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235)

신선이오

명한은 아이를 차분하게 진찰했다.

높은 열과 피부 발진은 역병의 증세와 일치.

하지만 혀 안쪽이 푸르고 손끝에 반점이 생기는 건 전혀 다른 증상이었다.

"어때?"

"독이야."

상태창으로 확인한 ‘청사독’의 증거였다.

"무슨 독인데? 해독할 수 있겠어?"

"청사독이라고 그리 치명적이진 않아. 챙겨온 약 중에 중화할 물건이 있으니 어렵진 않을 거야."

"하아, 다행이다. 근처에 서식하는 뱀에라도 물린 건가?"

"뱀은 아닐 거야. 직접 물려서 독이 퍼진 거라면 이미 죽어야 했거든."

"뭐? 그럼?"

아이 몸에 상처는 없다.

환부가 아닌 흡수나 특수한 방식으로 독에 노출됐다는 의미.

즉, 사고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군가 이 아이를 중독시킨 거다."

"하!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 대체 어떤 쓰레기가 이런 아이에게 독을 쓰는 거냐!?"

으드득. 은소소의 이가 부러질 듯 마찰했다.

목숨을 내놓고 활동하는 무림인이라도 아이를 건드리는 건 금기와 같았다.

"그게 조금 이상해."

"뭐가? 뭐가 또 이상한데?"

"이렇게 어린아이를 아이 엄마가 방치하고 돌아다닐 것 같진 않단 말이야. 근데, 중독 증상을 보인 건 아이뿐이지. 이상하지 않아?"

"······설마 아이 엄마가?"

"아니. 그건 아니야. 그 당황한 모습이 연기일 수는 없지."

상태창으로 사고도 확인했었다.

아이 모친은 정말로 아이의 상태를 걱정했다.

"그럼 뭐야. 아이는 중독되고 어머니를 멀쩡했다는 건가?"

"······아. 단순히 면역력의 차이일 수도 있겠네."

"면역력?"

"독에 저항하는 능력. 아이보다야 어른 쪽이 더 강하니까. 천천히 독에 노출 시켰을 때, 약한 사람부터 증상을 보이는 거야."

매우 느리고 조심스러운 방식.

독의 위력을 중시하는 중원의 독공과는 결이 달랐다.

‘습작에서는 없던 내용인데.’

명한으로서도 섣불리 추측하기 어려웠다.

"일단, 이 아이부터 치료하고 생각하자. 이 마을 상황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의원 명한.

명찰을 떼기는 아직 일렀다.

#

며칠간 시간을 두며 마을 사람들을 진찰했다.

아이와 비슷한 증상이 두어 명 더 발견됐다.

전부 청사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전부 다른 나이, 다른 체격, 다른 환경."

공통점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야. 이번에도 외부인과 접촉한 적이 없데. 항상 마시던 걸 마시고 먹던 걸 먹었다나 봐."

중독 원인도 마찬가지.

모든 경우를 다 조사해 봐도 특이점이 없었다.

증상이 나온 뒤 찾아보면 그제 서야 청사독임을 알아차릴 뿐이었다.

"소백, 이거 영 마음에 안 든다. 독을 이런 식으로 쓰는 경우는 본 적이 없어."

"마찬가지야. 단순히 마을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다면 훨씬 더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어. 이건 어딘가 괴상해."

"근처가 독곡이잖아. 독곡의 소행 아닐까?"

"본래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겠지만······"

명한이 알고 있는 습작의 흐름과 너무 달랐다.

본래라면 독곡을 방문한 혈염마녀가 후계싸움을 위해 궁곡에게 쓸 비전의 약물을 준비하고 있을 터.

이 과정에서 발생한 독무가 주변 마을을 뒤덮어서 엄청난 혈사가 일어난다.

‘궁곡이 죽어서 혈염마녀가 이를 포기했어도······’

이런 은밀한 독의 전파는 이상했다.

"도, 도련님! 도련님! 큰일 났어요!"

그때였다.

향아가 황급히 문을 밀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응?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마을 남쪽에 있는 호씨네 일가가 전부 병에 걸려서 몸져누웠어요. 다들 이건 역병이라고······"

"역병이라고?"

"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문제가 아니면? 더 큰 일이라도 있다는 거냐?"

