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235)

환궁

백약문을 휘하로 받아들이고 며칠 뒤.

쉬엔의 어머니를 보호 중인 상단이 인근에 도착했다.

서역과 중원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이들이었다.

"약을 발견했다고!?"

"네, 숙부님. 드디어 어머니를 치료할 수 있게 됐어요!"

이들의 수장은, 타르.

중원과 서역인의 혼혈로 혈주갈의 사변 이후로, 쭉 쉬엔과 모친을 보호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따르는 이도 많고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오, 하늘이 무정하지만은 않구나."

"그게 다가 아니에요."

"다가 아니라고?"

"네. 여기……누구인지 알겠어요?"

묘아를 소개하는 쉬엔.

어딘가 닮은 듯 보이는 그 외모에 타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무언가 깨달은 듯 저도 모르게 한 걸음 크게 다가갔다.

"서, 설마 아르닌!?"

묘아가 신투에게 거둬지기 전, 어릴 때 이름이 아르닌이다.

"맞아요, 숙부님. 그날, 그 사고에서 아르닌은 죽지 않았어요. 중원에서 신투라 불리는 인물에게 거둬져서 지금껏 살아왔데요."

"오, 오오. 이럴 수가. 하늘이 우리 집안을 버리지 않았구나. 아르닌이 살아 있었다니."

"바, 반가워. 지금은 묘아라고 불리거든?"

"묘아. 묘아. 좋은 이름이구나."

어색한 묘아의 반응에도 타르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혈주갈의 사변에서 상단을 지키지 못했다는 건 그로서도 평생에 남은 상처.

이렇게 죽은 줄 알았던 조카가 살아 돌아왔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해후의 기쁨은 치료가 끝난 뒤로 미루죠."

"아, 그쪽은……"

"숙부님 여기가 소백 공자님. 우릴 도와서 약을 구해주신 분이에요. 이분 아니었으면 저도 묘아도 전부 죽었을지 몰라요."

"아아. 은인이셨구려."

넙죽 허리를 숙여 포권하는 타르.

명한이 황급히 소매를 잡아 부축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묘아와 제가 남도 아니니, 돕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운이 좋아 일이 잘 풀렸으니, 너무 그리 과례할 필요는 없습니다."

"허허. 아르닌……아니, 묘아와는 언제부터 아는 사이셨습니까?"

"숙부님, 저 소백 공자님은 묘아가 결혼할 남자라고 했어요."

"겨, 결혼?"

쑥 들어온 쉬엔의 말에 타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냥 하는 말입니다. 묘아가 신투의 아래에서만 자라다 보니, 아직은 세간의 상식에 좀 어두울 따름이죠."

"아닌데? 난 소백하고 혼례를 치를 건데."

"저, 저……?"

"농담입니다, 농담."

"아니라니까!"

발끈해서 우기는 묘아와 웃으며 거부하는 소백.

두 사람을 오가며 타르의 표정이 계속해서 바뀌었다.

"혹시 소 공자께서는 신분이 어찌 되시는지……?"

그리고 아직 묻지 않은, 가장 중요한 대목을 물었다.

"아직은 어리고 미천한지라 그리 내세울 것은 없습니다."

"뭐래. 신교의 소궁주이며 흑점의 태사이자 백약문의 문주이기도 하잖아. 이게 어딜 봐서 내세울 게 없는 신분이야."

"……어?"

"진짜라고. 여기 소백은 천마의 아들이야. 동시에 흑점의 주인이기도 하고 백약문을 휘하에 두기도 했어.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남자라고."

괜히 묘아가 발끈해서는 전부 털어놓았다.

은소소와 향아는 이게 문제가 될까 싶어 막으려 했으나, 명한이 손짓으로 만류했다.

이건 굳이 막을 필요가 없는, 그리고 의도한 대화였다.

"허허. 신교에 수많은 용과 봉황이 산다는 말은 들었지만……이리 뛰어나신 분이 잠룡으로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복마전에서 살아남으려면 모습을 감추는 것이 최선이었죠."

"그럼 혹시, 혼례는 아직……?"

"아. 미혼이긴 합니다만."

"허허허허. 그렇군요. 그래요. 그럼 뭐, 우리 묘아가 말하는 것처럼 혼례 운운하는 것도 영 없는 일도 아니라는 거네요."

