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235)

홍련의 악마

사천 남부, 작은 마을.

흑점의 분타에 이례적으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실세인 이월과 그녀가 부리는 정보원들이 전부 소집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서둘러서 태사님께 전해드려."

이유라면 확실했다.

장안성을 떠나서 남만 초입까지, 발품을 팔면서 알아낸 정보.

이를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나 혼자?"

"우리 중에서 너만큼 빠른 사람은 없잖아. 시간을 다투는 일이야. 최대한 빨리 태사님께 전해."

"응."

이를 받아든 건 신투, 묘아.

아미파까지 동행했던 그녀가 동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것도. 운이 좋다면 네가 찾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찾은 거야?"

"단편적이지만.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상인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어. 어쩌면 그 행상에 네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흑점에서 묘아의 출생에 대한 단서를 잡았기 때문.

긴급으로 보내온 전문에 묘아는 비선의 역할을 자칭하며 이월 쪽에 합류했었다.

"알았어. 최대한 빨리 물건을 전달하고, 행상에 대한 것도 한 번 따라가 볼게."

"부탁할게. 그리고 서둘러줘. 우리가 찾은 정보대로라면 태사님이 위험할지도 몰라."

"걱정하지 마. 이 세상에 나보다 빠른 사람은 없거든. 반드시 시간에 맞추겠어."

짐을 들쳐메며 자신 있는 표정을 짓는 묘아.

마차를 타고 족히 며칠은 걸리는 거리.

하지만 그녀는 이를 전력으로 하루 만에 독파할 생각이었다.

‘난 신투니까.’

그녀이기에 가능한 일.

바람과 함께 모습이 사라졌다.

#

명한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독곡 주변 상황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

독곡에서 얻어야 할 물건이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현 상황에 다른 이야기가 섞였다면, 명한의 이점도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죽을 수도 있다.

"도련님,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하죠?"

"저 넝쿨이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마을도 비슷한 상황일 텐데."

"전부 죽은 건 아니겠죠?"

"아니. 아직은 시간이 있을 거다."

문제는 그동안 의술을 펼쳤던 마을.

태반이 고까운 이들이지만, 개 중 몇은 살갑게 정 붙이기도 했다.

이들을 다 버리고 도망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해서, 남은 것이 두 번째 선택지.

"홍련을 돌파해서 마을 사람들부터 구한다."

"제정신이야? 저렇게 만개한 홍련을 무슨 수로 돌파하겠다고."

"그건 네가 도움을 줘야지. 홍련을 찾아서 왔다면, 그걸 제어할 방법도 알지 않겠어?"

그나마 있는 강점이 쉬엔.

궁극의 약을 찾는 여정에 홍련이 포함되어 있다면, 분명 강점과 약점에 대해서도 훤할 것이다.

"홍련은 피를 먹고 자라는 마물이야. 이 정도까지 성장하면 불이나 약으로도 억제가 안 돼. 더이상 먹을 것이 없어 말라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안 돼요! 이대로 두면 마을의 아이들도 저 홍련이라는 것에 당하고 말아요."

"에잇! 알아, 알아. 나도 안다고."

머리를 벅벅 긁는 쉬엔.

향아의 말을 그녀가 모를 리는 없었다.

해결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주변을 맴돌기도 했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

"방법이 있는 건가?"

"홍련은 군집체로 집단 지성을 약하게나마 가지고 있거든. 한 곳을 공격당하면 나머지가 뭉쳐서 이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어."

"유인하자는 거군."

"응. 날래고 강한 몇이 홍련을 공격하면 길이 열릴 거야. 그 사이에 나머지가 마을 사람들을 구해오는 거지."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

하지만 쉬엔이 이를 먼저 언급하지 않은 건 이유가 있었다.

"다만, 이 경우……유인하는 쪽은 홍련의 공세를 견뎌야 해. 사방 수십 리가 홍련으로 뒤덮여 있으니 그게 다 몰려온다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될 거라고 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거군."

"그래. 그럴 만큼의 가치가 있어?"

되묻는 쉬엔에 명한이 잠시 숨을 골랐다.

‘득실을 따지자면 물러나는 편이 나을지도.’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그가 소백이 아닌 명한이기 때문.