"네, 네!"

향아가 헐떡이던 숨을 겨우 고르고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독에 중독됐던 사람들이요. 그 사람들 때문에 역병이 퍼진다고 지금 칼 들고 모이고 있어요. 분위기가 얼마나 흉흉한지 사람 몇은 죽일 기세에요."

"······하. 이 무지한 인간들이."

"어,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 멍청한 인간들이 사고 치기 전에 수습해야지. 안 그래도 흉흉한 마을에서 살인이라도 일어나 봐. 이건 수습이 안 돼."

한 번 손가락질을 시작하면 끝도 없다.

마녀사냥 같은 무지몽매한 일도 이곳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터.

상황이 그런 식으로 개판 나면 잡을 범인도 못 잡는다.

"향아, 소소. 환자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알고 있지? 가서 헛짓 못 하게 막아."

"도련님은요?"

"의원으로는 상황이 마무리 안 될 거 같으니, 좀 더 과격한 수를 써야지."

지켜만 보는 수준으로는 안 될 거 같다.

명한이 적극적인 수를 꺼내 들었다.

#

수십의 사람과 한 모자였다.

명한의 눈에도 익숙한 이들이었다.

다들 한 번쯤은 명한의 진료실을 방문했던 이들이니까.

"당장 이 마을에서 나가! 너희 모자 때문에 이 빌어먹을 역병이 퍼지고 있는 거라고!"

"우, 우린 아니에요! 의원님도 독은 다 치료했다고 했어요!"

"시끄러워! 독인지 뭔지 하여튼 너희가 앓고 난 뒤에 역병이 또 퍼졌잖아! 이게 너희 탓이 아니면 뭐야!? 당장 짐 싸서 마을을 떠나라고!"

수십의 사람이 모자를 둘러싸고 흉흉하게 쏘아붙였다.

향아의 말마따나 역병의 죄를 그들에게 묻고 있었다.

"제발요! 우리 둘이 마을을 떠나면 대체 어디로 가란 말이에요? 얼마 못 가 죽고 말 겁니다!"

"이이익! 그건 알 바 아니야! 너희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다 죽게 할 셈이야!? 양심이 있으면 빨리 꺼지라고!"

"맞아! 당장 나가!"

"우리도 살고 싶다고! 너희 모자만 목숨이 아니란 말이야!"

똘똘 뭉친 악의는 아주 지독했다.

마을을 떠나서 모자가 살 수 있는지, 살 수 없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독 오른 짐승마냥 물어뜯었다.

"서, 서씨 아저씨. 지난번에는 제가 농사도 도와 드렸잖아요. 윤 씨 아주머니. 제가 반찬도 해 드렸는데. 기억 안 나세요? 네?"

"모, 몰라 그런 거! 친한척 하지 마!"

"달라붙지 마! 역병이 옮으면 어쩌려고 그래!?"

바짓단을 잡고 사정해도 사람들은 냉정했다.

그래도 한때는 이웃이라고 친분을 나누던 사이였지만, 역병 앞에서는 어림없었다.

모자는 금세 구석으로 몰렸다.

"다들 정말 너무 하시네요! 그래도 한때 이웃이었는데! 이렇게 지독하게 굴어야 하나요!?"

"이, 이웃은 무슨! 당장 나가라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엄마!"

그리고 몰린 거리만큼 난폭한 행동이 나왔다.

고집부리는 어머니 쪽으로 한 남자가 손을 휘두른 것이다.

솥뚜껑 같은 손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아악―!"

하지만 비명을 토한 건 어머니 쪽이 아니었다.

"의, 의원님?"

"다친 곳은 없습니까?"

어느새 군중 사이로 끼어든 명한.

사내의 손목을 비틀어 꺾은 채 모자 앞을 막아섰다.

사내는 고통에 인상을 구기면서도 소리치는 걸 잊지 않았다.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군. 우르르 몰려와서 힘없는 모자를 핍박하는 이유가 뭐냐?"

"의원님이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헛소리는 그만 좀 하고. 저 멀리서도 역병 어쩌고 떠드는 소리가 다 들렸거든?"

"이익! 그렇게 잘 알면 끼어들지 마시죠!"

