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문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이었다.
옷자락을 찢어 불을 붙여도 코앞만 겨우 식별될 정도였다.
발걸음 소리만 어둠 속에서 한참을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걷기를 수 분.
희미한 빛이 건너편에서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연광?"
"아니, 이건 야명주다."
스스로 빛을 내는 아주 귀한 보물, 야명주.
통로 벽면을 가득 채우고 그 안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황궁에서도 이렇게 호화롭게 꾸미는 힘들다.
단순한 연공실이라 볼 수 없었다.
"하. 이건 다 뭐지?"
은소소가 안쪽으로 들어와 헛바람을 켰다.
화려하게 박힌 야명주만큼이나 호화로운 장식이 공간을 수놓고 있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명화, 조각, 보석 따위가 즐비했다.
개인 연공을 위해 준비해둔 공간이 아니었다.
"……"
"뭐 좀 알겠어?"
"냄새. 꽤 오래전에 사용한 거라 희미하긴 한데, 아직 주변에 남아 있어."
"냄새라고? 무슨 냄새인데?"
"춘약."
"뭐!?"
은소소가 깜짝 놀라 코를 소매로 가렸다.
춘약은 일종의 성적 흥분제.
여러 가지 의미로 취급이 까다로운 물건이었다.
"확실해. 약황비전에 기록된 춘약 중에서도 상급의 것이야. 사용한 지 꽤 오래됐음에도 아직 향이 남아 있다는 건 어지간히도 독하게 뿌렸다는 거지."
"여기서 그럼 남자랑 여자랑……그거?"
"분위기를 보건데, 맞는 거 같다. 반쯤 녹은 초도 그렇고, 저 밧줄도 평범한 용도는 아닌 거 같아. 여기서 누군가 진한 밀회를 했다는 거야."
"누가? 여긴 혈염마녀의 연공실이라며."
"그렇지. 그러니까 혈염마녀가 밀회를 즐긴 것이 아닐까?"
은소소가 이번엔 답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지금 명한의 말은 혈염마녀가 천마를 둔 채 불륜을 저질렀다는 의미.
신교의 삶에서 상상하기 힘든 가정이었다.
"이 꼴을 보니 대충 견적이 잡히네. 방금 우리가 만났던 흑풍의 남자. 아마도 혈염마녀와 밀회를 저지르던 고위급 인사의 수족이었나 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쓸데없는 고정관념은 버리고 상황만 봐. 흑풍까지 부려가며 증거를 지웠어. 천마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다, 이 정도 급의 사건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이야기지."
"하, 참. 믿기지 않는군. 입만 벌리면 천마, 천마 하던 여자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고?"
"뭐, 외로워서 곁을 주었다. 흔해 빠진 변명이지."
명한이 냉소적으로 답을 하며 주변을 수색했다.
직접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남사스러운 물건들도 여럿 나왔다.
은소소는 중간부터 구석으로 도망쳐서는 손사래만 쳤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꽤 용의주도했던 모양이야. 앞서 지운 그 천을 제외하면 딱히 정체를 추측할 만한 단서는 남아 있지 않아."
"당연하겠지. 걸리면 천마에게 목이 날아갈 텐데."
"딱히, 그럴 애정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아! 찾았다."
그렇게 뒤지기를 한참.
방 한쪽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표지에 적힌 ‘만독비전’은 두말할 것 없는 증거였다.
미소를 숨기지 않고 손을 뻗어 책을 챙겼다.
"응?"
그때, 명한의 눈에 다른 물건이 들어왔다.
만독비전의 바로 옆.
장식용으로 놓아둔 불상이었다.
호화로운 방 안의 분위기와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뭔데? 그 불상에 뭐라도 있어?"
"이거 혜선암의 물건이야."
"혜선암? 아, 천마의 승전을 최초로 알린 절?"
"응. 당시 그 상황을 기려서 이 불상을 나눠 가진 거로 알아."
"혈염마녀도?"
"아니. 당시에 혈염마녀는 없었어. 즉, 이 불상을 그곳에 있던 사람에게서 받았다는 건데."
명한은 그 면면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이 재밌어지는 건지 고약해지는 건지 모르겠군."
"누군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천마팔반(天魔八伴). 현, 신교의 실세 중의 실세들. 후계 다툼에서도 각 세력의 최정점에 존재하는 기둥 같은 인물들이야. 신교 십이걸도 모두 이들의 제자지."
"천마의 최측근 중 하나가 그를 배신했다는 거야?"
"……단순한 배신이 아니지."
혜선암의 불상은 승전의 증표이자 충성의 서약.
이를 불륜의 대상인 혈염마녀에게 주었다는 건 단순한 불놀이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홍련을 준 것도 그 인물이겠군."