"본래는 이기적인 주인공을 선호하는데 말이지."

"네 오지랖이 하루 이틀은 아니잖아."

"도련님……"

소매를 걷고 타구봉을 쥐었다.

"유인은 내가 한다."

언제나 앞서 나가는 것은 주인공이었다.

#

홍련을 유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밖으로 나간 명한이 타구봉으로 넝쿨을 몇 줄기 잘라냈을 때.

놈들은 명한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달려들었다.

이를 천천히 한 쪽 방향으로 유도하기만 하면 됐다.

"이 정도 거리면 되려나."

그렇게 한쪽으로 유인하기를 몇 분.

주변은 이미 새빨간 홍련으로 뒤덮여 있었다.

뒤의 절벽도, 앞의 길도, 옆의 골짜기도.

모두 붉은색이었다.

"다른 글에서는 이 홍련이 세상을 뒤덮어서 멸망의 마인을 낳지. 그게 이쪽에서는 저거로 대체된 모양이네."

그리고 그 붉은색 너머에서 누군가 스물스물 다가왔다.

허벅지로부터 땅으로 이어진 넝쿨.

살아있는 홍련의 열매처럼 거대한 봉우리에 감싸져 있었다.

이미 사람과는 거리가 있었다.

"혈염마녀. 하다 하다 이런 꼴이로군."

"……소백. 소백. 저주받을 계집의 핏줄. 너로구나. 너야. 네가 이곳에 있었어."

"하. 정신줄도 완전히 놔 버렸네."

기형적인 모습에 어딘가 두서없는 말투였다.

어떤 독을 사용해서 홍련을 만개했든, 그게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궁곡이 죽었기 때문에.’

미쳐버린 모성은 그만큼 무서웠다.

"네가. 우리 아이를 죽였어."

"내가 알기로 궁곡은 사파 연합에 의해서 죽었는데?"

"거짓말. 내 아이. 내 아이는 강해. 고작 그런 버러지들 따위에 당하지 않아. 너. 네가 죽인 거야."

주렁주렁 넝쿨을 단 채 올라가는 혈염마녀의 손.

"네가……죽였어. 내 아이. 내 사랑스러운 아이를 네가 죽였어. 그 저주받을 계집과 마찬가지로. 내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갔어. 아……아아. 저주한다. 저주한다, 너희 핏줄을 저주한다!!"

그리고 그 손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넝쿨이 명한을 향해서 쏟아졌다.

넝쿨로 이루어진 해일이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하던가? 시비는 네놈들이 걸어놓고 이제 와서 누구한테 저주를 거는 거냐!?"

맞아줄 생각 따위는 없다.

명한이 타구봉을 날렵하게 휘둘러 넝쿨의 해일을 한쪽 방향으로 밀어냈다.

굉음과 함께 산길 한쪽이 무너졌다.

"전부 너희 모자 탓이다. 너희가 잘못이야. 너희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그분의 은총은 모두 내 것이었다. 내……내 아이도 죽지 않았어!!"

이번에는 수십 갈래로 나뉘어 쏟아지는 넝쿨의 창.

그 방위와 속도가 고수 여럿의 합공과 같았다.

명한도 이건 쉬이 대응할 수 없어 거리를 벌리며 타구봉을 휘둘렀다.

한 타, 한 타 부딪칠 때마다 철로 된 봉을 때리는 기분이었다.

"죽어버려!!"

갈라진 넝쿨 몇 개가 뭉쳐서 기둥처럼 횡을 갈랐다.

명한이 공중으로 뛰어 타격을 피했지만, 그곳에는 이미 비슷한 규격의 넝쿨이 존재했다.

사방에서 그를 짓눌렀다.

"징징대지 마, 혈염마녀!"

하지만 명한에게는 반야신공이 있었다.

기운이 그물처럼 단단하게 엉겨서는 모든 방위의 공격을 일제히 튕겨냈다.

넝쿨이 단말부터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금색으로 빛내는 타구봉이 핑그르 돌아 명한의 손아귀에 착 들어왔다.

"먼 타국에서 납치되듯 시집온 어머니를 괴롭힌 것이 누구지? 애먼 질투심에 독을 먹인 건 대체 누구야? 시종일관 공세를 취해놓고 반격 좀 당했다고 징징거리지 마!"

