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235)

다시 한번 섞인 이야기

명한 일행은 산 정상에서 백약문 무리를 만났다.

다들 겁에 질린 듯, 눈빛이 퀭하고 어두웠다.

약과 독을 다루는 이들인 만큼 ‘무형독’이라는 단어가 배는 무겁게 다가온 탓이었다.

"이쪽이오. 여기 장문인께서 머무르고 있소."

임시로 설치한 천막이었다.

안내를 받은 명한 일행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스슥. 슥.

좌우에서 날카롭게 다가오는 검날.

"그만. 손님께 무례를 보이지 마라."

상석에 앉은 한 노인의 제지에 검은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이곳, 백약문의 주인.

백약문주, 위소홍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예를 차리지 못하는 점, 용서 바랍니다."

"괘념치 마시길. 올라오는 길에 백약문의 상황은 전해 들었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이군요."

위소홍은 자신의 앞자리, 빈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정중함은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위 장문인. 우리가 누구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백약문이 속세와 거리를 두고 살지만, 신교의 용과 봉황을 몰라볼 정도는 아닙니다. 소 공자, 은 낭자. 그리고 향 낭자 아니십니까."

"확실히 눈과 귀는 열어두고 사셨군요."

"여러분들이 아미파에 방문했을 때부터,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지만 않았어도 제대로 초대를 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말은 둘러서 하지만, 사실상 경계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백약문은 정마지간의 문파이나 정 쪽에 더 가깝다.

"뭐······서로의 신분이나 세력은 잠시 넣어두고 이야기를 해 보죠.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소 공자께서도 독곡의 혈염마녀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계시겠죠?"

"알다마다요. 그쪽과는 못 죽여 안달인 사이라."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그 혈염마녀가 금기에 손을 댔습니다."

슥. 위소홍이 자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붉은빛으로 변색 된 깡 마른 팔이 나타났다.

어딘가 생기가 없는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흡정대법(吸精大法). 생기를 빨아들이는 사악한 마공입니다."

"그 늙은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흡정대법은 신교에서도 금지한 무공입니다. 신분이 아무리 높아도 그런 미친 짓은 쉽게 할 리가 없을 텐데······"

"미쳤으니 가능한 일입니다."

"네?"

"그녀의 아들, 궁곡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소문에는 사파 연합의 습격이라고 하나, 이를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식을 전해 들은 혈염마녀는 완전히 이성을 놓아 버렸습니다."

명한이 볼을 긁적였다.

"그럼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흡정대법이라는 건가요?"

"흡정대법이 사악한 마공임은 맞지만, 그 하나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습니다. 혈염마녀는 흡정대법을 시작으로 무형독을 제조하고 있습니다."

"무형독. 다른 분도 그리 말하던데. 진짜입니까?"

"완벽하지는 않지만, 사실입니다. 모든 독곡의 무인들을 제물로 삼아, 무형독을 만들고 있지요."

"제물? 전부 죽여서?"

"네. 남만 오지에서 자양하는 흡적련(吸赤蓮)을 사용해서 인간을 퇴비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명한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생겼다.

흡정대법, 흡적련.

모두 설정에서 잡아둔 것들이기는 하다.

‘이것들이 모여서 무형독을 만들 수 있다?’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막을 방법은 있습니까?"

"독의 여파를 겨우 벗어나 상쇄의 법을 궁구하기는 했습니다. 다만, 성질이 패악하고 그 전염이 워낙 빠른 터라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하나 건진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독을 독으로 제압하는 이독제독의 방식입니다."

"이독제독이라. 허면, 청사독도 위 문주님이 사용하신 건가요?"

"청사독?"

"아닙니까?"

되레 이상하다는 듯 보는 위소홍.

명한의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산 아래 마을에 역병이 퍼지고 있습니다. 개중 몇에 청사독의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지요. 처음에는 무형독의 증상인가 싶었는데······"

"잠깐. 청사독이라. 지금의 무형독의 성질을 고려하면 청사독의 독성이 어쩌면 중화제의 역할을 할지도······"

"음?"

"환자를 제가 직접 봐야겠습니다."

뭔가 감을 잡은 듯 보이는 위소홍.

"환자라면 모두 마을에 모여있습니다. 하지만 독곡의 상황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곳도 이미 무형독의 영역. 내려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어차피 독이 완성되면 모두가 죽습니다. 백약문의 장문이 되어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요."

