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쉽죠?
산을 우회해서 한참을 내려온 뒤에야 멈췄다.
죽일 듯이 따라오던 홍련도 이 부근까지는 세력을 뻗치지 못했다.
겨우 숨을 고르고 밀린 인사도 나누었다.
"아직 이월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냐?"
"네가 위험할 거 같다고 발 빠른 나를 보냈지. 서두른 보람이 있네. 늦었으면 저 안에서 말라 죽었을 거잖아."
"덕분이다. 고마워."
"헤……헤헷. 별거 아니라고."
묘아가 코 쓱 하고는 실실 웃었다.
"근데 이월이 너만 덩그러니 보낸 거야?"
"응? 아차차. 이거 받아. 이월이 찾아낸 정보야. 남만으로 모이는 독곡의 재료 중에 독특한 것이 섞여 있어서 중점적으로 조사했어."
"지금 꼴을 보자면 독곡이 아니라 혈염마녀의 것이겠지."
명한이 넘겨받은 재료를 눈으로 훑었다.
수십, 수백의 재료가 빼곡하게 차 있었다.
‘……이건가.’
하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 건 단 하나였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쉬엔 쪽하고 합류를 한 뒤에 상의해 보자."
"쉬엔?"
"아, 너는 모르겠네. 사방에 널린 홍련을 쫓아서 이곳까지 온 사람이야."
"어? 혹시 페르시아 상인?"
"상인? 어쩌면. 그건 왜?"
쉬엔은 설정상 페르시아인과의 혼혈.
상인으로 세계 곳곳을 탐방하곤 했다.
"여기 이거. 이월이 준 정보에 의하면 내 부모와 페르시아 상인이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거든."
"네 친부모와?"
"응. 응."
"……"
남만 땅이 좁은 것도 아니고, 페르시아 상인이 하나둘인 것도 아니다.
그냥 우연이 겹쳤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세계의 흐름에 공교로움이 겹치면 대부분이 필연으로 결정 난다.
‘두 이야기의 접점이 쉬엔과 묘아인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우선 가자. 저 빌어먹을 홍련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응. 나도 저 붉은 연꽃은 싫거든."
생각은 합류 후에.
명한이 붉은 해일의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
사방이 홍련으로 뒤덮여 있다.
이 말인즉슨, 마을을 벗어난 은소소 등도 홍련을 피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제한적인 방위에 제한적인 장소였다.
"소소, 향아."
"도련님!"
"무사했군."
얼마 지나지 않아 산 능선 부근에서 합류했다.
그나마 홍련이 미치지 않은 장소였다.
"정말로 저 괴물을 유인해서 살아왔잖아? 너, 보통이 아니군."
가장 놀란 건 쉬엔이었다.
주변을 맴돌며 명한 등을 관찰하긴 했지만, 홍련과 맞서서 살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홍련은 제거 불가능한 마물이니까.
"도움을 받았거든."
"묘아!"
"묘아잖아. 언제 온 거냐?"
명한의 뒤쪽에서 묘아가 휙 튀어나왔다.
"이월이 급하게 보냈거든. 세상에서 가장 걸음이 빠른 내가 달려왔다 이거지."
"이월이? 뭐라도 알아낸 거야?"
"나야 모르지. 소백에게 전부 건넸거든."
시선은 묘아에서 다시 명한으로 이어졌다.
"미리 조사해 둔 덕에 몇 가지 알아냈다. 쉬엔, 넌 꽤 오랫동안 홍련을 쫓았겠지?"
"응. 햇수로 7년. 홍련에 깃든 약효가 필요해서 사막을 가로지르며 찾아 헤맸어."
"홍련이라면 이미 자르고 남은 뿌리가 있는데."
"아니, 아니. 그런 파편으로는 안 돼. 홍련은 반드시 핵심적인 뿌리가 존재하거든. 이 땅 어딘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고 있을 거야."
"그게 홍련의 생명선이라 이거군."
고개를 끄덕이는 쉬엔.
평생의 소원인 ‘궁극의 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홍련의 진액이 필요했다.
"네가 홍련을 찾아 궁극의 약을 만들고자 하는 건……역시 어머니 때문이겠지?"
"어? 그, 그걸 네가 어떻게?"
"나는 꽤 여러 가지를 알고 있거든. 네 어머니는 상단과 함께 머무르고 있는 건가?"
