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수
산사태를 직격으로 맞은 듯 보이는 산 중턱.
흑의를 둘러 입은 남자 둘이 그 주변을 관찰하고 있다.
은밀하게 가라앉은 기도는 보통 고수의 그것이 아니었다.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어."
"그래도 확인해야 한다."
둘은 무언가를 두고 대립하는 중이었다.
"저 아래는 쓰다 버린 무덤뿐이야. 살아서 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다."
"놈의 숨이 끊어진 걸 확인하는 것이 우리 역할이다. 어중간한 상태로 대좌(大座)께 보고할 셈인가?"
"무의미한 짓이야. 천하의 고수라 해도 저 아래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어."
"그러니까 그건……쉿."
확인에 대한 의견 대립.
하지만 결론이 나기도 전에 대화는 끊겼다.
근처로 접근하는 기척 때문이었다.
"뭐가 또 그렇게 불안한데? 그냥 살필 게 있다고 나간 거잖아."
"그래도 어쩐지 불안해요. 도련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싶어요."
"일은 무슨. 네 도련님이라는 사람, 보통 고수가 아니잖아."
투덜대며 걸어오는 건 쉬엔.
그리고 그 뒤로 향아와 묘아 등, 꽤 많은 숫자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백약문 재건 등으로 빠진 사람을 제외하면 죄다 끌고 온 모양새였다.
흑의 남자 둘은 시선을 맞춘 뒤,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아까 들린 굉음도 그렇고 어쩐지……앗! 저, 저길 봐요! 산이 무너졌어요!"
이내, 거리가 가까워지고 향아가 무너진 산 중턱을 발견했다.
묵직하게 밀린 토사에 걸음을 서둘렀다.
"뭐야, 이건. 산사태라도 났던 건가?"
"아니. 이건 누군가 임의로 지반을 붕괴시킨 거야."
혼란스러운 와중에 날카로운 말을 건넨 건 묘아.
그녀는 총총 걸어 토사를 손으로 훑으며 그 너머의 현장을 눈에 담았다.
일반적인 산사태와는 그 모양이 달랐다.
"……향아야, 이쪽으로 와 봐."
그리고 무언가 느껴졌다.
발만 동동 구르는 향아를 불러와 속삭였다.
처음에는 의아한 듯 듣던 향아는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퍼뜩 치켜들었다.
동공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주변을 꿰뚫었다.
"저기요!"
"나와라, 이것들아!"
냉큼 가리키는 손길에 묘아가 비도를 던졌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그림자였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간이었으나, 비도는 그 앞에서 막혔다.
공간이 일렁이고 흑의의 남자 둘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뭐, 뭐야 저 사람들은?"
"흥. 알 게 뭐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난장판과 관계되어 있다는 건 분명하겠지. 잡아서 물어보면 답이 나올 거다."
"……"
묘아의 선언에 흑의인 주변을 빠르게 포위했다.
그녀 말마따나 이 난장판에 대한 설명을 가진 건 그 둘 뿐이었다.
그리고 이 흐름에 흑의인 둘은 서로를 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소란은 최소화하는 것이 옳다."
"어차피 몸종과 허드렛일 하는 계집일 뿐. 정리하고 움직인다."
결론은 살인멸구.
흑의인 둘이 양쪽으로 교차해서 움직였다.
번개와 같은 움직임이라 이에 반응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있긴 있었다.
"누구보고 허드렛일이라고 하는 거야!?"
하나는 소요파의 능파미보를 익힌 묘아.
"당장 도련님이 있는 곳을 말해요!"
다른 하나는 월보를 익힌 향아였다.
두 사람은 번개와 같은 흑의인의 경공에 반응하여 그 방위를 틀어막았다.
처음으로 두 흑의인의 표정이 달라졌다.
고작 이 계집들 따위가, 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봐야 촌것들이다. 단번에 정리한다."
"흔적은 남기지 마라."
하지만 이내, 당황을 억제하며 공세로 돌아섰다.
흑의인들의 출신에서 ‘밖’의 어린 여자 둘 정도는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단검이 일곱 가래로 나뉘어 묘아와 향아를 각각 노렸다.
뒤를 따라온 무리들은 경고조차 내지 못할 만큼 기민한 수.
챙―!!
"막아?"
"이 계집들이?"
하지만 묘아와 향아는 이번에도 흑의인들의 수에 반응했다.
아니, 반응으로 끝나지 않았다.
묘아는 능파미보로 단검의 거리 안으로 진입.
공수탈백인의 수법으로 무기를 단번에 빼앗았다.
앗, 소리를 낼 틈도 없이 빈손이 된 흑의인의 가슴팍에는 전대 신투에게서 배운 장법을 쑤셔 넣었다.
쿵, 하는 울림과 함께 흑의인 하나가 벽에 처박혔다.
"칠(七)! 감히, 네 년들이!"