사내는 역정을 내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래도 마을의 유일한 의원이라고 대번에 덤벼들지는 않았다.

명한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사람은 교육이 필요하다니까. 내가 저 애의 증상은 청사독이라서 역병과는 관계없다고 했지? 사람 말이 귓구멍에 제대로 안 박히나?"

"그 청사독인지 뭔지에 걸린 사람들이 나오고 나서 역병으로 한 집이 다 쓸렸습니다! 이게 관계가 없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없다니까. 역병의 증상과 청사독은 전혀 관계가 없어."

"우린 못 믿겠습니다!"

"하아. 이 마을 유일한 의원의 말도 못 믿겠다?"

더욱 깊이 한숨을 내쉬는 명한.

벽에 대고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잠깐. 잠깐만."

하지만 이건 시작이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한동안 잠잠하다가 저 의원 나으리 오고 나서 다시 역병이 퍼진 거 아니야?"

"어? 맞지, 맞어. 한동안 잠잠하다가 의원님 오시고 부터 심해졌지. 사실 우리야 저 청사독인지 뭔지도 알 도리가 없으니······의원이라고 속여놓고 역병을 뿌리는 거 아니여!?"

"맞아, 맞아! 내가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생긴 거부터 아주 요사스럽잖아!"

이번엔 목표를 아예 명한으로 옮겼다.

외부에서 들어온 지나치게 어린 의원.

처음부터 못 미더웠던 것이다.

우르르 몰려가서 에워쌌다.

"하아. 오지에가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존경스러워 보이네."

더욱 깊어지는 명한의 한숨.

무지와 불안의 산물임은 알지만,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

명한이 허리춤의 타구봉을 만지작거렸다.

싹 다 두드려 패고 난 뒤, 창고에 처박고 싶었다.

‘참자, 참자. 다시 볼 인간들도 아니고.’

참을 인 세 번을 삼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쌍아야, 나와라."

대신 품 안에서 쌍각사를 꺼내서 내밀었다.

소란스러워지는 건 피하고 싶어서 참았던 수이나, 이 마당에는 어쩔 수 없다.

날개 한 쌍이 달린 뱀에 마을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무지한 것들아. 이 어르신이 누군지 알고 이리 경망스럽게 구는 거냐?"

그리고 쌍각사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의지로 이어진 쌍각사는 대번에 뜻을 이해했다.

마치 구름을 유영하는 용처럼 마을 사람들 머리 위를 한동안 휘저은 뒤······

콰르르릉!!!

힘껏 벼락을 내리쳤다.

마른하늘에서 떨어지는 날벼락에 마을 주민들이 깜짝 놀라며 주저앉았다.

"시, 신령이시다!"

"꺄아악! 시, 신선께서 오셨다! 신선이야!"

"아이고, 아이고! 우리가 뭔 짓을 한 거람!?"

"다들 뭐 하고 있어!? 무릎 꿇어, 무릎!!"

이런 촌구석에 사는 사람일수록 영과 신에 약하다.

벼락을 내리치는 날개 달린 뱀이면 의심 따위를 품을 시간은 없다.

땅에 머리를 심을 듯 조아리기 바빴다.

"내 이 마을이 흉흉하다 싶어 친히 걸음을 옮겼거늘, 이리 눈이 멀어 악심을 품을 줄이야."

"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신선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명한의 한 마디에 절절맸다.

신선을 노하게 하면 벼락 맞아 죽는다, 정도는 흔히 있는 민간 신앙.

눈앞에서 증거를 봤으니 반항할 배짱은 없었다.

"정녕 너희의 죄를 알겠느냐?"

"알고 말고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신선님.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요.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요!"

쿵쿵, 머리 박는 꼴에 의심은 없었다.

‘진즉에 이렇게 할걸.’

명한이 짧게 코웃음 치며 타구봉으로 땅을 툭툭 두드렸다.

무겁게 실린 내기에 땅이 푹푹 파였다.

"또다시 죄 없는 이들을 괴롭히려 하면 네놈들 머리를 이렇게 만들어주마. 알겠느냐?"

"히, 히익! 알겠습니다! 신선님 말씀인데 저희가 어찌 감히 죄를 짓겠습니까."

"지켜보겠다."

감히 눈조차 마주치는 이가 없었다.


0