"으, 응. 잠깐만. 진짜로 어떻게 아는 거야?"
"그런 게 있어."
답은 회피하며 명한이 잠시 생각했다.
뒤섞인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
최선의 방향을 선택해야 했다.
"묘아."
"응? 왜?"
"전대 신투가 네 출생을 언급할 때, 장소나 시기에 대해서 말 한 적 없어?"
"늙은이가? 딱히 뭐. 아, 지나가는 말로 비사트라고 말하기는 했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비사트 지역?"
반응한 건 쉬엔이었다.
"알아?"
"어, 어. 페르시아식 표현이고, 이곳의 말로는 남섬(南纖)이야.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작은 지방의 이름이지."
"그래? 늙은이는 날 거기서 찾았다고 했는데."
"와. 내가 태어난 곳도 거기야. 남섬, 비사트."
"헤에. 신기한 우연이네."
"그러게."
멀뚱멀뚱 쳐다보는 두 사람.
명한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묘아, 이월이 네게 전달한 정보가 있지 않아?"
"내 출생에 관한 거?"
"그래. 페르시아 상인이 남섬 지역에서 당한 일. 과거의 사건이지만 워낙 큰일이라 기록이 남아 있을 텐데?"
"응. 혈주갈(血冑蠍)의 혈사. 거대 전갈이 상인을 덮쳐서 대규모로 혈사가 일어난 일이 있다고 했어."
"어? 그거 내가 태어날 무렵의 일인데?"
"응?"
다시 한번 쉬엔과 묘아의 시선이 부딪쳤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건가? 쉬엔, 네가 태어나는 날 세상의 빛을 본 건 너 혼자만이 아니었다."
"무슨 소리야?"
"쌍둥이다. 한쪽은 어머니의 피를 짙게 이은, 다른 한 쪽은 아버지의 피를 짙게 이은. 너와 묘아는 같은 배에서 태어난 자매라 이거야."
"나, 나한테 자매가 있었다고?"
"쌍둥이?"
사건이 딱딱 맞아 떨어졌다.
혈주갑의 참사로 쌍둥이는 태어난 난 이별.
이 중 하나를 전대 신투가 데려가서 키운 것이다.
"정 확인하고 싶다면 어깨의 반점을 맞대 봐. 너희 둘을 임신하고 있을 때 혈주갈의 습격을 받은 탓에, 응혈이 나눠서 반점으로 자리잡혔을 테니까."
"마, 맞아! 나한테 붉은 반점이 있어."
"나돈데!?"
둘이 거의 동시에 웃옷을 끌러 어깨를 드러냈다.
그린 듯 맞춰지는 붉은 반점들.
둘은 홀린 듯 서로를 바라보다 와락 껴안았다.
"우아앙!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었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어!"
외모는 달라도 이런 성격은 비슷했다.
단순하다고 해야 할까.
의문을 품기보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였다.
두 사람은 볼을 문대며 꺼이꺼이 울었다.
단순하지만, 그만큼 격렬한 반응이었다.
"……자자, 그만큼 울었으면 이제 진정하자."
이 해후를 방해한 건 명한이었다.
"극적인 상봉이 감동적인 건 알겠지만, 우린 해야 할 일이 있어."
묘아에게서 받은 서신을 펼치는 명한.
그 안에는 수십, 수백 가지의 약재가 적혀 있었다.
"혈염마녀가 홍련을 배양하기 위해서 쓴 약재들이다. 대부분은 일반적인 자양효과를 지닌 것이지만, 하나는 아니야."
"……혈주갈의 피?"
"그래. 혈주갈이 지닌 극독 성분을 역으로 활성화해서 홍련의 성장을 가속했어. 이건……"
"오독문의 금기, 천주만독(千州滿毒). 반독(反毒)의 비기로 자신의 생명을 태워서 독을 쓰는 방식입니다."
마지막 말은 백약문주 위소홍이었다.
"알아보는군요."
"알다마다요. 오독문은 독곡의 뿌리. 그 지독함은 활자로 남겨 모든 백약문도가 경계하고 있습니다."
"천주만독의 끝은 무형독으로 이어지는 겁니까?"
"자신의 생명력을 녹여서 독을 키우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성장한 생명은 독을 피처럼 몸에 두르기 시작하죠. 만약 열매라도 맺게 된다면……그야말로 완전무결한 독이 될 겁니다."