"홍련을? 왜? 불륜 상대였다며?"
"그러니까 누구보다 잘 알았겠지. 궁곡이 죽고 혈염마녀가 어떻게 미쳐가고 있는지를 곁에서 봤을 테니까. 이대로 뒀다가는 자신까지 나락으로 끌려 들어갈 판이니, 차라리 날 제거하기 위한 폭탄으로 쓴 거야."
"잔인한……!"
"어지간한 인간이 아니라는 거야."
불륜이지만 사랑했던 여인을 죽음으로 내몰 정도의 비정함.
사후 처리를 위해 흑풍을 사용할 정도의 권력.
"잠깐만. 그럼……"
사실관계를 머리에서 정리하는 찰나.
쿠르르르릉.
굉음과 함께 지반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하나가 아니었어!"
명한이 은소소의 손을 잡고 황급히 몸을 날렸다.
비정함과 냉철함을 동시에 지닌 신교의 정점 중 하나.
그런 인간이 고작 사람 하나를 보내서 뒤처리할 리는 없다.
호기심을 못 이긴 고양이가 굴로 들어가면, 그 굴을 통째로 뭉개서 처리하는 것.
가장 깔끔한 수였다.
"뛰어! 저 앞에 다른 통로가 있다!"
"소백, 갈림길이야!"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갈림길.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뉜, 선택의 기로였다.
"젠장, 신기자!"
흉(凶), 동(東). 길(吉), 서(西).
그가 예지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었다.
명한이 본능적으로 한쪽 방위로 몸을 날렸다.
#
푸스스슥.
돌 부스러기가 먼지처럼 떨어졌다.
반쯤 붕괴된 석실의 한쪽 구석.
사람 한 명 겨우 들어갈까 싶은 공간이었다.
"괜찮냐?"
"으, 응……"
그리고 그 안에 포개듯 겹쳐져 있는 두 사람은 은소소와 명한.
서쪽으로 몸을 날려, 간신히 목숨만 구한 상황이었다.
반대쪽 통로는 틈 없이 가라앉은 모양새니, 선택을 달리했다면 그대로 압사당할 뻔했다.
"겨우 목숨은 건진 모양인데, 이거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지?"
"손은 움직일 수 있겠어?"
"잠깐만. 한 번……"
"힉! 그, 그만! 움직이지 마!"
꿈틀대는 명한에 은소소가 깜짝 놀랐다.
워낙 좁은 공간에 몸을 부대끼고 있는 터라 손만 움직여도 살갗이 전부 닿았다.
"이러고 평생 있을 수는 없잖아. 나갈 길을 찾아야지."
"알아. 나도 안다고. 잠깐 심호흡 좀 하게 움직이지 마."
"응? 어디 다치기라도 했어?"
흐트러진 호흡에 명한이 살짝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툭 하고 두 사람 코가 닿았다.
워낙 좁은 공간이라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뭐……하는 거야!?"
"다친 건 아닐까 해서. 부상 입은 건 아니지?"
"아니야. 아니야! 아니니까 물러나."
"이 좁은 곳에서 물러날 공간이 어디 있다고 그래."
"으으으."
은소소가 드물게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라면 드물게 넘길 일도 지금은 왠지 그럴 수 없었다.
‘설마……춘약이?’
방 안 가득 남아 있던 춘약.
붕괴로 퍼졌다면 영향을 끼치는 것도 당연했다.
"넌, 뭐 아무렇지 않은 거야?"
"다행히 부상은 없어. 이 답답한 공간만 벗어나면 될 거 같은데. 힘을 잘못 쓰면 이차로 붕괴가 이어질까 봐 그게 두렵네."
"그것뿐?"
"뭐, 다른 거라도 있어?"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하지만 왜 자신만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기 힘든 걸까.
은소소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시야를 숙였다.
아무리 어두워도 코앞.
눈과 입술이 아른거려서 들고 있기 힘들었다.
‘……어?’
그리고 꽉 움켜쥔 명한의 주먹을 발견했다.
돌조각 하나를 쥔 채,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었다.
"뭐야. 자기도 참고 있었네."
"……음? 뭐가?"
살짝 붕 뜬 물음에 은소소가 코를 찡긋거렸다.
자기만 참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싫지 않았다.
춘약이라는 건 사실상 강장제에 가까워 무림인에게 치명적인 효과를 주긴 어렵다.
반응이 있다는 건 대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의미.
‘왜 싫지 않은 거지?’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쿠르르르르……!
"앗!"
"조심해!"
순간, 추가적인 흔들림이 이어졌다.
하중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갈라지면서 흙더미가 아래로 내려왔다.
명한의 허리가 크게 꺾이며 두 사람의 뺨이 완전히 밀착했다.
