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235)

빚을 갚다

약황비전의 기본 효과는 이렇다.

모든 영약 효과를 배가시켜 내공 및 체질에 추가 점수를 주며, 독성의 이해와 해독에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대성하면 만독불침의 효과 또한 따라온다.

하지만 이건 약황비전의 핵심 효과를 생각하면 부가적인 능력에 불과하다.

"배합과 분리."

1+1을 2가 아닌 3, 4로 만드는 힘.

3, 4의 효과를 내는 독이나 약을 1과 2로 다시 분리하는 힘.

약황비전은 사실상 전체와 부분의 경계를 다룸에 있어서 최적의 효과를 지녔다.

"이걸로 혈염마녀의 독성을 분리할 수 있다는 거야?"

"홍련을 키우는 핵심 재료는 어디까지나 혈주갈이니까. 독성만 분리하면 지금처럼 미친 듯이 성장하지는 못해. 충분히 약화 시킨 뒤, 홍련의 뿌리를 찾아서 제거하면 끝."

"말은 쉬워 보이네."

묘아가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략적인 상황 설명은 들었지만, 핵심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아니, 자신만이면 이런 표정은 짓지 않는다.

"겨우 만났는데, 위험한 일에 뛰어들게 하는 거 같아."

겨우 찾은 자매, 쉬엔 때문이었다.

혈염마녀의 독성 분리를 위해서는 이를 반흔으로 품은 자매가 직접 현장에 있을 필요가 있었다.

위험하다는 건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어머니 약을 구하려면 홍련을 제거해야 하는걸. 게다가 겨우 만난 자매를 위한 길이잖아. 위험 따위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어."

"쉬엔……"

"이번 일 끝내면 둘이서 어머니 만나러 가자. 어머니도 나만큼 놀라워하실 거야."

"응. 반드시."

쉬엔, 묘아 자매는 강단이 있었다.

길지 않은 대화로 결정을 내리고 명한을 돌아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홍련은 마을을 쓸고 내려오는 중.

오래 기다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준비는 됐어.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수는 전부 셋."

명한이 손가락을 세 개 폈다.

"하나는 나를 통한 혈염마녀의 유인.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이건 반드시 통해."

"두 번째는?"

"독성 분리를 하기 전까지 최대한 홍련을 제어해야 해. 이건 백약문에서 도움을 좀 줘야겠어요. 쟁여둔 약물로 마비산을 대량으로 만들어야 하거든."

위소홍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이고 뭐고 홍련을 제압하지 않으면 끝이라는 걸 잘 알았다.

"마지막으로 셋. 나와 두 자매가 독성을 분리하면 홍련의 기세가 줄어들 거야. 파도같이 몰아치던 홍련의 생면선도 마찬가지겠지. 이때, 향아 네가 눈으로 진짜 뿌리를 찾아줘야겠어."

"너무 범위가 넓지 않을까요?"

"괜찮아. 네가 찾을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 줄 테니까. 소소, 넌 향아와 함께 뿌리를 찾아서 혼원일기로 잘라 줘. 절대로 재생하게 두면 안 돼."

"맡겨 둬. 씨를 말려버릴 테니까."

다른 검도 아니고 혼원일기라면 믿을 만하다.

명한이 펴 두었던 손가락을 모두 접어 주먹을 만들었다.

"기회는 한 번. 잡초를 뽑는다."

준비는 끝났다.

#

사방이 붉은색이었다.

발끝에 닿는 모래도, 떠다니는 먼지마저 붉었다.

홍련이 개화준비를 하면서 포자가 떠다닌 결과였다.

당장으로서는 별문제가 없지만, 열매를 맺으면 이것도 전부 독이 된다.

"소……백."

그리고 그 안에서 스물스물 기어 나오는 혈염마녀.

이미 인간의 형태를 대부분 잃고 있었다.

홍련을 기르고 열매를 트는 것까지는 그녀의 계획이었겠지만, 애초에 제어가 될 마물이 아니었다.

작금에 와서는 그녀조차 홍련의 일부였다.

"자식 놈 죽은 슬픔에 제대로 미쳤군. 그러니까 가정 교육을 제대로 했어야지. 그런 망나니로 키우면 밖에서 칼 맞는 거라고."

"소백. 소백. 소백!!! 네놈 탓이다. 네놈 때문에 우리 아이가 죽었다!"

"도돌이표 같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지. 어차피 그놈이나 나. 아니, 너나 나나 천마궁이라는 마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칼을 갈았을 뿐이야. 뭐, 그쪽은 질투심이라는 조금 치졸한 감정의 발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닥쳐!!"

질투심은 발작 신호였다.

혈염마녀의 전신에서 홍련이 넝쿨 형태로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고수의 손길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황 때문이라도 제대로 맞서지 못했을 터.

하지만 명한은 절대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웅―!

벌떼 소리를 내며 회전하는 타구봉.

손끝에서 벗어나 모든 방위, 모든 각도의 넝쿨을 사정없이 쳐냈다.