진정한 무형독이다.
미쳐버린 혈염마녀가 하려는 짓은 궁곡이 없는 이 세상에 대한 저주.
지독한 원념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이 방법뿐이군요. 무형독이 완성되기 전에 이 효과를 역으로 해제해야 합니다."
"역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혈주갈의 반흔이 있는 자매의 도움으로."
명한의 시선이 쉬엔과 묘아로 향했다.
두 사람이 이런 시기에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된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시나리오는 마음에 안 들지만……’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껴서는 안 된다.
"반흔이 있다고 해도, 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 역할은 제가 맡죠."
"당신이? 무슨 수로?"
"뭐……그만한 능력이 있으면 가능하겠죠. 그러니, 백약문에 손 좀 벌립시다."
명한이 위소홍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약황비전. 씁시다."
백약문의 보물.
비장의 수였다.
#
위소홍도 상황이 다급함은 안다.
무형독이 완성되면 비전이고 뭐고 모두 다 죽게 될 거라는 것도 납득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곤란했다.
"약황비전은 백약문의 보물입니다. 그 가치는 둘째로 치더라도 하루 이틀에 익힐 물건이 아니오."
"지금 백약문에 약황비전을 익힌 사람은?"
"전무합니다. 워낙 까다롭고 어려운 무공인지라 제대로 연마할 사람이 없었지요."
약황비전은 하루 이틀에 뚝딱 익힐 물건이 아니다.
백약문에서도 익힌 자가 한 세대에 한 명 나오면 축복이라고 말할 정도.
외부인이 익히고 말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귀의가 백약문을 떠난 이후로 익힌 사람이 없다는 거군요."
"……귀의. 그가 아직도 신교에 있는 겁니까?"
"어쩌다 보니 제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약황비전 후반부를 익혀 백약문으로 돌아오는 것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고 있죠."
"감히. 약황비전을 필사하여 도망친 배신자가 어찌 그런 망발을 한단 말입니까!?"
"그건 좀 곡해가 있긴 한데, 지금은 중요한 내용이 아니고. 약황비전을 좀 빌려주시죠."
살짝 운만 떼어 놓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위소홍은 주저하며 선뜻 긍정하지 못했다.
"그리 걱정되신다면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끝내죠. 익힐 수 있는지, 아닌지는 그 정도면 충분하니."
"한 번 훑는 것으로 말입니까?"
"천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망설이던 위소홍이 짐에서 낡은 책을 꺼냈다.
겉으로 봐서는 평범한 의술서로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명한은 이를 넘겨받음과 동시에 이 물건이 ‘천상급’의 무공서임을 깨달았다.
"독곡의 만독비전과 쌍으로 존재하는 의술서의 최고봉. 명성만큼 엄청난 제약이네."
심, 기, 체의 높은 제약.
그리고 약을 익히기 위해 독을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존재하는 ‘오독경의 대성’이라는 조건.
백약문 내에서 독을 깊이 연구했던 귀의만이 이를 익힐 수 있었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치료도 조건을 걸고 하니……’
백약문의 지나친 폐쇄성이 독이 된 경우였다.
"습득, 약황비전."
어쨌든 명한은 모든 조건을 만족했다.
짧은 명령어와 함께 약황비전이 무공으로 등록됐다.
1성, 가장 기초이지만 핵심은 분명했다.
"확실히 백약문은 오독문에서 갈라져 나온 곳이 맞군요."
"……!?"
놀라는 위소홍의 뒤로 명한이 손을 뻗었다.
체내에 잠들어 있는 독기운이 오독경의 흐름을 타고 손 위로 맺혔다.
이 독기가 천폐독이라는 사실을 위소홍이 모를 리 없다.
"처, 천폐독!?"
"이래저래 오독경하고 인연이 닿아서 말이죠. 오독경이 근간이 되어 약황비전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독으로 약을 다루고, 약으로 독을 쓰는. 독과 약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죠."
손끝의 천폐독이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체내의 수많은 약성과 결부되어 독기를 제거하고 약으로 변한 것이다.
위소홍이 눈만 크게 깜빡였다.
"야, 약황비전의 능력 아닙니까?"
"아. 말하는 것이 늦었군요."
명한이 약황비전을 다시 위소홍에게 건네며 말했다.
"약황비전. 다 익혔습니다."
위소홍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