"······좋습니다."

명한도 맞장구를 치며 일어났다.

혈염마녀가 미쳐서 날뛰게 된 건 궁곡의 죽음 때문.

인과를 따지자면, 결국 자신의 행동이 불러온 결과였다.

손 떼고 방관할 수는 없었다.

"독이 우리를 잡아먹기 전에. 먼저 독을 잡으러 갑시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

"젠장. 신선은 무슨 신선."

마을의 남자 하나가 잇소리를 내며 울타리를 넘었다.

마을 전체에 퍼진 역병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원인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을 처리하고 싶지만, 그것도 허울 좋은 이들에게 막힌 상황.

이젠 고향을 버리고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빌어먹을 모자부터 처리하면 되는 것을. 다들 물러터져서는. 대체 뭐가 신선이라는 거냐? 무림인 놈들이 장난질 치는 거지."

분이 풀리지 않아 혼잣말로 이리저리 찧어댔다.

마을에서만 평생을 산 다른 놈들과는 달리, 자신은 큰 도시에도 다녀온 몸.

신선 같은 기괴한 말 따위는 믿지 않는다.

"흥, 됐어. 어차피 모자란 놈들. 마을에 박혀서 다 같이 역병으로 죽든가. 몇 놈 뒈지면 물건이나 챙길까 했는데 이래서야 내가 먼저 죽겠어."

욕심 때문에 버텼지만, 그것도 한계.

마을에 미련을 버리고 그대로 야반도주했다.

겸사겸사 죽은 사람 집에서 몇 푼 훔쳐왔지만, 알 바 아니었다.

"도시로 가서 계집들 엉덩이나 두드리며 풀어야지. 영 찝찝해서······응?"

그렇게 마을 인근 숲을 얼마나 걸었을까.

묘하게 반짝이는 풀잎들을 발견했다.

주변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색이었다.

‘이거 좀 돈이 되려나?’

행운일까 싶어 성큼 다가갔다.

"어?"

그리고 그 풀잎 너머의 광경을 발견했다.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숲의 반신이었다.

누군가 염료로 찍어서 색을 칠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붉었다.

‘어······’ 이게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남자도 알았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으억!"

하지만 몇 걸음 가기도 전.

바닥에서 넝쿨이 올라와 그의 발목을 휘감았다.

챙겨온 칼로 마구 찍었지만, 잘리는 숫자보다 타고 오는 숫자가 훨씬 많았다.

순식간에 전신이 넝쿨에 휘감겼다.

"끄······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힘으로 조여대는 넝쿨.

남자는 이내, 새빨간 핏물이 되어 넝쿨과 함께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울리던 비명도 남자의 형체도.

모두 사라져 붉은색에 파묻혔다.

마을에서 한 시진 거리.

붉은색이 점차 가까워져 갔다.

#

백화곡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목.

명한 일행은 최대한 짧은 동선으로 최단시간 주파를 도전했다.

독이 퍼지고 있다면 시간이 관건.

청사독에 걸렸던 이들을 위소홍이 봐야 했다.

"······이건 또 뭐야."

하지만 그 길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산길을 전부 덮고 있는 붉은 색의 넝쿨들.

하나하나 굵기가 대단하고 틈이 안 보일 정도로 밀도가 높았다.

자르고 지나가다가는 며칠이 걸려도 부족할 정도.

"돌아가는 길은 없습니까?"

"사람이 다닐만한 길은 마땅히 없습니다. 어떻게 험지를 오른다 해도, 그곳도 이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고."

상황이 마뜩잖았다.

명한이 인상을 팍 구긴 채 넝쿨 쪽으로 다가갔다.

‘무공으로 전부 태우면서 갈 수는 없을까?’

마지막으로 낼 수 있는 수단이었다.

휘리릭―!

"!?"

그 순간.

인근 거리의 넝쿨이 채찍처럼 움직여서 명한의 손목을 휘감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이건 독?’

피부로 느껴지는 자극은 단순한 찰과상이 아니었다.

"도련님, 위험해요!"

게다가 넝쿨 역시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의 넝쿨이 일제히 풀려나와 명한을 사방에서 공격했다.

그 숫자와 위세가 어마어마했다.