"닥쳐!! 닥쳐!!!"

드드드득.

땅이 거칠게 울리고 어마어마한 숫자의 넝쿨이 치솟았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생명처럼 명한을 노렸다.

타구봉으로 치고 내공으로 찢어도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감당되지 않는 숫자였다.

"좋다! 오늘 여기서 끝을 보자!"

명한도 눌러 두었던 극천일무기의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묵혼공과 뒤섞였으나 아직 잠재워지지 않은 광기가 노도처럼 밀고 올라왔다.

시야가 붉어지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입안을 맴돌았다.

‘반각. 그 이상은 무리다.’

아직은 다룰 수 있는 시간이 제한적이었다.

"네놈의 뼈와 피를 갈아서 내 아이를 공양하겠다!"

"개소리는 적당히! 나야말로 네년의 목을 뽑아서 어머니 무덤에 올리겠다!"

사방, 모든 공간에서 쏟아지는 넝쿨의 창.

하나하나가 강철과 같은 강도를 지닌, 고수의 일격이었다.

꾸욱.

하지만 명한은 이를 피하지 않았다.

몸 안의 극천일무기를 한 곳으로 응집.

타구봉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선을 만들었다.

이건 극천일무기 기운 속에 잠들어 있는 형(形).

[극천일무기 - 절(絶)]

하나로 이어진 선이 공간을 단절했다.

빛조차 들어오지 않을 빼곡했던 넝쿨의 해일이 한 줄기 선으로 양분되어 버렸다.

강철과 같던 강도도 지독한 생명력도 통하지 않았다.

극천일무기의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서는 그저 잡초에 불과했다.

"네, 네놈이 어떻게 선대의 무공을!?"

"천마가 어머니를 많이 아꼈거든. 몰래 전수해 줬지."

"뭐!? 진짜냐!?"

"당연히 거짓말이지, 이 모자란 년아!"

불처럼 달궈진 타구봉을 손에 쥐어 앞으로 찔렀다.

점에서 점으로.

선이 구축되어 그대로 혈염마녀의 복부를 뚫었다.

수십, 수백 겹의 넝쿨로도 막을 수 없었다.

"끄……끄아아아! 이 저주받을 계집의 핏줄!!"

하지만 주먹만 한 구멍이 배에 났음에도 혈염마녀는 죽지 않았다.

‘생명이 홍련에 연결되어 있어.’

반야로 보이는 어지러운 선들의 연결.

단순히 눈앞의 형체를 박살 낸다고 혈염마녀가 죽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되레 공세는 더욱 거칠어졌다.

수십, 수백의 넝쿨이 끝도 없이 날아왔다.

명한이 쳐내고, 잘라내고 끊어도 반복해서 덤볐다.

광범위한 공격으로 덩어리째 박살 내도 숫자에는 한계가 없었다.

무한하게 살아나는 괴물, 그 자체였다.

"……조금 위험한가."

사용하는 극천일무기는 고작 1성.

하지만 그 이상 끌어내기에는 아직 불안정했다.

밖의 위험과 안의 위험 사이에서 명한이 갈등했다.

유지 시간을 생각하면 고민할 시간조차 적었다.

"소백―!!"

그 순간이었다.

넝쿨의 벽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길을 열어!"

다름 아닌 묘아의 것이었다.

그녀가 이곳까지 어떻게, 라는 의문은 넣어 두었다.

곧바로 타구봉에 진기를 담아 앞으로 내밀었다.

절(絶)의 힘이 넝쿨의 벽을 좌우로 끊어냈다.

"쌍아야!"

그리고 그사이에 쌍각사가 고개를 내밀고 거대한 뇌우를 몰아쳤다.

틈을 메우려던 넝쿨들이 단번에 재가 됐다.

사람 두엇은 통과하고도 남을 길이 열렸다.

"안 돼!!! 갈 수 없다!!"

"질척대지 마."

혈염마녀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잡혀줄 이유가 없다.

명한이 벌어진 틈으로 몸을 날려서 사라졌다.

"소――백!!!"

찢어질 듯한 고성만이 그 뒤를 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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