"도련님이 있는 곳이나 말해요!"
"닥쳐라, 계집! 네년의 낯가죽을 벗겨서……"
"말하라고 했지!"
향아는 한술 더 떴다.
단검을 막은 자세 그대로 장력으로 흑의인을 찍어 눌렀다.
삼신승을 만난 이후로 한층 깊어진 그녀의 명월심법은 흑의인을 찍어 누르기에, 충분했다.
당황으로 비틀거리는 흑의인의 가슴팍에는 항룡이십팔장의 무시무시한 장법을 박아 넣기도 했다.
낙엽처럼 핑그르르 돌아서 벽에 처박히는 모습은 일견 우습기까지 했다.
"……워. 향아, 너 은근히 무섭네."
"씨이. 씨이. 도련님을 어디에 가둔 거야!?"
아예 눈 돌아 한층 더 무거운 장력을 담기도 했다.
까딱하면 흑의인 둘의 숨통이 끊길 판.
"뭐야? 다들 왜 여기에 모여 있는 거냐?"
"어? 도련님!!"
하지만 바로 그 직전.
향아 등이 걸어온 길 반대쪽에서 명한이 걸어 나왔다.
옷과 머리가 조금 헝클어지긴 했지만, 큰 상처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향아가 날듯이 다가갔다.
"도련님, 무사하셨군요!"
"내가 뭐 쉽게 다칠 사람인가. 그보다 여기서 다들 뭐 하는 거야? 백약문 재건에 힘쓰고 있을 때 아니야?"
"그게 저……불안한 예감이 들어서요. 도련님을 찾으러 여기까지 와 봤는데, 저기 저 이상한 사람들이 갑자기 습격하지 뭐에요."
"이상한 사람?"
손짓에 명한의 시선이 흑의인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흑풍?"
그리고 익숙한 상징을 발견했다.
혈염마녀 연공실에서 만난 흑풍의 인물과 같은 복색이었다.
이들은 명한을 보자마자 곧바로 입안의 독단을 물어서 자결하려 했다.
하지만 한 번 겪은 일을 반복할 명한이 아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서 흑의인의 입을 움켜쥐었다.
"커, 커억!!"
"네놈들이 굴을 무너뜨려서 날 죽이려고 했구나."
"놔라!"
"놓으라고 놓아주면? 또 독단을 물고 죽으려고?"
아예 점혈을 짚어서 움직임마저 제한했다.
흑의인들은 격렬하게 바동거리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명한의 점혈은 고등의 기술은 아니었지만, 내공 자체가 막강했다.
어지간한 방식이 아니면 풀 수 없다.
"덕분에 캐물을 입 하나는 챙겼네. 향아야, 네가 잡아둔 거냐?"
"네? 네."
"그래, 잘했다. 누가 널 얕잡아 보고 덤비면 저렇게 뭉개버려."
명한이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향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향아가 밝아진 얼굴로 뒷발을 탁탁 부딪쳤다.
얼떨결에 싸운 거지만, 결과가 좋으면 다 좋았다.
"쳇. 나도 한 명 제압했는데."
그 모습에 묘아가 부루퉁하니 반응했다.
"칭찬에 일일이 경쟁하지 마. 그래도 뭐……잘한 건 잘한 거니까."
반대 손으로는 묘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다고 달려와서 머리 비비는 모양새는, 연인보다는 애완동물에 가까웠다.
뒤에서 지켜보던 쉬엔이 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르는 건 그만하고, 이 난장판이나 좀 정리해."
이럴 때 한마디 할 수 있는 건 역시 은소소뿐이었다.
쓰다듬는 명한의 손을 탁 치고 지나가, 흑의인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숨은 확실히 붙어 있었다.
"그쪽은 일단 백약문으로 옮겨서 심문해 보는 게 어때?"
"심문이라. 이놈들이 제대로 말을 하겠어?"
"흐음. 그런가? 어이, 네놈들 생각은 어떠냐?"
"크윽! 그 말대로다!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
툭, 치는 손길에 입이 트이자 흑의인들이 반응했다.
"자신만만하네. 이쪽은 꽤 유능한 능력자들이 많은데."
"흥. 그래 봐야 중원의 벌레들. 우리는 평생에 걸쳐서 고문을 견디는 수련을 해 왔다. 아무리 지독한 방법을 써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없다."
"흑풍이라 이건가?"
"……"
중요한 단어에서는 입을 싹 닫았다.
짐작은 해도 확정은 할 수 없는 태도였다.
"별수 없네. 안에서 얻은 걸 좀 써봐야겠어."
"아, 그걸? 하지만 재료는 어쩌게?"
"백약문에 손 좀 벌려야지."
명한이 대화를 함축하며 백약문의 문도를 바라봤다.
"소 공자. 죄송한 말이지만, 백약문은 독을 심문에 쓰는 일에는 동조할 수 없소이다."