"네놈들이 이번 일의 원흉이라 이거구나."

하지만 명한은 어중간한 사람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타구봉을 뽑아 사방에서 달려드는 넝쿨을 모조리 쳐냈다.

붉은색이 폭죽마냥 허공에서 터졌다.

‘이 넝쿨. 하나하나가 전부 이어져 있어.’

반야의 눈으로 본 생명의 근원이었다.

부수기에는 멀고 잘라내기에는 수가 많았다.

가볍게 혀를 차고 타구봉을 돌려 내기를 집중시켰다.

퍼엉―!!!

막강한 내공에서 뿜어져 나온 일격.

뭉쳐있는 넝쿨 중간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잠시나마 그 너머의 모습이 보일 정도.

스스스슥. 스슥.

하지만 이내, 다른 넝쿨이 몰려와 그 공백을 채웠다.

"소백,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

"알아. 이 식물을 움직이는 근원을 찾아서 제거해야 해. 향아야, 뭐가 보이지?"

"거, 거대한 붉은 색이요. 너무 크고 요란해서 하나로 짚어서 말하기 어려워요."

"네 눈에 그럴 정도면 이 상태로는 무리라는 거네."

보고 싶은 걸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적어도 숫자를 줄이거나 거리가 가까워져야 식별이 가능하다는 의미.

‘극천일무기를 사용할까?’

그 파괴적인 힘이라면 밀고 들어가는 건 가능하다.

다만, 제어에 있어서 아직은 불안정한 것이 사실.

미묘한 망설임이 손을 무겁게 했다.

"이쪽으로 와!!"

그때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이 내려온 백화곡과 마을 사이의 골짜기였다.

사람이 왕래하기에는 버거운, 그런 공간이었다.

"어서! 저것들을 제거하고 싶다면 내 쪽으로 와!"

"······"

잠시의 갈등.

"가자."

하지만 선택에 따른 행동은 순식간이었다.

명한 일행이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서 달렸다.

#

낭떠러지 아래쪽으로 인위적으로 파 놓은 길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보이는 넓은 공간.

인공 굴의 모습이었다.

"후우. 무모했다고, 너희. 그 연꽃과 싸우다니 제정신이 아닌가 본데?"

어둠 속에서 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깊이 내려쓴 후드와 몸 전체를 뒤덮은 피풍의가 동굴의 그림자 만큼이나 짙었다.

어지간히도 정체를 가리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넌 누구지?"

명한이 한 걸음 바짝 다가가 물었다.

도움을 받은 건 받은 거고, 정체 모를 사람에게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그런 태도냐?"

"굳이 도움은 필요 없었지만,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해 주지. 하지만 낯선 사람을 환영할 상황은 아니라서. 얼굴을 보이든가, 아니면 이 정도에서 갈라지자."

"하. 너도 어지간히 꽉 막힌 성격이다."

선 긋는 명한의 답에 낯선 이가 모습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어 던졌다.

한 걸음, 동굴의 그림자 밖으로 나서면서.

"······"

그 모습은 갈색 피부에 푸른 눈.

이국적인 면모가 가득한 소녀였다.

하지만 명한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녀를 계속 바라보기만 하는 건 단지 이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쉬엔?"

"날 알아?"

쉬엔.

명한이 쓰다 그만둔 여러 습작 중 하나의 주인공.

페르시아와 중원의 혼혈로 ‘궁극의 약’을 찾아서 헤매는 떠돌이가 컨셉이었다.

‘쉬엔이 왜 이곳에?’

분명 습작에 다른 글이 개입한 정황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설정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도구.

지금처럼 인물 자체가 통째로 등장한 적은 없었다.

"설마, 홍련(紅蓮)의 씨앗을 찾아서 온 건 아니겠지?"

"오! 홍련도 알고 있군. 역시, 지켜본 대로 의학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어."

"맙소사. 진짜로 섞였어."

이게 사실이라면 혈염마녀가 사용하고 있는 연꽃은 흡적련이 아니다.

홍련. 정확하게는 무화홍련(無華紅蓮).

사람의 피와 살점을 탐하는 지독한 마물이다.

그리고 이 마물이 열매를 맺으면······

‘세상에 종말이 찾아오지.’

쓰다 만 습작의 최종 보스.

"와도 하필이면······"

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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