반야신공의 절대적인 반격기는 신체적인 한계마저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넝쿨이 잘리고 뭉개지고 터졌다.

"네놈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 핏값을 내어놓아라!!"

순간, 땅이 거칠게 요동치며 사람 몸통만 한 넝쿨이 솟구쳤다.

마치 용의 꼬리 같은 몸짓이었다.

거대한 호를 이루더니 그대로 명한을 머리부터 찍어 눌렀다.

쿠르르릉.

기막에 막혀 굉음을 쏟아내는 넝쿨.

반야신공을 통한 반격을 시도했음에도 절대적인 중량에 막혔다.

대인전을 넘어선 괴수 대전급으로 가면서 장점이 상쇄된 격이었다.

"핏값은 내가 받아야지. 네 알량한 질투심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핏값을 받아내겠다."

그렇다면 답은 요령이 아닌 힘.

명한이 기운을 단전에서 뽑아 올려 강하게 찔렀다.

기둥 같은 넝쿨 가운데가 원형으로 푹 파이더니, 순식간에 찢어졌다.

타구봉법에 극천일무기의 힘을 섞은 것이다.

"네놈도 그년과 같아. 언제나 입발린 말 따위로 그분을 유혹했어. 하찮은 변방의 계집 따위가. 아무것도 없는 천한 계집이!!"

"시끄러워. 고향에서 잘 살던 어머니를 납치해 온 천마도 싫지만, 그거 가지고 신분 타령하는 너희는 아주 지긋지긋해. 대체 뭐가 잘났다는 거냐? 독곡에서 태어나서? 세력이 있어서? 지랄 마. 세상에는 그딴 것보다 중요한 게 훨씬 많아."

숨을 통해 분노가 흘러나갔다.

아무리 한 걸음 뒤에서 보려고 해도 이입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대체 뭐가 그리 화난단 말인가.

고향에서 납치당해 어쩔 수 없이 정붙인 사람에 불과하다.

얄팍한 질투 때문에 죽어도 좋을 사람이 아니다.

"쌍아. 성성아."

품에서 쌍각사가 튀어나가고 신호에 성성이가 튀어나왔다.

붉은색 홍련의 너울과 비교하자면 작디 작은 저항이지만, 상관없다.

맞서는 데는 작은 용기, 작은 분노면 충분하다.

"날뛰어."

모든 것을 풀어놓았다.

#

명한이 혈염마녀를 유인하고 있을 무렵.

남은 이들도 각자의 역할에 맞춰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핵심은 홍련을 제어하기 위한 약품이었다.

재료는 명한의 약재들과 백약문의 비상품으로 충분했지만, 인력이 모자랐다.

홍련의 수와 범위는 백약문 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었다.

"제한적으로 사용하면 필요할 때 발목이 잡힐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뿌리를 찾을 사람까지 동원할 수는 없어요."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홍련이 이곳까지 도달하고 말 거에요."

"우리가 도울게요."

"어……?"

그때 나선 것은 마을 사람들.

한 번씩은 명한에게 도움을 받았던 이들이다.

"약을 홍련이 핀 곳에 뿌리면 되는 거잖아요. 우리도 산을 타던 사람들이라 발은 빨라요. 위치만 알려주시면 빠르게 뿌리고 도망칠게요."

"자칫 잘못해서 홍련에 잡히면 죽고 맙니다."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저 붉은 연꽃이 온 산을 다 덮을 거 아닙니까. 그때가 되면 가고 싶어도 갈 곳도 없어요. 신선 님이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신 일이 있는데, 손 놓고 있을 수야 없죠."

"맞소. 우리도 한팔 거들겠습니다"

"나도 도울게요. 발은 빨라요!"

한 명이 나서자 우후죽순으로 지원자가 늘어났다.

위소홍과 은소소가 시선을 맞춘 뒤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다.

"가루 형태니 던지고 도망치면 됩니다. 절대로 가까이 접근하지는 마세요."

"이쪽으로. 뿌려야 할 곳을 안내해 드리겠소."

마을 사람들을 빌려, 약을 분배했다.

두려움은 감추지 못한 얼굴이나, 비장함은 여타 무인에 모자라지 않았다.

위기에 나서는 건 명문정파의 무인만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들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부탁하겠소."

등짐을 짊어진 마을 사람들이 산 곳곳으로 퍼졌다.

#

주륵. 볼에 난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명한이 손끝으로 가볍게 훑어 혀로 피 맛을 봤다.

비릿한, 뜨거운 맛이었다.

"숫자 앞에서 장사 없다더니."

정면에서 맞상대하기를 반각.

자르고 뭉갠 홍련의 숫자가 수백을 훌쩍 넘어감에도 주변은 여전히 붉었다.

바다와 같이 충만하던 내공도 슬슬 바닥을 내보였다.

신수, 쌍아와 영물 성성이도 마찬가지.

무한하게 싸울 수는 없었다.

"죽어. 죽어. 넌……여기서 죽는다."

"후우. 집념 하나는 대단하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죽을 생각은 없어."

