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
산을 뒤덮던 홍련은 순식간에 말라 죽었다.
비정상적인 성장만큼 비정상적인 죽음이었다.
산 전체가 붉은 가루로 뒤덮여 기이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찾았다! 우하하!"
그리고 그 안에서 쉬엔은 홍련의 정수를 얻었다.
은소소가 파괴한 생명선 너머, 조금 남은 진액이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목표를 이루기에는 충분했다.
"약을 만들기에 충분한 양인가?"
"응. 응. 아마 이 정도면 될 거야. 아직 정제니 뭐니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시작은 할 수 있어."
"혼자보단 여럿이 낫지 않겠어?"
"응?"
명한은 쉬엔의 사정을 백약문에 설명했다.
"혈주갈에 당한 것이라면 우리가 도울 수 있소. 소저 말처럼 궁극의 약은 아니겠지만,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가능할 것이오."
"날 도와준다는 건가요? 하지만 백약문은……"
"여러 조건을 따져서 사람을 구한다. 백약문의 규율은 많이 낡은 것이오. 이번 일을 겪으며 뼈저리게 느꼈지. 사람을 구하는 일에 자격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위소홍은 한 짐 덜어낸 얼굴로 웃었다.
혈염마녀의 만행을 제지하지 못했던 것에는 백약문의 폐쇄성도 한몫했다.
일찍이 독을 연구하여 방책을 세웠다면 어땠을까.
아니, 그 전에 의술을 자격 없이 펼쳤으면 어땠을까.
목숨 걸고 나서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도와준다니 고마워요."
"감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오. 두 분 덕에 혈사를 막았으니, 앞으로 백약문은 두 분. 아니, 여러분을 친구로 대할 것이외다."
위소홍의 손끝은 모두에게 향해 있었다.
"그럼 친구의 도의로 백약문의 재건은 내가 돕기로 하지요."
그리고 이런 기회를 놓칠 명한이 아니다.
"향아야, 이월에게 서신을 전해라. 인근 구조물자를 모조리 끌어와서 백약문과 마을 재건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네, 도련님."
"자, 잠시만. 우리를 신교에서 돕겠다는 것이오?"
위소홍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신의를 주고받았다고는 하지만, 신교와의 관계는 조금 일렀다.
"놀라시기는. 백약문과 마을을 돕는 건 신교가 아닌, 나 소백 개인입니다. 돈과 물자를 흑점을 통해서 흘러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흑점? 아니, 그럼 베일에 싸여 있는 흑점주가 당신이란 말이오?"
"대충 한 발 걸치고 있을 뿐입니다. 설마, 흑점의 돈이라고 안 받는 건 아니겠지요?"
"허어. 아니오. 이 마당에 눈먼 돈이라고 외면할까. 그보다 괜찮은 것이오? 흑점의 주인이라는 신분은 공개된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위 장문께서 입만 다물어 주시면 됩니다. 아니면 이참에 우리와 손을 잡아도 좋고요."
명한이 은근하게 접근했다.
백약문은 중원 전체를 털어도 몇 없는 의술명가.
얻어서 나쁠 것 없는 곳이었다.
"……신교와는 별개로 말이오?"
"이건 어디까지나 나, 소백 개인의 제안입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약황비전도 익혔겠다, 굳이 따지자면 사형제간 아닙니까?"
"허허. 말이 그렇게 되는 거요?"
"의술을 펼침에 제약을 두지 않겠다면, 물심양면 지원하겠습니다."
위소홍의 미간이 한참이나 펴지지 않았다.
이런 문제는 단번에 결정할 종류가 아니었다.
"당장 답이 어렵다면, 마을과 백약문을 재건하면서 한 번 생각해 보시죠. 이 건에 대해서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으음."
"선의는 그저 선의일 뿐입니다. 생사를 함께 헤쳐온 마당에 득실을 따지지는 않습니다."
"알겠소. 나, 위소홍. 소 공자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짧은 포권을 주고받는 두 사람.
결정을 어떻게 하든, 엮인 연은 풀 수 없다.
적어도 명한의 계획 중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아, 그리고……귀의 말입니다만."
그리고 덤으로 한 가지 더.
천마궁에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한 사람의 소원도 슬쩍 끼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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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독곡인가."
백약문과 마을 문제를 대충 처리할 즈음.
명한은 본래 독곡이 있던 장소를 찾아왔다.
