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염의 시
한고비 넘겼지만, 시간 벌이에 불과했다.
역병이 다시 기승을 부리면 불신의 손가락질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 명한이 제일 잘 알았다.
"병과 독에 재주 있는 사람을 좀 빌려야겠어."
"이런 변경지역에서?"
"귀의 때문이라도 좀 미룰까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수를 아끼는 건 아닌 거 같다."
명한은 흑점의 비선을 사용해서 몇 가지 정보를 청구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기 때문에 외부의 손이 필요했다.
그리고 조금 전, 인편을 통해 소식을 받았다.
"반나절 거리에 백화곡이 있어."
"백화곡?"
"백약문의 거처. 독곡과는 같은 뿌리를 둔 거울상 같은 집단이지. 병과 독에 관해서는 중원 제일일 거야."
현 상황에 대응하기에는 최선의 인력이다.
‘다만, 이 인간들이 엄청 폐쇄적이라는 건데.’
산지에 처박혀 약만 연구하는 신선과 같은 인간들.
치료도 자신들 기준에 맞지 않으면 외면할 정도로 아주 외골수다.
본래라면 약황비전을 복원한 뒤 귀의와 함께 방문할 계획이었다.
"직접 갈 생각이야?"
"어쩌겠어. 이대로 내버려 두다가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무너지게 생겼는데."
"그런 꼴을 봤는데도?"
"무지함에 죄를 매기자면 이 땅에 남아날 사람이 없을 거야. 잘난 게 죄라고, 사서 고생하는 수밖에."
"이상한 잘난 척이네."
명한이 가볍게 웃으며 짐을 챙겼다.
거리로는 반나절.
백화곡 나들이였다.
#
흑점에서 건네받은 지도에 적힌 장소.
명한은 그 점 위에 발을 올린 채 주변을 바라봤다.
"여기가 맞는 건가?"
산턱을 깎아 만든 너른 공간에 흩어진 파편들.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만, 정작 거주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서둘러 떠난 흔적이다. 봐봐, 끌린 자국이 여럿이야."
"백약문의 사람들이 갑자기 떠나야 할 일이라."
"기습이라도 받은 걸까?"
"아니. 기습이면 피나 검흔 따위가 있어야지. 이건 너무 평화로워. 서두른 것을 제외하면 탈 없이 떠난 모양새야."
명한이 한쪽 무릎을 꿇고 흔적을 더듬었다.
은소소의 말대로 끌린 자국은 여럿.
급히 짐을 챙겨서 도망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정 거리에서 흔적은 모두 사라졌어.’
파인 자국은 중턱 너머에서 전부 지워졌다.
이질적인 단절이었다.
"누가 따로 흔적을 덮은 건가?"
"아니. 이건 진법의 영향이다."
명한이 주변 공간을 눈으로 훑으며 뒤로 손짓했다.
향아가 쪼르르 다가와 손으로 가리키는 위치를 눈으로 확인했다.
그녀의 눈은 진실을 꿰뚫는 힘.
정상적으로 보이는 경관 사이로 이질감이 있었다.
손으로 그 지점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여기랑 여기요."
"흠. 아직은 내 눈보다는 네 눈이 좋은 모양이다."
"헤헤, 도움이 되다니 기뻐요."
명한이 타구봉을 꺼내, 향아가 가리킨 위치를 강하게 찔렀다.
펑, 소리와 함께 공간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리저리 뒤섞여 진실을 가리던 장막이 사라진 것이다.
"정말로 진법이었군. 백약문의 것인가?"
"아마도. 추적이 두려워 급하게 설치했던 모양이야."
"급하게 설치한 진법이 이 정도 수준이라. 확실히 보통 집단은 아니네."
"나름 재주는 있는 거지."
명한이 가볍게 응대하며 새롭게 나타난 흔적을 더듬었다.
"이쪽이다. 오래된 흔적은 아니야."
길어봐야 하루 이틀.
명한이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
흔적은 산 정상으로 이어져 있었다.
덮거나 가릴 여력이 없었는지 점차 뚜렷해졌다.
그나마 잡혀 있던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대체 뭐에 쫓기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추격자가 있었다면, 피가 남아 있어야 정상.