한 걸음 물러나는 명한.

슬쩍 올려다보는 시선에 기울어진 태양의 각이 잡혔다.

‘지금쯤이면 홍련에 약을 뿌리고 있을 터.’

유인의 역할은 충분히 했다.

"묘아, 쉬엔. 이제부터 본론이다."

손짓에 숨어있던 묘아와 쉬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 홍련들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거칠게 반응했다.

두 사람에게 깃들어 있는 혈주갈의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너. 그것들을 어디에서 구한 거냐?"

"사람을 물건으로 치부하면 쓰나. 그런 식이니 궁곡이 엇나간 것 아니겠어?"

"소백―!!"

크게 분노하며 앞으로 움직이는 혈염마녀.

전신에서 뽑혀 나온 홍련 넝쿨들은 창처럼 뾰족하게 말려서 틈 없이 쏟아졌다.

당문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만천화우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건 만천화우도 그만큼의 아름다움도 없었다.

‘후―!’ 짧은 호흡으로 타구봉을 휘두르는 명한.

극천일무기, 절의 요령이 공간을 가르며 넝쿨을 절단했다.

순간적으로 그와 혈염마녀 사이의 길이 열렸다.

"지금이다!"

신호와 함께 달려나가는 묘아와 쉬엔.

혈염마녀의 양쪽 팔에 매달려 챙겨온 약품을 분사했다.

반응성을 높이는 일종의 매개체였다.

두 사람의 반흔이 이에 반응하여 붉은색으로 달아올랐다.

"혈주갈!"

"그래도 아직 눈은 남아 있네."

이미 주변은 홍련의 분진으로 가득한 상황.

독성에 반응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명한은 그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약황비전의 힘을 사용했다.

먹물을 다시 물과 먹으로 나누는 과정.

"그만―!!"

혈염마녀는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발악했다.

바닥에서 수십 개의 넝쿨이 창처럼 솟구쳐 명한 등을 노렸다.

피하기는 가깝고 막기는 강했다.

‘꽉 잡아라.’ 명한은 두 발로 대지를 딛고 두 사람을 허공으로 띄웠다.

허공섭물에 가까운, 기예였다.

"소백!!"

"다, 다리가!"

"움직이지 마. 반응이 흐트러진다."

하지만 두 사람을 띄웠다는 건 명한 자신은 피하지 못했다는 의미.

바닥에서 치솟은 넝쿨에 다리와 허벅지가 뚫렸다.

가이신공과 막강한 내공이 벽처럼 막아섰지만, 홍련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내공의 벽을 무너뜨리고 명한의 살점을 파고들었다.

"이곳에서 먹어주마! 죽은 내 아이를 위해서 네놈의 살점을 씹고 뼈를 갈아 마시겠다!"

"지랄 마, 늙은이. 이딴 풀뿌리 따위에 죽을 거였다면 이 고생하며 살아남지도 않았어."

웅, 하는 진동이 명한의 발로부터 퍼졌다.

몸의 중심을 대지에 두는 신목(神木)과 같은 반야신공의 반격기였다.

몸 안의 내공이 살아있는 생명처럼 움직여 홍련의 기운을 전부 불태웠다.

아득할 정도의 고통이 몸을 관통했지만, 명한은 억지로 참았다.

여기서 흔들리면 약황비전도 끝이었다.

"네, 네놈! 뭘 하려는 거냐!?"

"옛적에 했어야 할 일."

묘아와 쉬엔의 반흔이 주변 홍련과 완전하게 반응했다.

마치 불 꺼진 방안에서 형광색 하나만 도드라지는 느낌.

명한은 이를 손으로 잡아서 홍련의 기운에서 완전히 뜯어냈다.

우드드드득.

수십, 수백의 넝쿨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안 돼! 안 돼! 하지 마! 이건 내 복수다! 내 원한이다! 내 절규란 말이다! 이것마저 내게서 앗아가지 마!"

"애초에 네 것 같은 건 없었어. 잃은 것도, 잃었다고 생각한 것도."

"아……아아아아! 웃기지 마! 나는 죽지 않아! 만독비전은 내게 불사의 힘을 주었다!!"

"그런 꼴로 불사라는 것도 우습지만……"

명한이 울부짖는 혈염마녀를 걷어차며 거리를 벌렸다.

흔들리는 생명선 너머, 그 본질의 위치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반야와 묵혼공이 깊어진 덕인가? 하지만 굳이 갈 필요는 없겠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파괴적인 기운.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며 번쩍였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은소소가 사용한 혼원일기였다.

"있어. 너와는 다르게 나는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는……나는. 우리 독곡은. 내 아이 궁곡은……아. 아아아아아아!!"

근원이 잘린 혈염마녀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회색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홍련만큼 허무하고 덧없는 모습이었다.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어 보지만, 잡히는 것 아무것도 없었다.

비틀비틀 몇 걸음을 더 걷다, 그대로 가라앉았다.

사람이 아닌 잿더미.

"이걸로 빚은 갚았다, 소백."

하나의 마침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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