살짝 장사꾼의 얼굴이 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지만, 혼례 운운하는 대상과의 견적을 안 볼 수는 없다.

그건 상인으로서의 본능.

신교의 소궁주이자 흑점의 태사.

그리고 백약문의 문주.

이 절반만 진실이라고 해도 혼례 대상으로는 차고 넘친다.

"말했다시피 아직 어리고 부족함이 많은 몸입니다. 천마궁 안에서 살아남기에도 급급할 뿐이죠. 혼례는 아직 먼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지금껏 쌓아온 것만 해도 이미 한발 앞선 것 아닐까요?"

"어디 천마궁이 그리 호락호락하겠습니까. 수많은 괴물이 사는 곳이 천마궁입니다. 다양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다면 제 목숨 하나 건사하기 쉽지 않겠죠."

"호오."

타르의 눈이 반짝였다.

오랫동안 상인으로 살아온 만큼 눈치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빨랐다.

지금 명한의 말은 일종의 제안이었다.

"이거, 소 공자님과는 따로 긴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군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약은 위 장로를 통해서 전달할 터이니, 잠시 차라도 나누시죠."

"허허허. 쉬엔, 묘아. 둘은 들어가 누이를 살피고 있으렴. 이 숙부는 잠시 차 한 잔 마시고 올 테니까."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을 가르며 명한과 타르가 함께 움직였다.

대부분은 모르지만, 명한은 알고 있는 사실.

쉬엔과 함께 움직인 상단은 천하 4대 상단에 근접하는 세외 상단.

지리상, 사업상 천하상단을 찍어 누르기에 가장 적합한 세력이었다.

가능한 우군을 늘리는 것.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쉬엔의 어머니는 병을 털고 일어났다.

홍련의 진액과 백약문의 경험이 합쳐지니 지병도 거뜬했다.

기쁨의 눈물과 환호가 섞여서 그 날은 축제처럼 지나갔다.

"그럼, 소 공자만 믿고 있겠습니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이왕이면 조카사위가 더 좋을 텐데 말이죠."

"그건 시간이 답을 해줄 문제라고 봅니다."

타르와 명한의 협의도 긍정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타르의 상단은 중원으로 들어올 가교가 필요했고, 명한은 천하상단을 압박해줄 도우미가 필요했다.

서로의 이해가 맞으니 손을 잡는 건 당연한 결과.

몇 가지 추가 합의를 마치고 비밀리에 서류를 주고받았다.

"그럼 이제 신교로 돌아가는 겁니까?"

"외유가 길었지요. 사절이라는 핑계로 떠난 것이 벌써 1년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은 다 얻었으니, 복마전 한가운데로 뛰어들 시간인가 봅니다."

"후우. 신교라는 이름의 복마전이라. 쉽지 않겠군요."

"쉽지 않지요. 밖의 사람들은 모르는……신교의 괴물들과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 일이니까요. 차라리 중원 정벌이 더 쉬울 겁니다."

어딘가 농담처럼 말하지만, 명한은 진심이었다.

작금의 신교는 과거 정마대전 시절보다 훨씬 강하다.

천마의 자식들만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전력을 포함하면 터지기 직전의 화산이다.

곧 있을 천마대전에서 그 힘이 폭발할 터.

휩쓸리면 누구라도 멀쩡하기 힘들다.

"이거 까딱하다가는 겨우 만난 조카가 애먼 눈물을 흘리게 생겼군요."

"쉽게 죽을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하하, 당연하지요. 그렇게 무른 사람 같았다면 계약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사실이니……저도 작정하고 투자를 해야겠죠."

타르가 품 안에서 작은 금함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왕가 진상품 중 하나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를 복용한 자는 천수를 누리고 만사에 행운이 찾아온다고 하더군요."

"전설이라."

명한이 금함을 건네받았다.

그 안에는 황금빛의 단약 하나가 담겨 있었다.

[이름 : 금환(金丸)]

[분류 : 영약]

[등급 : 외(外) 급]

[설명 : 과거 황제가 소유했다고 알려진 단약. 전설상의 도인을 통해 선계의 물건으로 빚었다고 한다. 다만, 성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딘가 기묘한 물건이었다.

단순히 내공 증진용 영약이면 웃으며 받았겠지만, 이건 미상의 물건.

‘황제가 소유했던 단약이라.’

기억을 더듬어도 설정으로 잡은 물건은 아니었다.

