이는 문제가 있으니까.
열이 나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총총 걸어 물러났다.
"……"
그리고 그 모습을 명한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꽤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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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소!"
명한이 천마궁으로 돌아온 지 이틀.
천마궁의 한편에서는 한시도 쉬지 않고 격론이 이어졌다.
"그자가 혈염과 궁곡을 해쳤다는 걸 모두가 알지 않소! 이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 말이나 된다고 보시오!?"
그 중심에는 융광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혈염마녀의 노선을 타던 ‘28궁’의 후견인이었다.
대전이 열리면 어차피 승산이 없는 건 매한가지.
생존을 위한 나름의 자구책이 필요했다.
"끄응. 융 형. 말은 이해하나, 사절로 궁을 떠났던 사람이외다.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가 어떻게 할 방법은 없지 않소."
"사절이라도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소이다. 어찌 궁의 사람이라는 자가 대모를 해치고 형제를 죽일 수 있소!?"
"융 형……"
"우리라도 힘을 모아서 그자를 처단해야 하오!"
택한 건 힘없는 소궁들을 모아서 명한을 제물로 삼는 것.
이미 궁내의 수많은 눈이 명한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
그를 찍어누를 수 있다면, 소궁들의 모임이 나름의 힘을 지녔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다.
적당한 거래의 패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대전이 시작도 안 했소이다. 이럴 때 함부로 힘을 쓰다가는 내각…… 아니, 집행부에 끌려갈 우려가 있소."
"그러니 머리를 써야 하지 않겠소. 내가 전해 들은 정보에 의하면 그자가 몸종 하나를 매우 어여삐 여긴다고 하던데. 그 계집을 빌미로 삼는 것은 어떻소?"
"빌미? 뭘 어쩐다는 말이오?"
"내각에서 각 궁에 물품을 건넬 것이오. 수행원이 많으면 모르겠으나, 소백 그자의 궁에서는 몸종밖에 움직일 사람이 없을 터. 이때, 배정받은 물건이 아닌 다른 것이 섞여 들어가면 어떻다고 보오?"
"죄를 뒤집어씌우자?"
"소문대로 소백 그자가 몸종을 지극히 아낀다면 구하려 나설 터. 우리는 이때를 기다렸다가 소명결투로 이끌면 되오."
소명결투라는 말에 주변 시선이 달라졌다.
소명결투는 지금에 와서는 거의 사장된 방식이나, 과거 신교가 성장할 무렵에는 힘으로 정당함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인정됐었다.
이를 받아들이면 내규와 상관없이 생사투를 벌일 수 있다.
"으음. 허나, 소문에 의하면 소백 그자의 경지가 만만치 않소. 궁곡은 둘째 치더라도 혈염마녀의 경지는 다들 알지 않소. 쉽게 볼 상대가 아니외다."
"흥. 궁곡은 어리고 재주가 없었소. 그리고 혈염은 자식이 죽어 제정신이 아닌데, 제대로 싸움이나 됐겠소이까? 기회를 틈타 득을 노리는 놈에게 빼어난 무공이 있을 리 없소. 게다가 다들 알다시피 그자의 별호가 무엇이오?"
"천마궁의 망나니."
명한에 대한 건 떠다니는 소문뿐.
명확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를 망나니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나만 믿고 계시오. 우리도 이 복마전에서 살길은 찾아야 하니."
"끄응. 그럼 우린 융 형만 믿고 있겠소이다."
"하하. 이렇게 의기투합하니, 이미 일은 다 성사된 거나 다름없소."
융광도 그중 하나.
일의 성패는 걱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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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거다."
명한이 비스듬히 누워 융광이 했던 말과 거의 비슷한 상황을 언급했다.
너무 뻔해서 굳이 복잡한 사고까지도 필요 없는 가정이었다.
"전 고작 몸종인데, 진짜 노릴까요?"
"몸종이니까 더 쉽게 노리는 거야. 은소소나 귀의를 건드릴 건 아니잖아."
"우우. 괜히 도련님께 짐만 되는 기분이에요."
"자식이 어디서 앓는 소리야."
"아코."
징징거리는 향아의 콧잔등을 세게 쳤다.
"내가 왜 다른 이들은 다 밖에 두면서 너는 데리고 들어왔는지 모르겠냐?"
"그, 글쎄요?"
"가장 처음부터 등을 맡겼던 것이 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믿고 던질 수 있는 것도 너밖에는 없지."
"도련님……어? 근데, 그거 무슨 미끼한테 하는 말 같지 않나요?"
"미끼가 맞으니까."
명한이 어딘가 악동같이 웃었다.
"천마대전까지 앞으로 한 달. 나도 나 나름대로 무공을 수습하고 앞일을 대비해야 해. 자바리 놈들하고 드잡이질할 여유가 없다 이거야. 그런 것들은 네가 좀 한 번에 싹 모아서 처리해 줘야겠어."
"제가 무슨 수로요?"
"무슨 수긴. 배운 무공으로 하는 거지."
명한과 은소소는 자신에 대한 객관화가 돼 있지만, 향아는 다르다.
대부분의 싸움도 도망이나 유인 정도가 전부.
전력으로 맞서 싸운 경험도 그에 대한 판단도 부족하다.
아직도 몸종이라는 단어에 갇혀있다.
"넌 단순한 몸종이 아니야. 내 측근 호위이자, 경호 담당이기도 해. 삼신승에게 배운 요령을 더해서 전력으로 싸운다면 천마궁 내에서도 널 꺾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제, 제가 감히 그럴 수 있을까요?"
"날 믿어. 네 재능은 내가 보장하는 거니까."
단순 재능으로는 습작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것이 향아.
몸에 밴 습성만 떨쳐내도 지금보다 뛰어난 조력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도련님?"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가볍게 펴는 명한.
손바닥 위에 엄지손가락만 한 단약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은은한 향은 어딘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그런 종류였다.
"영단이다."
부족한 향아의 내공을 채워줄 물건.
그리고 화경 초입의 경지를 한 단계 올려줄 기물이기도 하다.
누가 감히 예상이나 하겠는가.
"쓰진 않죠?"
화경의 고수가 몸종으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