혈염마녀에 의해서 전부 죽임을 당해 남은 거라고는 부패 중인 시체밖에는 없었다.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참혹하네. 한때는 자기들 문주라 칭송하던 사람에게 이런 꼴이라니."
"사람 됨됨이를 제대로 판별하지 못한 게 죄라면 죄일까. 한때, 사천과 남만을 호령하던 독곡의 최후치고는 허망하군."
시체의 산을 피해 독곡의 본산으로 올랐다.
여러 층으로 나뉜 산의 꼭대기였다.
인적 없이 건물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끼이익.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여기서 뭘 찾으려는 거냐?"
"일단은 만독비전. 혈염마녀가 익힌 무공의 진품이 이 안 어딘가에 있을 거야."
"독이라. 그 꼴을 봤으면서도 익힐 마음이 들어?"
"만독비전 자체는 최상급의 독공이야. 쓰임새가 잘못된 거지, 무공 자체에는 문제가 없어."
만독비전은 존재하는 모든 독공 중 단연 한 손에 꼽히는 비전이다.
의술에 약황비전이 있으면 독공에는 만독비전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명한이 이를 찾는 건 단순히 그 무공의 가치가 높아서는 아니다.
"아, 여기 있다."
오래지 않아 찾아낸 비밀 통로.
촛대를 돌리자, 돌벽이 돌아가며 통로를 드러냈다.
습작에서 묘사된 모습 그대로였다.
"숨겨진 연공실인가?"
"혈염마녀는 욕심이 많은 인간이었지. 자신은 천마궁에서 궁곡을 키우는 데 전념하면서도 비전은 쉬이 공유하려 하지 않았어. 이곳도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었을 거야."
"그걸 너는 어떻게 알고?"
"그야……"
비밀, 이라는 말을 맺기 직전.
어둠 속에서 기척이 솟아나 명한을 향해 움직였다.
매우 은밀하고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쿵―!
반사적으로 뽑은 타구봉에 바닥이 움푹 파였다.
하지만 기척의 주인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 상황.
탁, 소리와 함께 뒷문이 닫히고 주변이 완전히 어둠으로 둘러싸였다.
‘매복?’ 속삭이듯 묻는 은소소에 명한은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적의를 가진 자가 있었다.
‘……왼쪽.’
어둠 속에서 물처럼 흐르는 보법.
육안으로는 구별되지 않는 신기였으나, 명한에게는 반야가 있었다.
땅을 찍은 타구봉을 발로 차 한쪽 방위를 차단했다.
움직이던 그림자가 움찔하며 동작을 멈췄다.
쩌엉―!
그 사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뽑은 은소소.
명한이 대응을 시작했을 때부터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검과 충돌한 금속제의 병기에서 불꽃이 튀어 잠시 주변을 밝혔다.
"흑풍(黑風)!?"
먹으로 칠해진 바람 문양.
신교의 특수부대 중 하나인 ‘흑풍’의 상징이었다.
괴인은 짧게 혀를 차며 어둠 속으로 다시금 몸을 숨겼다.
단련된 동작.
"감히 어디서 도망치려고."
하지만 명한은 놔 줄 생각이 없었다.
타구봉의 끝을 차 벽면에 충돌시켜 괴인의 어깨를 타격.
휘청거리는 괴인의 옆구리에 강력한 장법을 쑤셔 넣었다.
몸이 붕 떠서 벽에 처박혔다.
피를 투하며 부들부들 떠는 모양새가 적지 않은 부상이었다.
"신교의 특수부대야. 그렇게 막 후려쳐도 괜찮은 거냐?"
"그랬어? 난 어두워서 몰랐지 뭐야."
"참, 너도……아!"
다 잡은 물고기.
그런 생각이 실수였다.
구석에 처박힌 괴인의 입안에서 뿌득, 하는 마찰음이 들리더니 독연이 퍼졌다.
만약의 경우 비밀 엄수를 위해 섭취하게끔 돼 있는 독물이었다.
두어 번 몸을 떨고는 축 늘어졌다.
"쯧. 실수했네. 설마 이렇게 망설임 없이 자결할 줄이야."
"원래 그런 식으로 훈련받은 놈들이야. 우리를 확실한 적으로 인지한 거겠지. 하지만……이놈들이 신교 밖에서 대체 뭘 하고 있던 거지?"