"척 봐도 귀한 물건 같군요. 중히 쓰겠습니다."

"필시 도움이 될 겁니다. 서역의 한 복술가가 말하기를 이 단약 안에는 천지간의 운명을 바꿀 힘이 서려 있다고 했거든요."

"천지간의 운명을 바꿀 힘."

허풍인지 진짜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분류 밖의 외 등급 물건이라면 언젠가는 쓰임새가 있을 터.

명한이 깊이 포권했다.

"우리 조카를 잘 부탁합니다."

은근한 눈빛은 슬며시 피하며.

#

명한이 주변 일을 정리하고 신교로 걸음을 옮길 즈음.

신교 내부에서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 실패했다는 건가."

"네, 대좌. 대기시켰던 흑풍의 아이들 셋도 모두 죽었습니다."

"아쉽게 됐군. 쓰기 좋은 패였는데. 말석의 아이가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모양이야."

커다란 옥좌에 걸터앉아 턱을 괸 한 남자.

그림자에 얼굴은 가려져 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절대 가볍지 않았다.

"환궁하기 전에 기습할까요?"

"아니, 그만두어라. 이상 수를 두었다가는 다른 이들까지 개입할 우려가 있어. 승냥이처럼 기회를 엿보는 놈들이 하나둘이 아니니."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해 둔 이들은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자의 답에 부복한 인물이 검은 천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화르륵, 순식간에 불이 올라가 재로 만들었다.

삼매진화의 경지였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천마대전이다. 혈염, 그녀가 죽은 건 아쉽지만 계속 매달릴 수는 없지. 우리의 패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준비를 해라."

"혈염마녀 쪽 잔당과의 관계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머리가 없으면 하등 쓸모없는 버러지들에 불과하다. 독곡마저 괴멸된 이상 미련 가질 필요는 없겠지. 버려라. 알아서 자멸하도록."

"네, 대좌."

남자의 판단은 굉장히 냉정했다.

한때 연인으로 누구보다 가까웠던 혈염마녀의 세력이지만, 가치가 떨어진 이상 가차 없이 버렸다.

수십, 수백의 생명 같은 건 그에게 큰 무게가 없었다.

"명심해라. 대전이 시작하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전부 셋. 그 외 나머지 것들에게는 굳이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다."

"큰 도련님의 적수가 될 놈들이군요."

"도귀 파운. 거칠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놈이지만, 그 스승과 닮은꼴이라고 재능은 확실하다. 대전에서도 놈의 도만큼은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천마궁 서열 2위.

남자는 파운을 꽤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다른 적수라면 혼재(混材), 적운. 어쩌면 천마궁의 모든 아이들 중 가장 천마와 닮은 걸지도 모르는 놈이다. 독특한 기질은 젊을 적의 천마를 쏙 빼닮았지. 세력은 상대적으로 약하고 드러난 힘도 부족하지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대좌."

"마지막으로 이놈."

툭. 남자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두드렸다.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일군(一君), 강유. 이 고약한 놈만큼은 나조차도 재단이 쉽지 않다. 어쩌면 이미 우리 팔반의 경지를 넘어섰을지도 모르지."

"서, 설마 대좌의 경지를 말입니까?"

"그만큼 보통내기가 아니다. 현시점에서 후계에 가장 가까운 건 아마도 그놈이겠지. 따르는 자도 무력도 단연코 빼어나니까. 하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마지막에 결착이 나는 법.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다."

콰득. 팔걸이가 대좌의 손에서 부서졌다.

바스러지는 파편에 부복한 인물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허면, 대좌. 이번에 귀궁하는 소 공자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음? 소백 말인가? 제법 재주는 있지만, 대전에서 신경 쓸 인재는 아니다. 자네가 누군가를 콕 짚어 묻는 건 처음이군. 신경이라도 쓰이는 건가?"

"아닙니다. 대좌께서 그리 평가하셨다면, 그것이 옳겠지요."

"왕이 될 인물은 왕의 상을 타고난다. 소백, 그 아이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미꾸라지에 불과하지. 흙탕물을 불러올 수는 있을지언정 왕이 되지는 못한다. 다른 잔챙이들을 견제하게끔 그대로 풀어둬라."

"네, 대좌."

두 번의 물음과 두 번의 답은 없었다.

천마대전까지는 앞으로 고작 한 달.

수많은 주사위가 이리 굴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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