거리를 두고 싶어도 둘 수 없는 공간이었다.
피부를 타고 숨소리마저 전달되었다.
"이, 이젠 좀 위험하지 않아?"
"위험하지. 이대로 있으면 큰일 날지도 몰라."
"큰……일?"
마른 침을 꼴딱 삼키는 은소소.
심장이 거칠게 소리를 내며 뛰었다.
"내가 진기로 잔해를 밀어내 볼 테니까, 그 사이에 파편을 베어 봐. 공간이 나면 외부로 통로를 열 수 있을지도 몰라."
"아. 그 이야기."
"응?"
"아니, 아니야. 한 번 해보자. 이대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달아오른 얼굴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은소소가 진기를 움직여 손에 집중시켰다.
검이 없어도 무른 돌 정도는 얼마든지 벨 수 있었다.
"그럼……간다."
훙―하고 울리는 바람 소리.
명한의 몸 주변으로 강력한 기막이 펼쳐지며 잔해를 밀어냈다.
엄청난 무게 탓에 공간을 완벽하게 확보할 수는 없었지만, 손발을 떼기는 충분했다.
그 사이, 은소소가 검기를 사정없이 날려서 주변 잔해를 베어버렸다.
주변 석 장 공간이 완전히 난도질 되었다.
"저기!"
잔해 너머, 멀쩡한 통로 하나가 드러났다.
명한은 곧바로 기막을 거두며 은소소와 함께 통로로 몸을 날렸다.
이내, 굉음과 함께 잔해가 통째로 쏟아져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있던 곳을 완전히 메워버렸다.
이제 돌아갈 길은 없었다.
"쿨럭. 쿨럭. 소백, 괜찮아?"
"……"
"소백?"
답 없는 명한에 은소소가 손짓으로 먼지를 밀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과는 분위기가 다른 통로가 두 사람 앞에 놓여 있었다.
"동쪽은 흉하고 서쪽은 길하다고 하더니."
그리고 그 한쪽, 반쯤 부서진 채 놓인 명패 하나.
[오독문] 이름 석자가 새겨져 있었다.
"신기자라는 이름이 허명은 아니었나 보다."
백약문과 독곡의 모체가 되는 오독문의 비처였다.
#
오독문 안에 숨어 사는 은거기인이 있었다.
엄청난 독과 함정에 명한은 고생했다.
아쉽게도 이런 전개는 없었다.
오독문은 이미 오래전에 멸문.
동굴과 연결된 비처는 세월을 직통으로 맞아서 대부분의 물건들이 삭아 있었다.
"근데 이런 장소가 왜 독곡 지하와 연결되어 있던 거지?"
"뭐, 원래부터가 독곡은 오독문에서 갈라져 나온 문파니까. 그 위에 터를 잡았어도 이상한 건 아니지."
"그런가? 근데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관리가 안 되어 있지 않아?"
"흐음. 확실히."
터는 남아 있지만, 내용물은 태반이 삭았다.
본류를 지키고자 했다면 이런 식의 관리는 하지 않았을 터.
‘설마, 시간이 지나면서 본류를 잊은 건가?’
그렇다면 꽤 서글픈 일이었다.
"소백. 이거 봐봐."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기를 잠시.
너른 통로 한쪽에 겹겹이 쌓여 있는 해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양쪽으로 나뉘어 대치하는 형태의 해골 무리였다.
의복이든 무기든 대부분이 삭아 있었지만, 그나마 멀쩡한 것에서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독곡과 백약문이네."
"이 해골들이?"
"응. 완전히 갈라지기 전 이곳에서 싸웠던 모양이야. 그렇게 도망친 뒤 일부는 독곡으로 다른 일부는 백약문이 된 거지."
"이 둘은 꽤 지독한 인연이네."
"지금에 와서는 한쪽만 남았지만."
수장을 잘못 뽑은 대가로.
명한이 혀를 차며 해골을 가로질렀다.
"응? 잠깐만."
그러다 통로 중앙 즈음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건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굳건히 남아 있는 어떤 기운이었다.
― 연자는 그 증거를 내보이라.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
이건 산 자의 것이 아닌, 망자의 소리였다.
명한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오독문에 남아 있는 어떤 기연임을 깨달았다.
‘연자? 오독문의 인연이라고?’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
"습득, 만독비전."
즉시, 만독비전을 익혀 몸 안에 두 가지 무공을 동시에 지녔다.
― 연자는 오독문의 후예임을 증명하였다.
그르르르르릉.
거칠게 울리며 좌우로 벌어지는 통로.
오독문이 독곡과 백약문으로 나뉜 이후,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던 장소였다.
― 연자를 오독문의 후예로 인정한다.
명한이 최후의 주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