명한과 은소소가 괴인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뒤졌다.
단도나 몇 가지 약품을 제외하고는 별달리 특정할 물건이 없었다.
흑풍이라 추측한 옷의 문양도, 흉내 내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더이상 단서는 없었다.
"……아니, 잠깐만."
코를 찡긋거리는 명한.
죽은 괴인은 내버려 두고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시야는 깜깜했지만, 그 덕에 후각은 되레 날카로웠다.
어둠 속에서 천 하나를 건져 올렸다.
축축하게 젖은, 조금 전까지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으윽. 무슨 냄새야?"
"비밀 서류를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특수 염료다. 지금처럼 흔적을 지우면 고약한 냄새가 나지."
"비밀 서류? 여기는 혈염마녀의 연공실이잖아."
"그러니까."
명한이 젖은 천을 소매로 닦은 뒤 닫힌 문을 열었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에 다 지워지지 않은 글자 몇 개가 시야에 잡혔다.
"……암(暗). 래(來). 도(到) 마지막 이건 운(雲)인가?"
띄엄띄엄 남은 글자로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려웠다.
"혹시, 천마궁의 누군가 혈염마녀를 도와서 널 제거하려고 한 것 아닐까?"
"날 제거하기 위해서 혈염마녀와 손을 잡았다?"
"소림사의 일도 이미 신교에 닿았을 거잖아. 널 사십팔 궁의 말석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야. 기회가 있을 때 제거하려 하겠지."
"하지만 이건……"
방식이 과하다.
차라리 고수를 파견하면 모르겠지만, 홍련 같은 건 너무 과격하다.
잘 된다고 해도 뒤끝이 좋지 않다.
‘아니, 그래서 이런 방식을 택한 건가?’
혈염마녀와 독곡.
그리고 명한을 한 번에 쓸어버리는 방법.
"파운일까?"
"아니. 이미 한 번 손 떼고 물러난 사람이야. 다시 움직였다고 보기는 어렵지."
"그에게는 신기자가 있잖아. 미리 읽고 계획한 것 아닐까?"
"신기자?"
명한이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황급히 천을 들어 올려 글자를 다시금 살폈다.
"암. 래. 도. 운. 암운도래. 젠장, 신기자."
과거, 묘아를 명한에게 인도한 신기자가 남긴 말이었다.
암운도래. 흉, 동. 길, 서.
"그때, 묘아가 남긴 말이로군."
"그래. 그 인간은 지금 이 순간까지 내다보았던 모양이다."
"진짜로 천기를 엿보기라도 하는 건가? 근데, 그럼 흉동과 길서는 뭐야?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흉하다는 거야?"
"글쎄. 단순히 해석하자면 그게 옳겠지만……"
신기자의 의도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우습다.
어찌 됐든 그는 파운의 오른팔.
말하자면 적의 간부였다.
"봐봐, 소백. 이 방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기계 장치가 있어. 이걸 사용하면 다른 문이 열리는 거 아닐까?"
"기계 장치라고? 확실해?"
"응. 동쪽은 흉하다니까 서쪽의 걸 한 번 작동해 볼까?"
"잠깐만."
손을 뻗는 은소소를 제지했다.
신기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동쪽은 흉하고 서쪽은 길하다. 그럼……남쪽과 북쪽은?’
명한이 무심코 고개를 치켜들었다.
머리 위, 손바닥만 돌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건 아래도 마찬가지.
"선택지는 모든 방위에 존재한다는 건가."
"어떻게 해? 어느 쪽을 눌러?"
"길과 흉을 택하는 건 어디까지나 나야. 서쪽과 동쪽, 둘 다 택하지 않는다."
타구봉으로 위와 아래를 동시에 눌렀다.
그르르릉, 하는 거친 마찰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벽과 벽을 밀어내며 구조를 바꾸는 방.
시대를 뛰어넘을 정도의 정교한 방식이었다.
순식간에 지하로 이어진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백, 이건……?"
"아무래도 만독비전은 이 아래에 있는 모양이야. 아니면 더한 거라도."
습작에 이런 비밀 통로를 묘사한 기억은 없다.
통로 너머는 그 어떤 정보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영역.
‘서쪽이나 동쪽을 골랐으면 다른 결과였을까?’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알 수 없는 것이 본래의 삶.
"내려가자. 뭐가 됐든 난 물러날 수 없어."
명한이 미지를 향해서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