"그건 백약문의 규율?"
"그렇소. 소 공자께 큰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나, 이건 본문의 규율이오."
"그거 말인데……"
명한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영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래된 철로 된 영패였다.
"어. 어? 어엇!?"
그리고 백약문의 일부가 이 영패의 정체를 알아챘다.
바닥이 부서질 듯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오독령패를 뵙습니다!"
"존자(尊子)님께 인사 올립니다!"
명한이 내민 영패는 오독문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던 오독령패.
과거, 독문과 백약문이 갈라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던 물건이다.
한때, 오독문에서는 이 오독령패를 쥘 만큼의 역량을 지닌 후인이 등장하지 않았었다.
절대적인 지배자가 없으니 세력이 갈라져 다투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
당시 오독문에 영패를 쥘 사람이 있었다면 분열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오독문의 전인이 된 거 같아서."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진정한 오독문의 전인은 독곡과 백약문의 주인보다 우선이었다.
#
"이, 이건 오독령패 아닙니까!?"
위소홍은 단번에 명한이 가지고 온 영패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백약문의 문주로서 알아야 할 당연한 소양이었다.
"약황비전과 만독비전을 동시에 익히는 것이 오독문의 진전을 잇는 비밀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독문의 폐허에서 이 영패를 얻었습니다."
"두 무공을 동시에? 허, 허어. 하나를 익히는 자도 세대에 걸쳐서 나오는 것을 대체 무슨 수로 동시에 익힌다는 말입니까?"
"그게 뭐 가능하니까 조건이 된 거겠죠."
명한이 머쓱한 얼굴로 양손에 진기를 나눠 담았다.
하나는 약황비전의 기운이고 다른 하나는 만독비전의 기운이었다.
성취는 낮아도 성질까지 거짓인 건 아니다.
위소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로 두 무공을 같이 익혔다는 겁니까?"
"이 영패가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렇겠죠."
"허……선대께서 하신 말은 그냥 격언 정도로 여겼는데."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는 위소홍.
어딘가 좀 넋 나간 얼굴이었다.
"격언?"
"독곡의 비전을 깨달아야 진정한 비전이 열린다. 적수인 그들을 얕보지 말라는 격언 정도라면 여겼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곧이곧대로 사실이었을 줄이야……"
"시간이 흐르면서 진실이 퇴색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죠."
"진실이라. 소 공자께서는 오독문의 폐허에서 무엇을 찾으셨습니까?"
명한이 입술을 달싹이다 멈췄다.
설명으로 하자면 너무 길고, 차라리 보여주는 편이 나았다.
양손 가득 모아 두었던 기운을 한곳에 모은 뒤,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혔다.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기묘한 기운이었다.
"그건?"
"이게 바로 오독문의 비전, 칠채향(七彩香)입니다."
"칠채향? 오독문에 그런 비전이 있었다는 겁니까?"
"저도 겨우 입문만 한 터라 제대로 된 설명은 어렵습니다. 다만……칠채향은 독이기도 하고 약이기도 한. 오독문이 추구하던 이상향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칠채향은 무공이라기보다는 상태에 가깝다.
만독비전과 약황비전이 나란히 존재할 경우, 일곱 색과 일곱 향으로 빛나는 고유의 기운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건 쓰임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궁극의 존재였다.
"이상향이라. 하하하. 이 위모는 백약문이라는 좁은 문턱에서 너무 오랫동안 눌러앉아 있었나 보구려."
"위 장문."
"소 공자. 아니, 소 장문은 이 위모의 절을 받으시오."
"아니, 위 장문인!"
대뜸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는 위소홍.
"소 장문께서 영패를 받아온 이상, 백약문은 다시금 오독문의 일익이 될 뿐이외다. 반쪽이던 독곡이 없으니, 그 부분마저 채워야겠지요."
"그걸 이리 손쉽게 결정해도 되는 겁니까?"
"쉽지는 않았습니다. 소 장문의 제안을 받고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해 보았지요. 우리 백약문이 얼마나 좁게 살아왔는지 그제야 알겠더군요. 하물며, 영패를 가지고 오셨으니, 이 또한 선대의 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
위소홍은 결심을 굳힌 듯 머리를 땅에 댔다.
폐쇄적인 백약문을 유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옛 유지를 받아 더 넓게 나아가겠다는 다짐이었다.
‘약황비전을 단번에 익힌 천고의 기재다. 만독비전까지 상으로 익혔다면 그 재능은……’
물론, 가능성 높은 투자이기도 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아니, 알겠다. 현 시간부로 백약문은 오독문의 일익으로 회귀. 다시 본 문의 영광을 부활시키는 것에 전념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장문인."
명한도 긴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독을 얻기 위해 걸음을 옮겼던 남만.
그보다 훨씬 커다란 것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