하지만 백약문 무리는 자신들의 흔적만 깊이 남기면서 계속 도망치고 있었다.
"급하게 옮겨야 할 사람이라도 있었나?"
"그랬다면 무리가 나뉘었겠지. 흔적을 봐. 아주 중구난방이야. 다들 뭔가에 겁을 먹고 도망치고 있었어."
"근데, 싸움의 흔적은 없다 이거지?"
"응. 그러니 이해를 못 하겠어. 대체 뭐에 쫓긴 거지?"
"글쎄. 어쩌면······"
은소소가 말을 이으려는 찰나.
명한과 그녀가 거의 동시에 좌우로 흩어졌다.
거리를 삭제하며 날아온 한 자루의 검 때문이었다.
바닥에 깊이 박혀 파르르 떨렸다.
"결국, 이곳까지 쫓아 왔구나! 문주님은 내어줄 수 없다!"
"······?"
검의 주인은 백의의 남자.
흙먼지로 좀 더러워져 있기는 하지만, 정갈한 자태였다.
지금껏 추적하던 백약문의 문도.
이 사실에 큰 이견은 없었다.
"우린 그쪽에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소."
"거짓말! 우리가 네놈들의 속셈을 모를 줄 알고!? 내 한목숨 이곳에서 사그라지더라도 문주님께 가게 할 수는 없다!"
문제라면 이 태도.
남자는 비장하게 외치며 명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목숨을 등외시한 공격 일변도의 초식.
스스로 말 한대로 목숨을 바치겠다는 태도였다.
‘일단 제압하자.’ 말로는 설득이 안 될 것 같았다.
명한이 타구봉을 뽑아 남자의 초식을 걷어내고 허리와 다리를 쳐서 마비시켰다.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 정도로는 막을 수 없다!!"
"점혈을 풀어?"
하지만 남자는 점혈을 스스로 풀며 일어났다.
내공의 압도적인 우위나 특별한 무공이 아니라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원진기를 태우고 있군."
명한은 이내, 그 이유를 알아냈다.
남자의 충혈된 눈과 지독하게 팽창한 기운.
모두 생명을 불태울 때 나타나는 증거였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진원진기를 다 태우고 죽는다.’
바라는 결과가 아니었다.
"소소, 잠깐만 시선을 끌어 줘."
"응!"
은소소가 남자의 주변을 끌 때.
명한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다루기 힘든 거칠고 매서운 기운을 뽑아 올렸다.
극천일무기.
맹수가 깨어나듯 흉포한 기운이 온몸을 맴돌았다.
‘진정해. 피를 볼 상황은 아니라고.’
고삐를 쥐고 기운을 다스려서 순환시켰다.
"됐어, 소소."
그리고 이 기운이 안정화 되는 순간.
전광석화와 같은 일격으로 남자의 심장을 꿰뚫었다.
실체가 아닌 허상.
반야로 관조한 생명의 근원이었다.
불처럼 타오르던 진원진기가 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한 번에 푹 꺼졌다.
"허, 허억!"
동시에 남자도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자, 이제 대화 좀 합시다."
쿵. 그 앞에 타구봉을 내려찍는 명한.
거칠고 사나운 짐승의 눈매를 하고 있었다.
#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조금 황당했다.
"무형독(無形毒)?"
전설처럼 내려오는 독 중의 독.
형체도 없고 냄새나 구별법이 존재하지 않아 막을 방법이 없는 완벽한 독이었다.
백약문이 황급히 피신한 건 이 독을 피해서였다.
적어도 남자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무형독은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는 독 아닌가?"
"우리도 한때는 그리 생각했소. 하지만 독곡에서 이상한 기류가 흘러 이를 확인하러 갔을 때······"
"독곡? 독곡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
"단순히 문제 정도가 아니오. 독곡의 일원들이 전멸했소이다."
"전멸!?"
명한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전혀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독곡은 혈염마녀의 근간.
습작의 이야기 후반까지도 주인공 소백을 괴롭히는 집단 중 하나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독곡이 그렇게 됐다는 거지?"
"무형독. 장문인께서는 독곡의 참변이 무형독의 여파라고 말했소. 형체도 없고 해독도 불가능한 완전무결한 독. 백약문 역시 이를 피해 황급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오. 그러다 댁들을 만난 것이고."
"우리가 독을 썼다고 생각한 건가?"
"설치해둔 진까지 파훼하며 쫓을 사람이라면 독의 주인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
"······잠깐. 혹시 그 무형독이라는 거. 여파만으로 역병을 일으킬 수도 있나?"
남자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 돌아왔다.
"역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무형독의 영역에 들어왔다면 무엇이든 가능하오. 사람마다 체질마다 저항력은 전부 다를 터. 제각각의 형태로 나타나겠지."
"청사독은? 산 아래에 역병이 도는 마을이 있었다. 일부에게서 청사독의 증상이 나타나던데."
"청사독? 어째서 청사독이?"
"무형독과 관계가 없다는 건가?"
"확실히 청사독이 맞소? 무형독의 영향으로 역병을 착각하는 건 쉬우나, 청사독은 비교적 증상이 뚜렷한데."
애초에 착각이 불가능하다.
이미 상태창으로 청사독의 중독을 확인했었으니까.
‘무형독 때문에 역병이 나타난 건 맞지만, 청사독은 별개의 것이라는 건가?’
명한의 눈빛이 심중하게 가라앉았다.
"일단, 가자. 현 상황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있으니까."
"······알겠소."
이번에는 남자도 수긍했다.
#
붉은 연꽃이 빼곡하게 피었다.
발 디딜 틈 없이 세상이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사박. 사박.
그 위로 가벼운 발걸음이 이어졌다.
"여기에도 없구나."
흘러나오는 목소리.
연꽃을 밟고 걸어가는 한 여성의 것이었다.
그녀는 흔들흔들 어딘가 위태로운 모습으로 걸었다.
취한 듯, 아픈 듯 기묘한 모습이었다.
"끄······으으으."
그리고 그 너머.
붉은 연꽃 아래에서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흔들흔들 걷던 여인이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돌렸다.
몇 겹이나 겹쳐져 쌓인 연꽃 사이.
뭉개진 얼굴의 한 남성이 손을 뻗고 있었다.
"넌 아니구나. 왜 살아있지?"
"끄으으윽. 끄윽. 어, 어째서? 끄윽."
힘겹게 말을 뱉으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 전체에 연꽃의 뿌리가 엉겨 붙어서 생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숨을 한 마디 뱉을 때마다 주름이 깊어지고 흰머리가 늘어났다.
"어째서? 어째서. 그래, 어째서. 너흰 어째서 그 아이를 지키지 못했지?"
"끄으으윽. 우, 우리 잘못이 아니야. 우리에게 왜 이러는 거냐!?"
"아니야. 너희 잘못이야. 그 아이가 죽은 건 전부 너희 잘못이야. 그래서 다 죽는 거야. 모두 죽여서 그 아이 무덤에 장식으로 쓸 거거든."
"미······친! 끄윽! 끅! 네년은 미쳤어! 어떻게 나고 자란 문파를······! 끄아아아!!!"
남자의 몸이 순식간에 뒤틀렸다.
몸 안으로 파고든 연꽃의 뿌리가 장기를 싹 다 갈아버렸기 때문이다.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걱정하지 마. 이건 겨우 시작일 뿐이야. 모두 죽여버릴 테니까. 그 아이를 앗아간 이 빌어먹을 세상을 싹 다 죽여서 텃밭에 비료로 삼아줄게."
"꺼으으윽!"
"이제 그만 잠들어. 우리 아이 무덤에 환한 꽃이 되어주렴."
"끄······"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연꽃 뿌리는 남자의 시체를 바닥으로 당겨 꽃 아래로 가려버렸다.
"하아. 기다리렴, 우리 아가. 어미가 반드시 네 핏값을 받아내고 말 테니까."
그 위로 몸을 뉘며 흐느끼는 여성.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안개가 걷히고 붉은 연꽃 무리 너머의 모습이 잠깐이나마 드러났다.
그건······지옥도.
수십, 수백의 시체가 뿌리에 엉킨 채 연꽃 아래에 갈린 참혹한 모습이었다.
"이 어미의 이름. 혈염으로 맹세한단다."
혈염.
미쳐버린 마녀의 맹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